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에게 당찬 다짐을 털어놓는다. 시간은 오후 두 시를 조금 넘겼고, 목적지까지 도착하려면 약 1시간 정도 계단을 올라야 한다. 하늘을 살피니 구름이 심상치 않다. 머지않아 하늘을 뒤덮을 듯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낸다. 행여나 날씨가 추워져서 씻지 못할까 봐 조급하다.
트레킹에선 씻는 것도 사치였다. 벌써 3일째 트레킹으로 땀 흘린 상태에서 제대로 씻지 못했다. 겨울 네팔 하늘은 낮엔 푸르게 화창하다가 3시나 4시를 기점으로 하얀 기체에 뒤덮인다. 기온이 급격하게 내려가서 씻을 엄두가 나지 않고, 씻으면 떨어진 체온 때문에 감기나 고산병에 걸릴 위험이 있다. 땀으로 엉겨 붙은 머리를 낮엔 챙 넓은 모자로 가리고 밤엔 털모자로 숨겼는데 도무지 찝찝해서 견딜 수 없다.
비장하게 신발 끈을 묶는다. 만에 하나 발생할 근육통을 대비해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손목과 발목을 돌리고 허리를 좌우로 꺾는다. 손으로 발끝을 잡아 다리를 뒤로 당겨 허벅지 앞 근육을 풀어준다. 폐 깊숙한 곳까지 숨을 불어넣으며 긴장되는 마음을 차분히 진정시킨다. 등 뒤에 멘 가방끈을 주먹으로 움켜쥐고 결연한 의지를 다진다. 출발이다. 왼발에 머리, 오른발에 샤워, 속으로 구호를 외치며 발걸음에 박자를 맞춘다.
왼쪽 아래 아빠가 보입니다.
상대는 절대 만만치 않은 녀석이다. 절벽을 깎아 계단식 논 옆에 두고 돌로 계단을 만들었다. 에스컬레이터와 맞먹는 경사를 쉬지 않고 오르자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하루 동안 걷는 길의 마지막 구간인 만큼 몸은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열 오른 얼굴은 벌겋고 표정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려 일그러진다. 심장의 쿵쾅대는 박동이 피부에 느껴지는 게 멈출 수 없는 폭주 기관차 같다. 계속 걷다가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함께 올라가던 포터를 부른다.
“자… 잠시만 쉬었다 가요.”
숨을 코로 최대한 들이마시고 입으로 천천히 뱉는다. 잠시 뒤를 돌아서 걸어오는 아빠를 확인하고 짧은 휴식을 끝낸다. 미련하게 아무도 시키지 않은 자신과 싸움을 하는 와중에 앞에 선 포터가 뚱딴지같은 소리를 꺼낸다.
“오늘 남동생이 생일이에요.”
“네? 뭐…. 뭐라고요?”“남동생이 생일이에요.”
“아, 축하해요. 집에서 축하 못 해서 어떡해요?”
“아침에 전화하고 왔어요.”
“그렇구나.”
갑자기 남동생 이야기가 왜 나온 걸까? 그래도 덕분에 호기심이 생겨 아주 잠깐 힘든 걸 잊은 채 딴생각을 할 수 있었다. 포터가 집 하나를 가리키며 저기까지 가면 도착이라고 알려준다. 도착지인 집은 사막의 신기루처럼 닿을 듯 닿지 않는다. 누가 아래로 잡아당길 때처럼 무거운 다리를 억지로 끌어올린다. 마침내 마지막 계단을 있는 힘껏 밟으며 목적지에 도착했다. 힘들어서 멋대로 튀어나오는 숨을 정돈할 새도 없이 웃음이 실실 새어 나온다.
“와!”
“you are so strong! (정말 강하네요)“
“Thank you. (고마워요)”
격한 성취감에 취해 대화를 나누는데, 옆에서 삼베 짜는 아주머니가 힐끗 보다가 시선을 거둔다. 낮은 돌담에 앉아 기다리자 아빠의 정수리 끝이 보인다. 딸만큼 열심히 올라왔는지 숨을 헐떡거린다. 햇볕은 여전히 쌩쌩하고 구름은 아직 도착하지 못했다. 우리가 해냈다.
