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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de in x Apr 05. 2019

종교가 달라도 순례길을 걸어도 될까요?

[에세이] 산티아고 순례길 포르투갈길 (16) : 따뜻한 헤르본의 추억

여행의 시작부터 오랜 시간 망설인 글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순례길’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종교적인 의미에서 시작되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Santiago de Compostela)가 위치한 스페인은 일요일이면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을 만큼 가톨릭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국가이다. 태어나서 성당 미사는 초등학교 시절 친구 때문에 갔던 딱 한 번이 전부였다. 심지어 초대한 친구가 성가대에서 피아노 반주를 해서 혼자 멀뚱멀뚱 앞만 바라봤던 기억이 있다. 눈치껏 사람들이 일어날 때 일어났다가 앉을 때 따라서 앉기만 했다.


참고로 나의 종교는 불교이다. 거의 부처님 오신 날에만 절에 가는 무교 같은 불교 신자이지만, 이름을 스님이 지어주셨을 만큼 탄생부터 함께한 종교이다. 그래서 더더욱 자신이 없었다. 종교 자체에 대해 무관심하고 아는 게 없이 글을 써도 될까? 모르고 쓴 개인적인 생각이 누군가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을까? 자격이 있을까? 그럼에도 쓰지 않으려던 내용을 쓰기로 결심하고 내려놓은 펜을 다시 잡은 이유는 운명처럼 헤르본(Herbon)이라는 작은 마을로 이끌어준 순례자와 그녀와 함께한 따뜻했던 첫 미사의 기억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 순례길에서 성당과 십자가를 쉽게 볼 수 있고 지나쳐도 미사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마땅한 기회가 없었다. 친했던 순례자 친구들은 가톨릭 신자가 아니고 여행의 목적으로 걸었다. 혹은 종교가 가톨릭이라도 무슨 이유인지 미사엔 가지 않았다. 알지도 못하는 미사에 참여해서 뻘쭘히 눈치를 보느니 꾹 참았다가 꼭 산티아고 대성당 미사에 참여하겠다고 다짐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이틀이 남았을 때, 체코에서 온 에바(Eva)를 만났다. 순례길의 모든 만남처럼 에바와의 만남도 운명 같았다. 브리올로스(Briallos)라는 작은 지역의 숙소에서 단둘이 묵게 되었다. 그녀는 20대 초반의 두 딸을 둔 엄마로, 나와 동갑인 첫째의 결혼을 준비하느라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순례길에 왔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지만 6개 국어를 하는 엄청난 친화력의 소유자였다. 그녀의 쾌활한 웃음소리와 생동감 넘치는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이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에바가 나눠준 화이트 와인

다음날 갈 곳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헤르본의 알베르게(Albergue)를 소개해줬다. 정식 코스는 아니고 정식 코스보다 돌아서 3Km 정도 더 가야 하는 곳이었다. 에바는 이전에 만난 순례자에게 추천을 받았던 곳이라며, 다른 순례자들에겐 꽤 유명한 알베르게라고 덧붙였다. 구글에 위치 정보를 찾아보니 ‘인생 알베르게’라는 한국인 순례자의 리뷰가 있었다. 유쾌한 에바와 하룻밤 더 만나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유명세에 대한 호기심으로 헤르본의 알베르게에 가기로 결정했다.


알베르게는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이다. 순례길에 속한 마을에 있으며 운영되는 방식도 요금도 천차만별이다. 공립 알베르게와 사립 알베르게로 나눌 수 있다. 수도원이나 요양원의 일부 공간을 순례자들에게 제공해주는 경우나 순례자가 아닌 일반 여행자들이 묵는 호스텔도 알베르게가 될 수 있다. 순례자는 성별의 구분이 없기 때문에 대부분 남녀공용으로 생활하지만, 간혹 일부 숙소에서는 침실의 구분을 짓기도 했다. 가격도 제각각이라 단정 지을 수 없고 기부제인 숙소도 존재한다. 묵었던 숙소 중 가장 비싼 곳은 비고(Vigo)의 호스텔로 6인이 이용하는 방의 침대 하나에 18유로였다.


알베르게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크레덴시알 (Credencial, 순례자 여권) 이 필요하다. 한국에서 미리 만들 수 있고 공립 알베르게 등에서 살 수 있다. 포르투갈길은 시작 지점인 리스본 대성당에서 구매하는 방법을 추천하고 싶다. 체크인할 때 순례자 여권에 ‘세요(Sello)'라는 도장을 찍어준다. 숙소, 식당, 카페의 도장을 모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자 사무실에 가면 인증서를 받을 수 있다.


헤르본의 도장 (왼쪽이 최신, 오른쪽이 옛날 버전)

헤르본 알베르게로 향하기 위해 옆으로 빠져나온 길은 숲 속의 요새를 찾는 여정과 비슷했다. 나무가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거져있고 꽤 규모가 큰 강을 건넜다. 높고 큰 담벼락을 둘러싸인 건물을 빙 둘러서 입구 앞에 서자 3시쯤 이미 순례자들이 모여서 문이 열리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침대 자리 수가 모자라서 혹시 뒤에 오는 에바의 자리가 없을까 노심초사했다. 문이 열리자 순례자들은 줄을 섰고 기념 도장만 받은 채 산티아고 대성당과 가까운 근처 마을로 길을 나서는 순례자들도 많았다.



