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산티아고 순례길 포르투갈길 (13) : 포르투갈을 떠나며
‘정(情)’이 무섭다. 일상에서 시간을 보내고 마음 한 구석에 추억이 있는 모든 것들에 정이 생긴다. 사람, 물건, 심지어는 시간과 기억 자체에 정이 든다. 정든 무언가와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다면 행복하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끝이 존재한다. 격렬하게 애정을 쏟은 관계이든,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심정이든지 상관없이 정든 존재와의 이별은 쉽지 않다.
유행이 지나 입을 수 없지만 아끼는 옷이나 공부할 때 필기해둔 공책을 옷장과 책장에 가득 채워둔다. 굳이 필요하지 않지만, 옷을 입었을 때 마음에 쏙 들었거나 열심히 공부했던 기억이 물건에 투영되어 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짐이 불어나도 버리지 못한다. 졸업식을 포함해 마지막이라는 의미로 인사하는 자리에서 사람들이 시원섭섭하다고 말하는 이유도 비슷하지 않을까?
이제 겨우 20대를 살아가고 있다. 벌써부터 귀에 박히도록 듣는 ‘100세 시대’에서 이별을 얼마나 더 해야 할지 가늠할 수 없다. 시간이 흐르고 누구에게나 어른처럼 보이는 나이가 되면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혹은 정을 주지 않으려 미리 마음의 문을 닫아버릴까?
그런 의미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은 좋은 선생님이다. 모든 순레자가 숱한 만남과 이별을 반복한다. 매일 같은 곳에서 머물지 않고 걸으며 이동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무수한 사람과 오만가지의 ‘무언가’를 만난다. 순례길이라는 특수한 상황은 시간이 짧아도 강한 감정적인 교류가 이루어지도록 돕는다. 오늘 분명 처음 만난 사이인데 오래 본 것처럼 편한 사이가 된다. 정이 들고 각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김없이 이별이 찾아온다. 언제 어디서든 예상했든 갑작스럽든 헤어져야 하는 순간이 온다. 모든 순례자들은 피할 수 없고 이별 앞에 어찌할 방법이 없다.
비단 사람에만 정이 생기는 건 아니다. 애틋한 감정은 쌓여서 장소로 전이된다. 순례길에서 가장 오래 떠올린 이별은 포르투갈이었다. 카미노 포르투게스(산티아고 순례길 포르투갈길)는 포르투갈과 스페인 두 나라를 연결한 길이다. 국경을 넘는 순간이 있는데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스페인에서 중앙길을 걷는 사람들은 육로를 통하고 해안길을 선택한 사람들은 배를 타고 이동한다. 원래 계획은 포르투갈에서만 해안길을 걷고 스페인부터 역사가 더 오래된 가진 중앙길을 걸으려고 했다. 우연하게 길에서 만난 한국인 순례자들과 동행했는데 배를 타고 국경을 넘는 건 특별한 경험이고 스페인 바다를 보며 같이 걸으면 어떠냐는 제안을 해주셨다. 포르투갈 해안길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 있어서 바다를 더 보기 위해 처음 계획과 다르게 배를 타게 되었다.
포르투갈 카민하(Caminha)에서 스페인 아 구아다(A Guarda)까지 배로 10분 남짓이다. 사진을 찍고 갑판장에서 바닷바람을 맡으면 순식간에 도착한다. 바로 옆 나라이고 배로 10분 거리밖에 오지 않았는데 다른 세상 같았다. 일단 언어가 달라졌다. 포르투갈 사람들과 아침마다 인사하던 ‘Bon dia’가 ‘Buenos dias’로 바뀌었다. ‘감사합니다’도 스페인어인 ‘Gracias’가 아닌 포르투갈어 ’obrigado’ 가 먼저 튀어나왔다. 1시간의 시차도 있다. 음식도 사람들도 달랐다. 22일 동안 정이 든 포르투갈은 이제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스페인에서 처음 머물렀던 빌라도데서(Viladesuso)의 밤은 유난히 감성적이었다. 어두워지는 스페인 하늘과 숙소 앞에 덩그러니 있던 호텔을 보며 포르투갈을 그리워했다. 아나디아(anadia)에서 숙소를 찾을 때 길을 물어보기 위해 병원을 들어갔었다. 직원들과 주민들은 영어는 못해도 알려주려고 몸동작으로 최선을 다해 설명하셨다. 비록 거절했지만 설명을 이해하지 못하자 자신의 남편을 불러 숙소까지 차로 데려가 주겠다고 호의를 베풀었다. 잘 도착할 수 있는지 한참을 걱정하고 도움을 주려던 그들의 표정이 떠올랐다. 이어서 순박하게 웃음 짓던 포르투갈 사람들과 긍정적인 힘을 준 순례자 친구들, 포르투갈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들이 맥락 없이 튀어나왔다.
돌이켜보니 포르투갈에서 생각보다 더 많은 일이 있었다. 삐뚤어진 마음으로 시작했던 마음을 창피해하며 반성도 했고 사무치는 외로움에 스스로를 달래기도 했다. 포르투갈의 어제는 두렵고 무서웠지만 오늘은 감사하고 행복했으며 내일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22일을 걸어온 시간과 거리만큼 차근차근 단단해졌고 성장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에 대해 생각할수록 아쉬움과 씁쓸함이 점점 커졌다. 그렇게 10분 만에 떠나온 포르투갈과 밤새도록 이별했다.
나만 유난스러운 걸까? 과하게 감성적인 걸까?
모든 순례자들이 이별하는데, 그들의 마지막은 어떤 모습일까?
하루만 더 걸으면 순례길이 끝나는 마지막 날이었다. 호스피탈(Hospital)은 마을에 숙소도 하나뿐이고 식당도 없어서 다 같이 모여 숙소 주인이 차려주는 저녁을 먹어야 했다. 한참 동안 식사를 하고 다음날 가게 될 장소와 어제 묵은 숙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목소리가 크고 친화력이 좋아서 많은 사람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던 한 순례자가 감상에 젖어 말했다.
“어제 정말 좋은 밤이었어. 알베르게(순례자를 위한 숙소)는 마치 할머니 같은 사람이 친절하게 맞아줬고 모든 식사는 그 집 정원에서 나온 재료들로 만들어졌어. 특히 호박 수프는 끝내줬어. 너무 맛있었지.”
다른 곳에서 머물렀던 순례자들은 흥미롭게 들으며 호박 수프를 먹고 싶다고 말하거나 어제 자신이 묵은 숙소는 그저 그랬다고 대답했다. 처음 이야기를 꺼낸 순례자가 그들의 말에 호응해주며 말했다.
“근데 알지? 순례길에서 어제는 그저 어제였을 뿐이야. 오늘은 오늘이고.”
정든 무언가와의 이별은 순례길에서도 여전히 어려웠다. 앞으로도 한동안은 이별에 덤덤해지거나 무뎌질 수는 없을 것 같지만, 호스피탈에서 들은 그의 말이 도움이 되었다. 후회 없이 정든 순간에 느낀 감정을 표현하고 기억하는 것. 덧붙여 과거는 이미 지나가서 돌이킬 수 없고 다시 현재에 충실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순례자들은 이미 어제의 길을 걸었고 오늘은 오늘의 새로운 길을 걷는다.
우당탕탕 포르투갈 순례길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