란드룩 롯지는 뜨거운 물이 나오는 샤워장이 야외에 있다. 가격은 20루피(한화로 약 1,200원 정도)로 공중 화장실 한 칸 정도 크기에 변기와 샤워기 하나가 전부다. 옷걸이는 문에 박힌 연약한 못 몇 개가 대신한다. 롯지 직원이 온수 장치를 켜기 때문에 물 온도를 맘대로 바꿀 수 없다. 여러모로 불편하지만, 이조차 감지덕지다.
아빠와 딸은 오랜만에 제대로 씻고 야외 의자에 마주 앉아 햇빛을 쐰다. 가볍게 부는 자연 바람에 머리를 말리니 상쾌하고 개운하다. 아빠는 가이드에게 들은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마주 본 산에서 우리가 걸어온 길은 어디인지, 버스가 높은 산 중턱까지 간다는 놀라운 사실과 트레킹에서 유명하다는 온천은 어느 지역인지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어느새 붉은 노을이 지고 저녁 먹을 시간이다. 따뜻한 레몬 생강차를 마시니 속까지 뜨끈하게 데워진다. 딱 보기에도 맛있게 생긴 밥과 반찬들로 든든하게 배를 채운다. 음식이 주는 포만감이 밀려오고 기분이 노곤하다. 마지막 숟가락을 뜰 때는 눈은 감긴 채 입만 움직인다. 평소보다 더 이른 시간인 7시쯤 누웠다. 잠에 취해 흐트러진 목소리로 웅얼거린다.
“오늘은 바로 잘 거예요. 일기도 내일 쓸래.”
“그래.”
“근데 오늘 내리막길은 정말 최악이지 않아요?”
“어휴, 심하긴 했지.”
“그래도 오늘 빨리 와서 머리도 감고. 여기 밥도 엄청 맛있네요. 다른 곳보다. 네팔 와서 제일 맛있었어요. 요거트도 엄청 맛있었어요. 상큼하고.”
컴컴한 방 안에서 천장을 보던 아빠도 대꾸한다.
“맞아. 오늘 쌀은 날리는 쌀이 아니고 보들보들해서 좋았어. 아까 들어오기 전에 주인아저씨한테 밥 맛있냐니까 맛있다고 하더라. 요구르트도 직접 만드나 봐. 아까 이 집 아들이 염소랑 젖 짜는 병들고 왔다 갔다 하던데?”
소곤소곤 시작된 이야기 덕분에 잠이 달아났다. 오히려 분위기는 무르익어 점점 과거로 돌아간다. 네팔에 있는 동안 많은 추억을 쌓았다. 카트만두의 먼지 풀풀 풍기던 아침 시장과 포카라 하늘을 날던 패러글라이딩, 높은 산을 지프로 오르던 경이로운 경험까지. 재밌었던 기억에 대해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아쉬웠던 일은 웃으며 넘긴다. 불 꺼진 컴컴한 방에 누운 채로 어둠을 벗 삼아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대화가 이어진다. 자라면서 아빠와 나누는 대화가 줄어든 건 우리 사이에 함께 나눈 추억과 시간이 점차 줄었기 때문일까? 어제를 말하던 아빠가 이제 내일을 이야기한다.
“내일 가는 곳은 TV에서 봤는데, 텐트가 쫙 있고. 멋있던데.”
아빠의 기대를 들으며 혼자 생각한다. 단단하게 뭉친 다리 근육 때문에 내일은 걸을 때마다 고통스럽고 걷는 폼은 우스꽝스러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후회는 없었으니 내일도 보람찬 하루가 되길 소원한다. 밤의 침묵 아래 속삭이는 목소리로 피우던 이야기꽃은 지고, 새로운 기대를 심은 채 깊은 잠에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