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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de in x Mar 29. 2019

순례자는 어떤 속도로 걸어야 적당한가요?

[에세이] 산티아고 순례길 포르투갈길 (15) : 속도는 중요하지 않아

머쓱하게 웃어넘기곤 했다.


“왜 이렇게 빨리 가? 급한 일 있어?”

“조금만 천천히 가”

“성격이 급한 편이구나?”


또 빨리 걸었구나. 누군가와 함께 걸을 때는 보통 주의하는데, 조금만 정신을 놓쳐도 원래의 빠른 걸음이 나온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늘 수업과 조별과제, 영상 동아리를 오가며 종종걸음으로 이동하던 일은 이제 습관이 되었다. 습관이 켜켜이 쌓이자 성격으로 바뀌었다. 급한 성격은 언제 어디서든 튀어나와 눈에 보이는 일은 여유가 있어도 바로 해치워야 직성이 풀리고 밥도 후루룩 빠르게 먹는다. 걷는 속도에 대해 크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어도 이야기를 듣는 찰나의 순간은 민망했다. 무의식 중에 바쁘게 살아야 한다고 압박하는 자신을 들킨 것 같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땐 다를 거라 믿었다. 다급하게 어딘가로 향하는 순례자는 생각만 해도 낯선 모습이니까. 만물을 관찰할 것 같은 여유와 한 발자국에 고뇌를 담고 다음 발자국에 자기 성찰을 하는 모습. 상상 속 순례자처럼 자연스럽게 느긋한 행동으로 변할 거라 막연히 기대했다. 그러면 스스로를 압박한다는 죄책감도 사라지지 않을까?


걷기 전 리스본 한인민박에서 만난 언니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단언했다. 자신도 급한 성격으로 살아서 아는데 속도가 오히려 더 빨라지기는 쉽지만, 천천히 걷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그땐 설마 하는 마음으로 흘러 들은 언니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급한 성격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느려지지 않는다. 내일부터 일찍 일어나고 운동을 하고 책을 꾸준히 읽으며 살을 빼겠다는 새해 다짐만큼 힘들다.


순례길 시작부터 이미 산산조각이 났다. 초반에 만난 순례자 친구들이 넘치도록 잘 걸었다. 2일 동안 같이 걸은 타일러는 4번째 순례길이었고 일주일 정도 같이 걸은 매트는 각종 산악마라톤을 경험한 전문가였다. 심지어 매트가 오늘 길이 마음에 든다며 달리기를 하는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초보 순례자인 내가 그들과 동행해서 이야기를 나누니 저절로 속도가 빨라졌다. 그들과 보낸 시간이 즐거웠고 걷기가 익숙해지고 실력은 쑥쑥 향상되었다. 예상치 못한 혹독한 훈련으로 천천히 걷기는커녕 더 빨라졌다.



그들과 헤어져도 걸음은 그대로였다. 하늘은 막힘 없이 파랗고 길은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으며 만나는 사람들과 하하호호 웃음이 넘치니 순례길이 걸을수록 점점 더 좋아졌다. 매일 아침 걷기를 시작해서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들떠있었고 웃는 입꼬리 끝에 걸린 볼은 발그레해져 한껏 상기된 상태였다. 눈이 오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싶은 강아지와 장난감에 달려드는 고양이처럼 힘을 주체할 수 없었다. 천천히 걷자니 속이 답답하고 견딜 수 없었다. 매트를 보고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흘러 내적 신남이 최고조에 이르자 나도 모르게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길 위를 달리고 있었다.


어떻게 안 달릴 수 있나요

일부러 느리게 걷는 시도도 해봤지만, 맞지 않았다. 한국인 순례자들과 함께 걷기 위해 속도를 늦추며 오랜 시간 걸은 날이 있었다. 빨리 걸을 때보다 체력이 더 많이 소진되었다. 손톱만 하던 발바닥 물집은 신발과의 잦은 마찰로 인해 2배 이상 커졌고 발바닥을 바늘로 찌르는 느낌이었다. 쉬고 일어설 때 가장 정신이 아찔하고 찌릿한 감각이 온다. 자주 쉴수록 여러 차례 고통을 느끼는 셈이다. 더 큰 문제는 발이 아니라 어깨였다. 무거운 배낭이 어깨를 계속 누르니 어깨에 누군가 목마에 태우고 걷는 것처럼 무리가 왔다. 배낭을 조정하고 다시 메도 시간이 지날수록 어깨가 무너질 듯 아팠다.