알베르게는 오래된 수도원의 공간을 순례자들에게 제공하는 숙소였다. 기부제로 운영되며 저녁과 아침식사가 제공된다. 식사를 비롯해 취침, 퇴실 시간이 엄격한 시간표를 따라야 했다. 숙소 내부는 더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풍겼다. 작은 방엔 이층 침대 하나와 작은 의자 하나뿐이었다. 침대는 위아래 상관없이 조금만 움직여도 끼-익 녹은 쇠 소리가 났다. 샤워시설이 적어서 씻으려면 계속 기다려야 했다. 다른 곳보다 낫다고 말할 수 없음에도 수도원을 소개해주는 시간과 순례자를 위한 저녁 미사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이유이다.


수도원 소개는 영어와 스페인어로 진행되었다. 관계자님이 스페인어로 설명하고 스페인어와 영어에 능숙한 이탈리아 순례자가 번역을 해서 전달했다. 에바는 영어로 듣고 다시 폴란드 어로 폴란드 순례자들에게 전달했다. 성당을 이루고 있는 조각부터 정원에 있는 나무까지 수도원의 모든 부분이 역사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소개를 맡은 수도원 관계자님이 재치 있고 자세하게 설명하셔서 종교에 대해 처음 듣는 이야기들도 지루하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순례자들도 더 궁금한 내용을 질문하며 학구적이고 진지한 태도로 참여했다.

24일 만에 처음으로 미사에 참여했다. 혹시 가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이 들어도 되는지 에바에게 물어보니 누구에게나 열린 시간이라고 했다. 에바의 말처럼 순례자를 위한 미사에 몇몇 일반 주민분들이 찾아와 함께 했다. 이번 미사도 순서를 몰랐고 심지어 신부님께서 스페인어로 진행하셔서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도 에바가 아는 부분이나 순서 등을 영어로 간단하게 설명해주어 겉도는 느낌은 없었다. 은은한 조명으로 채워진 성당과 흰 제복을 입은 신부님의 말 한마디마다 차분하면서도 온화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픈 다리로 무릎을 꿇은 채 눈을 감고 기도하는 순례자는 누구를 생각하며 기도했을까? 옆자리 에바도 성심성의껏 기도하고 있었다. 그들의 시간은 아무도 막지 못할 것처럼 굳건했다. 나중에 물어보니 에바는 사랑하는 가족과 남자친구를 위해 기도했었다. 자신과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기도를 하고, 온 마음으로 순례길을 걸으며 종교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가 존경스러웠다. 서툴지만 다른 사람들을 따라 두 손을 모으고 앉아 성당 구석구석의 공기와 기도하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특히 감명 깊은 부분은 서로 응원하고 축복해주는 의미로 앞뒤로 주변에 앉은 사람과 악수하는 시간이었다. 삼삼오오 주변을 보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손을 잡을수록 서로에게 더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앞에 앉아 머리에 미사보를 쓴 채 기도에 열중하던 할머니의 손은 따뜻했고 에바의 손은 그녀처럼 포근했다. 오늘 하루도 고생하며 걸은 순례자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남은 길을 응원하는 시간이었다.


이어서 주민들이 돌아가고 오직 순례자들을 위한 시간이 준비되어있었다. 수도원을 구경하기 전에 각자의 국적을 물었는데, 미사 끝에 자신의 언어로 된 기도문을 낭독하기 위함이었다. 둥그렇게 모여 한 명씩 앞에 나가 기도문을 낭독했다. 한국어로 된 기도문을 사람들 앞에서 읽으려니 긴장되었다.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번역체가 아니라 한글 중에서 예쁜 단어와 예쁜 문장을 모아둔 글이었다. 잘하고 싶어 최대한 큰 목소리로 또박또박 기도문을 읽었다. 성당 가득 우리나라의 말이 퍼져 마음의 종을 쳤다. 다른 나라의 사람들 앞에서 한국어로 기도문을 읽을 수 있다니.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순례자다운 모습이었다.

순례자라는 이름으로 걷는다면 순례길의 탄생 이유와 의미에 대해 관심을 가져도 좋지 않을까? 가톨릭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고 여전히 종교라는 개념은 크고 멀게 느껴진다. 하지만 사람과 장소는 다르다. 기도하는 순례자는 친구로 떠오르고 성당과 십자가를 지나던 순례길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조금만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 보는 건 어떨까? 더 많은 순례자를 이해하고 순례길에 대한 깊이를 더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아침식사를 차려주신 수도원 아주머니들은 마지막까지 다정하게 한 사람씩 안아주며 배웅했다. 산티아고에 무사히 도착하라고. 오늘도 좋은 길이 되라고. 매일 잔잔한 미소로 덤덤하게 건네는 인사를 얼마나 많은 순례자들에게 건넸을까? 누군가에게는 인생 동안 기억될 알베르게이고 매일 순례자들이 일부러 찾아와 줄을 서서 기다릴 만큼 가치가 있는 장소였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적힌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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