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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de in x Jun 05. 2020

아빠, 어떻게 하면 잘 내려갈 수 있을까요?

[에세이] 아빠와 딸의 네팔 여행기(13)

4일 차: 타다파니-간드룩-란드룩

“산은 내려갈 때, 더 조심해야 해.”


네팔 어느 내리막길에서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4일 차 트레킹은 출발지 타다파니에서 목적지인 란드룩까지 약 1,000m를 내려간다. 일반적으로 등산은 정상을 향해 올라가고 다시 산 아래로 내려오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의 트레킹 코스는 산맥을 따라 둥그렇게 걷기 때문에, 하루 동안 여러 개의 작은 산을 오르내린다. 다시 말해 내려가는 건 확실한데 몇 번을 내려갈지 모른다는 뜻이다.


어린 시절 가족들과 등산을 하면, 만만한 게 내리막길이라 오빠와 함께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녔었다. 그러다가 매끈한 돌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거나 발을 헛디뎌 앞으로 고꾸라지기 일쑤였다. 부모님은 아이들을 일으켜 세우고 옷에 묻은 흙을 털어주었다. 올라가는 길보다 내려가며 다리에 힘이 풀려 다치는 경우가 많으니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오늘 트레킹 코스의 초반은 완만한 내리막길이다. 화창한 날씨에 슬슬 덥기 시작할 즈음 이유 모를 큰 공터가 나와 잠시 쉬기로 한다. 가만히 앉아있으니 이름 모를 산새가 울고 우거진 나뭇잎 사이로 살랑바람이 분다. 며칠 만에 익숙해진 설산이 보이고 구름도 평화롭게 흐른다. 아빠는 아침 일찍 나가 해돋이에 비친 설산의 자태에 감격하더니 눈에 보이는 설산마다 감탄사를 연발한다.


“이야, 멋지네!.”


찰칵. 설산을 배경 삼아 아빠의 사진을 찍는다. 태양을 피하려고 선글라스를 쓴 채 감지 못해 이대팔이 된 머리와 팔을 허리에 올리고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선선한 바람에 땀이 말라 체온이 떨어지기 전에 걸음을 옮긴다.



하늘 높이 솟은 나무 사이로 작은 오솔길을 걷는다. 나무가 얼마나 오랫동안 자라서 땅속을 파고들었는지, 다리 만 한 뿌리들이 울퉁불퉁 튀어나왔다. 햇빛이 나뭇잎 사이로 비추는 곳에선 마른 낙엽이 걸음에 맞춰 바스락 소리를 낸다. 반면 우거진 그늘에 가려진 흙은 눅눅하고 끈적하다. 줄곧 내리막길을 걸어 힘이 빠진 데다가 젖은 낙엽을 밟자 발이 미끄러져 삐끗하고 다리가 휘청거린다. 뒤에서 걱정하는 아빠에게 민망한 웃음을 지어 상황을 무마한다.



잘 정돈된 집을 실컷 구경하니 미로 같은 간드룩과 작별을 고하는 문이 나타난다. 그 뒤로는 계속 계단이다. 트레킹을 하며 일 년 치 걸을 계단만큼 많이 걸었는데, 여긴 특별하다. 낭떠러지처럼 가파른 경사는 둘째치고 계단 간 간격이 너무 크다. 작은 키 때문에 최대한 발을 뻗어도 닿지 않아서 무릎을 접어 기마자세로 걷는다. 계단을 오르는 건 무게중심을 앞에 두고 걷는 반면 내려가는 건 무게중심을 살짝 뒤로 두고 허리를 꼿꼿이 펴고 걷는다. 가방을 멘 어깨가 계속 눌려 아플 수밖에 없고 어깨가 아프면 속도가 자연스럽게 빨라진다. 목부터 발끝까지 몸 전체에 힘을 주고 빠른 속도로 걸으니 고역이었다.


가이드에게 뭔가 단단히 잘못했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름길이라고 설명하며 어마 무시한 계단으로 데려올 리가 없다. 이 계단의 끝은 지옥일까? 차라리 데굴데굴 굴러서 내려갈까? 별의별 생각이 부글부글 끓는다. 그때 가이드가 계단 끝에 맛있는 식당 있으니 점심시간을 맞춰서 가자고 길을 재촉한다. 환하게 짓는 미소에 차마 못 가겠다는 말도 못 하고, 미운 일곱 살처럼 허공에 대고 심술을 부린다.


“이 계단 누가 만들었어!”

“잠깐만 쉬면 안 될까요?”

“정말 계단 지긋지긋해.”

“에휴, 정말…. 후….”


투덜대는 딸과 달리 아빠는 편안한 표정이다. 발걸음은 가볍고 사뿐하며, 등산용 스틱으로 계단을 찍는 탁탁 소리가 경쾌하다. 심지어 딸의 투정에 여유롭게 대꾸한다.


“아빠는 그래도 산에 많이 다녀서 괜찮은데? 내려가는 법을 아는 거지. 발 전체로 계단을 밟지 말고 발끝으로 먼저 내려가 봐. 그리고 앞으로 말고 옆으로 걸어.”

“그냥 뻗으면 발이 안 닿는데 어떻게 발끝으로 걸어요? 다리가 짧은 걸 어떡해요?!”


끝엔 계단이 완만해졌어요!

가던 길을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라서 이 악물고 마지막까지 내려간다. 자그마치 한 시간 동안 계단만 걸어 식당에 도착했다. 의자에 기대앉아 팔다리를 힘없이 늘어뜨린다. 한국에선 거의 마시지 않는 아주 차가운 콜라를 마시고 싶었다. 페트병 뚜껑을 열자 치-익 기포가 올라온다. 벌컥벌컥 들이키자 탄산이 짜릿하게 목구멍을 때리고 입안에선 자극적인 달콤함이 느껴지니 이제야 살 것 같다. 어린 시절과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다. 여전히 내리막길은 오르막길보다 위험하고, 잘 내려가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 시절 부모님의 잔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듯하다.


“항상 산은 내려갈 때, 더 조심해야 해.”


+) 아빠의 말

아빠와 딸의 네팔 영상엔 계단을 걷는 모습도 담겨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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