하다못해 날씨와 체질 탓도 있다. 음식과 숙소는 전혀 가리지 않지만 유독 더위와 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다. 여름에는 땀을 비가 오듯 쏟아내고 겨울엔 최대한 두껍게 껴입어도 춥다. 카미노 포르투게스 (산티아고 순례길 포르투갈길)의 10월은 한국의 여름처럼 더워서 오후가 될수록 햇빛의 날카로운 공격에 시달린다. 입안이 바짝 마르고 속이 타는 더위에 단 1 Cm 도 움직이고 싶지 않다. 어쩌다가 시간이 늦어져 햇빛과 함께 걷는 날은 온몸에 기운이 다 빠졌다. 그래서 최대한 해가 가장 뜨거운 시간인 4시 전에 도착하려 노력했다. 주저리주저리 합리화를 늘어놓은 끝에 제멋대로 빨리 걷기로 했다. 순례길에서 죄책감이고 나발이고 전혀 티끌만큼도 생각나지 않았다.


동물 친구들 앞에서는 멈춘다

대신 빨리 걷기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했다. 빨리 걷기의 함정이란 속도에 대한 자만심이다. 빠른 속도로 걷는 일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잘 걷고 같은 시간 동안 더 많이 간다는 의미일 수 있다. 매일 새로운 마을에서 잠을 자야 하는 순례자들은 일찍 도착할 때 많은 장점이 있다. 좋은 침대 자리를 고를 수 있고 샤워 시설이나 세탁 시설을 먼저 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 짐을 풀고 마을을 둘러보고 쉴 시간도 훨씬 길어진다. 다른 순례자들보다 같은 시간에 많은 거리를 걸어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Santiago de Compostela)까지 먼저 도착할 수 있는 선택지도 늘어난다. 그렇다고 장점에 취해 자신의 속도를 과신해서 무리한 거리를 정하거나 이른 도착을 큰 자랑거리로 여기는 생각은 어리석게 보인다.


순례자 대다수는 안다. 순례길은 경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곳에서만큼은 타인과의 속도 경쟁이 무의미하고 자신의 목표만 있을 뿐이다. 천천히 걷어서 생기는 장점도 있다. 한국인 순례자들과 걸을 때, 아무것도 하는 일만 있을 모르고 앞으로 걷는데 바로 옆을 걷던 순례자가 길가에 달팽이를 발견했다. 비가 와서 축축해진 길을 따라 줄줄이 달팽이들이 이어져 있었다. 평소처럼 빠르게 걸었다면 발견하지 못하거나 뒤늦게 발견했을 텐데 그들 덕분에 달팽이들을 살피며 밟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걷고 달팽이와 사진을 찍으며 즐거운 추억을 쌓았다.

빌라세리오(Vilaserio)에 가던 날 만난 이니셜이 J로 시작하는 또 다른 한국인 순례자는 인사를 할 때부터 유독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반대로 빨리 걷길 시도했으나 자신에게 맞지 않아 천천히 걷기로 정한 후 훨씬 즐겁다고 말했다. 순례길 곳곳을 카메라에 담는 그의 눈빛엔 흔들림이 없어 더 멋있었다.


반대로 아무리 빠르고 쉽게 걸어도 매사에 불평불만을 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은 이미 다른 순례길을 걸어본 경험이 있어서 잘 걷는다는 이유로 타인을 무시하고 흠집을 잡아 깎아내리고 조롱한다. 물론 천천히 걷는 자신을 자책하거나 원망하는 순례자의 절망적인 표정도 똑똑히 기억난다. 돈과 시간은 기본이고 걷기라는 노력까지 해야 하는 순례길의 순간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는 안타까운 경우다. 속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좋은 길, 좋은 방법

어차피 산티아고 대성당은 언제나 같은 자리를 지키고 서 있고 아득히 길게 느껴지는 수백 킬로미터의 길은 생각보다 금방 끝난다. 교과서적인 교훈이지만, 스스로 약속을 하나 한다.

‘걷고 싶은 대로 걷되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걸어가자.’


이 글에 나온 친구들과의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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