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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de in x Apr 26. 2019

하루에 무지개를 7번 볼 수 있는 장소가 있어요?

[에세이] 산티아고 순례길 피니스테레길 (2) : 경험으로 기억한 감사함

도대체 짐을 챙길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30일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데 1000원짜리 비닐 우비 하나만 챙겼다.

분명히 제정신은 아니었다.



비 오는 날의 순례자들은 평소보다 분주하다. 일기예보에서 언제부터 언제까지 비가 올 지 체크한다. 비가 많이 올 경우 계획을 수정해서 짧게 걷기도 한다. 가방이 젖지 않게 레인커버로 감싸고, 땀이 전혀 흡수되지 않아 답답한 소재의 방수복이나 우비를 가방 속에서 꺼내 입는다. 감기 예방을 위해 미리 뜨거운 물을 챙기는 순례자도 있었다. 소수지만 비를 ‘liquid sunshine(액체상태의 햇빛)’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우비 없이 평소 입던 바람막이만 걸친다. 찢어질까 조마조마한 비닐 우비에 의지한 순례자도 마찬가지로 드물다.


다행히 순례길을 시작한 후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 포르투갈 리스본(Lisbon)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까지 25일을 걷는 동안 3일 정도 비가 내렸다. 그마저 숙소에서 자는 밤에 내렸고 목적지에 이미 가깝게 도착한 오후였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굳이 우비를 사지 않아도 충분히 걸을 만했다. 순례길을 일주일 정도 걸었을 당시 포르투갈은 계속된 가뭄으로 국민들이 비를 기다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가끔은 건조해진 날씨 때문에 숲에 불이 나 시커멓게 타버린 나무 사이를 걸어야 했다. 비를 맞지 않은 행운은 누군가의 간절했던 긴 기다림이었다.



비 내리는 날씨는 카미노 피니스테레부터 시작되었다. 핸드폰으로 검색한 일기예보엔 온통 비 내리는 구름 이모티콘이 가득했다. 날씨 때문에 지레 걱정하고 피니스테레를 포기하는 순례자도 생겼다. 막상 걸어보니 일기예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날씨 변덕이 몹시 심했다. 약 10분 단위로 달라지는 하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몸을 가누기 힘든 강풍과 함께 미스트처럼 흩어지는 비가 내리다가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가고 반짝이는 해가 고개를 내민다. 잠시 후 걸리적거리는 우비를 벗기 무섭게 마른하늘에 여우비가 내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하늘을 뒤덮은 회색 수분 덩어리로 인해 강한 소나기로 바뀐다. 폭파된 화산의 재처럼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먹구름을 볼 수 있다.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맞으며 철썩철썩 소리와 함께 펄럭이는 비닐 우비가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꽝스러웠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 나은 우비를 안 찢어지게 조심스럽게 벗고 입으며 웃음이 났다. 천방지축인 비 덕분에 재미있는 순간이 생겼다.


왼쪽의 파란 하늘과 오른쪽의 먹구름


가장 큰 이벤트는 무지개였다. 날씨의 변덕으로 한국에서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무지개를 하루 동안 무려 7번이나 봤다. 심지어 손을 뻗으면 잡힐 거라 착각할 정도의 거리에 생긴 선명하고 큰 무지개도 여럿 봤다. 일곱 빛깔 무지개를 벗 삼아 걷는 길을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옷이 젖고 신발에 물이 차는 게 무엇이 중요할까?  시간이 지나면 마를 옷과 신발보다 찰나의 순간만 허락된 무지개가 더 소중했고, 비를 비롯하여 변덕스러운 날씨에 감사했다.



또한 비는 새로운 장소, 새로운 대화로 이끈다. 우비가 버틸 수 없을 만큼 강한 비가 올 때엔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카미노 피니스테레의 두 번째 날, 갑자기 내린 소나기도 피하고 아침도 먹을 겸 들어간 카페 주인아주머니에게서 오랜 내공이 느껴졌다. 무심한 듯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주문을 받고 산티아고 케이크, 견과류 파이와 카페 콘 레체(Cafe con leach, 우유가 들어간 커피)를 주셨다. 달달하고 폭신한 빵과 함께 우유가 들어간 따뜻한 커피를 마시니 이제야 카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벽에는 각종 술병들이 전시되어있고 중앙에는 옅은 모래색에 세계지도가 그려진 시계가 있었다. 큼지막한 시계는 아주머니만큼 오랜 세월이 느껴졌다.


당을 충전하고 기분이 급격히 좋아졌다. 계산을 하며 아주머니께 말을 걸었다. 시계를 가리키며 ‘Bonita!(예뻐요!)’반복하자 처음에는 이해를 못하시던 아주머니는 ‘El mundo?’라고 대답하셨다. 스페인어로 세계라는 뜻의 단어인데 시계에 그려진 세계지도를 가리킨다고 오해하신 모양이다. 반대로 난 ‘El mundo’ 시계라고 오해해서 ‘El mundo bonito!(세계 예뻐요!)’라고 말했다. 틀린 와중에 무슨 자신감인지 스페인어 명사의 성별을 지키느라 뒤에 붙는 동사 형태도 바꿨다. 뜬금없이 세계가 예쁘다는 엉뚱한 순례자의 말에 아주머니도 카페에 있던 다른 순례자도 모두 웃음이 터졌다. 'El mundo bonito.'는 잊지 못할 스페인어가 되었다. 이상하게 몸으로 경험하고 상황으로 기억한 단어는 책을 보고 머리로 외울 때보다 훨씬 오래 남는다.


비가 오는 상황에도 연신 '감사하다', '즐겁다'라고  외칠 수 있던 이유는 순례길에서 보낸 시간이 차곡차곡 쌓였기 때문이다. 순례자가 되면 일상에서 당연히 누리던 것이 소중해진다. 하루 종일 땀 흘려 걸은 찝찝한 상태에서 따뜻한 물로 상쾌하게 씻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 따사로운 햇살에 바삭바삭해질 때까지 빨래를 말릴 수 있고 내일 뽀송한 옷을 입을 생각에 설렌다. 매일 잘 곳을 구해야 할 처지에 일단 오늘 밤은 내 몸 하나 누울 공간, 매트리스 하나를 찾았음에 마음이 놓인다.


나이, 성별이나 어디서 왔는지에 상관없이 말 섞는 이들과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친구와의 대화에서 좋은 사람을 만났으며, 긍정적인 영향을 받을 때 나누는 말 한마디가 한없이 즐겁다. 마지막으로 다치지 않고 아프지 않고 큰 사고 없이 무탈하게 걸은 튼튼한 두 다리와 자신에게 가장 많이 고마웠다.  



순례길을 처음 걸을 당시의 ‘고마움’이 단순히 느낌에 불과했다면, 느낌이 쌓여서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는’ 습관이 된다. 주어진 상황은 바꿀 수 없어도 너무 작아 보이지 않는 소중함을 찾고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매사에 감사한 마음이 순례길에 한정된 습관으로 끝날 수 있다. 순례길과 다르게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루에 7번의 무지개를 눈으로 볼 수 있게 하거나 처음 만난 사람을 믿고 대화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오히려 가혹한 비를 내리고 매서운 바람을 맞게 한다.


그러나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는 습관은 ‘El mundo Bonito.’이다. 머리로 하는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만, 몸으로 기억한 감사함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언젠가 일상의 순간에서 무지개처럼 나타날 것이다.

피니스테레가 어디인지 궁금하다면▼

빵순이 순례자의 빵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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