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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de in x May 03. 2019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도 저는 행복할까요?

[에세이] 산티아고 순례길 피니스테레길 (3) : 어디서든 행복할 사람

순례길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처음 걷기 시작할 땐 아침에도 더워서 고생했는데 끝날 때가 되자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이른 아침부터 피부에 닿는 차가운 공기가 산뜻하게 느껴졌다. 비가 만든 웅덩이에 비친 구름도 그날따라 더 아름다웠다. 해를 품어 붉은빛을 띠는 구름과 아직 자리를 떠나지 못한 달까지 하나의 하늘에 담겼다. 행복으로 가득한 아침이었다.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으며 기분이 이상했다. 드디어 행복해지는 법을 알게 된 걸까? 아님 한국에서는 행복해지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까? 한국에 돌아가도 행복할 수 있을까? 지금처럼 밝게 웃을 수 있을까?


피니스테레와 묵시아 갈림길

순례길을 걷는 동안 가장 크게 바뀐 점은 얼굴 표정이다. 웃음이 많아졌다. 때때로 걸으면서 욱하기도 하고, 괜한 심술이 난 순간도 있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더 이상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았고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미소와 인사를 건네는 일이 자연스러웠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얼굴의 작은 근육까지 모조리 사용한 순도 100%의 즐거움을 담아 웃었다. 꾸며내지 않아도 저절로 나왔다. 순례길이 행복하지 않았다면 절대 지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옛말은 틀린 게 없다. 웃는 사람에겐 복이 찾아온다. 순례길의 마지막엔 좋은 일이 연달아 생겼다. 출발 전 아침식사로 초콜릿이 든 빵과 커피를 먹고 있었다. 갑자기 다른 순례자들이 앉아있던 테라스 자리가 소란스러웠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그들에게 가보니 하늘에서 우박이 내리고 있었다. 별안간 내린 우박의 기세는 금세 꺾었으나 날씨는 꾸준히 변화무쌍했다.



카미노 피니스테레(Camino finisterre)는 ‘피니스테레’라는 마을에서 끝나지 않는다. 마을에서 2Km를 더 걸어 카보 피니스테레(Cabo finisterre)라고 불리는 등대가 최종 도착지이다. 마을에 짐을 두고 가기 위해 숙소를 먼저 정했다. 순식간에 바뀌는 날씨 때문에 마냥 기다리다가는 오늘 안에 숙소를 나가지 못할 것 같아 일단 등대로 향했다. 올라가는 길엔 비가 조금씩 우수수 떨어졌지만  카보 피니스테레에 도착하자 거짓말처럼 비가 그치고 해가 떴다. 우스꽝스러운 비닐 우비를 벗은 채 사진을 찍을 수 있었고 찬란한 무지개가 순례길의 종착지에 떠올랐다.



곁엔 전날 같은 숙소에서 머물렀던 스페인 순례자 아주머니 두 분이 계셨다. 우박이 내리던 카페에서 함께 시작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두 분과 짐을 두고 카보 피스테라 가는 길에서 다시 만났다. 약속하지 않아도 계속 만나는 인연이 신기했다. 두 순례자가 열성적으로 사진을 찍어준 덕분에 뜻하지 않게 피니스테레의 모든 조형물, 모든 방향으로 기념사진을 남겼다. 마지막을 함께 축하하고 축하해줄 수 있는 친구의 존재만으로 행복해진다.

카보 피니스테레 구경을 마치자 다시 먹구름이 몰려왔다. 숙소에 도착한 후 비는 더 거세졌다. 마침 일요일이라 대부분의 가게는 문을 닫았다. 너덜너덜해진 비닐 우비를 쓰고 비 속으로 들어가 문이 열린 음식점을 찾기가 고생스러워 보였다. 어쩔 수 없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서 한국인 순례자분들이 싸주신 삶은 밤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주방으로 호주인 순례자 부부가 들어왔다. 미리 사놓은 비스킷, 치즈, 과일로 간단한 저녁식사를 하려던 그들이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나는 널 기억해. 포르투(Proto) 근처 숙소에서 네가 엘리자베스가 있는 방으로 옮겨줬잖아. 엘리자베스 기억나니?”


순례길 13일 차 그리호(Grijo)의 알베르게는 작은 방에 2층 침대가 하나씩 있는 구조였다. 제일 먼저 도착해 2층 침대의 아래 부분에 짐을 풀고 쉬는 중에 호주인 부부가 왔다. 그새 숙소에 순례자들이 들어와 그들은 각각 다른 방에 나눠서 자야 했다. 아직 위층에 자리가 차지 않은 내가 엘리자베스라는 순례자가 있는 방으로 이동했고 두 사람이 같은 방에 묵을 수 있었다. 다시 만난 그들은 자신들은 늦은 점심을 과하게 먹었다며 챙겨 온 음식을 나눠주었다. 덕분에 배고프지 않은 밤을 보냈다. 대수롭지 않게 잊고 있던 과거를 그들은 기억했고 행운으로 되돌아왔다.


피니스테레길 증명서
순례길이 끝난 피니스테레에서 버린 신발
버스에서 본 피니스테레

다음 날 버스를 타고 피니스테레를 벗어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돌아왔다. 다음날 공항에 가야 했기 때문에 버스터미널과 최대한 가까운 호스텔로 미리 예약했다. 호스텔의 시설은 다른 알베르게와 비슷한 수준으로 입구를 찾기가 까다롭고 오래된 건물의 단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순례길을 떠나는 마지막 밤, 최고의 선택이었다. 호스텔 주인인 호세는 입구를 못 찾는 손님들을 생각해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순례자들은 친절하고 따뜻하게 챙겨줬다. 순례자들이 언제든 주스나 간식을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두었다. 또한 방에서 다른 순례자들과 이야기를 나눌 땐 노크를 하고 들어와 초콜릿을 챙겨줬다. 호스텔 내부도 아기자기한 분위기로 순례자들이 친해질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그날 저녁도 순례자들과 서로의 식사와 대화를 나누며 파티 같은 시간을 보냈다.


이탈리아 순례자가 만들어준 파스타


짧게는 두 시간 남짓, 길게는 반나절 정도로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연이어 좋은 사람들만 만나 마지막 추억을 남길 수 있어서 행복했다. 마음이 잘 맞는 사람을 만나는 일만큼 커다란 행운도 없다. 그들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만큼 그들에게 행복을 선사해준 순례자로 기억되길 소망한다. 30일가량의 순례길을 마치고 웃는 얼굴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떠났다.



본디 걱정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 마련이다. 작았던 걱정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감당할 수 없이 큰 벽으로 느껴진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다시금 깨닫게 했다. 걱정은 잠시 스쳐가는 생각이며, 앞 일에 대한 걱정이 쓸데없음을. 미래의 나에게 했던 질문도 해결되었다.


어디서든 난 충분히 행복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밝은 미소와 인사를 건넬 줄 안다. 그리고 그런 시간과 웃음이 나에게 다시 행복으로 되돌아올 것이라 확신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결말은 통쾌한 권선징악 드라마도, 인생역전 동화도 아니었다. 마무리까지 행복했던 내 인생의 프리퀄이었다.

제이드의 피니스테레 시작이 궁금하다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호스텔에서 만난 수잔과의 에피소드를 원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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