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이었다 정상에 도착했다

[소설] 달을 타는 아이 : 마지막

by Jade in x

오늘도 어김없이 아빠가 처음 보는 모양의 치킨이나 피자나 라면을 사들고 왔다면, 하교 후 집으로 가기도 전에 아빠가 전화해 ‘어디야, 오늘 어디 음식점 새로 생겨서 라이브 방송 찍어야 하니까 어디 가지 말고 집으로 곧장 와’라고 말했다면. 하물며 아무 말이 없더라도 오늘도 어김없이 방송을 찍어야 하려니 싶은 마음에 컴퓨터만 보는 아빠에게 “오늘은 뭐 먹어?”라고 물어볼 수만 있더라면 먹짱은 피터가 시키는대로 오늘 밤 뒷산으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아빠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밤 10시가 다 되어 기다리다 못 참아 전화를 건 먹짱은 거나하게 술에 취해 한껏 소리를 질러대는 아빠의 욕을 들어야 했다.


뭐랬더라. 니 엄마 닮아서 돼지 같이 잘 먹는 것도 닮더니, 안 들어온다고 잔소리하는 것까지 닮았냐고 했었나?

어쨌든 아빠가 오늘 들어오지 않는 건 분명했다. 전화를 끊고 본 시간이 9시 58분. 나가, 말아? 이미 집을 나오고서도 고민했다. 가, 말아? 이미 뒷산에 도착해놓고도 고민했다. 있어, 말아? 그때 시간이 10시 20분쯤이길래 어차피 가도 피터는 없으려니 싶었다. 없었으면 했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놀란 점은 피터가 자신을 그때까지도 기다렸단 점이고, 늦은 자신에게 화는커녕 짜증조차 내지 않았단 점이었다. 아빠는 화내지 않고 말한 적이 없었고, 구독자들은 자신의 영상이나 방송이 조금이라도 늦는가 싶으면 그새를 못 참고 악플을 달았고, 친구들은 웃다가도 이유 모를 실수를 하면 째려보며 손가락질했다. 그런 사람들 틈에서 평생 십여 년을 살았던 먹짱이기에 피터가 신기했다.


“난 너 10시 30분에야 올 줄 알았어.”

“내가 늦을 줄 알았어?”

“아니? 안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럼 왜 기다렸냐?”

“30분만 기다리려고 했어. 딱 30분.”

“약속 시간이 10신데 안 오면 그냥 안 기다리면 되지, 왜 기다렸냔 말이야.”

“야. 사람이 늦을 수도 있고 그걸 기다릴 수도 있지, 참나.”


먹짱은 생각했다. 얘는 무슨 말을 이렇게 아저씨 같이 할까? 그리고 30분 전에라도 와서 다행이라는 생각. 먹짱이 살풋 웃는 모습에 피터가 손을 팔락이며 말했다. “가자.” 피터가 먼저 산속으로 들어가자 먹짱이 따라 들어섰다.


“우리 그래서 어디 가는 건데?”

조금 뒤, 먹짱이 묻자 피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심하게 답했다.

“정상. 다이어트하고 싶다며.”

“뭐? 정상까지 어떻게 가? 땀 좀 나면 다시 내려가자, 응?”

“내가 다이어트 왜 하는지도 궁금하다며. 정상에 가야 말해줄 수 있어.”

“그냥 지금 말해주면 되잖아.”

“말해줘도 모른다니까. 봐야 알아. 그러니까 가야 돼. 얼마 안 걸려.”


얼마 안 걸리긴 무슨. 솔직히 지금도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슬슬 코로만 숨을 쉴 수가 없어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있는데, 산속으로 들어온지 10분 밖에 안 됐는데도 이렇게 힘든데 아마 10분 더 올라가면 숨막혀 죽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먹짱은 고개를 푹 숙이고 걸음을 옮겼다. 자신과는 달리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피터를 보며 오기가 생겼다. 그리고 이를 바득바득 갈며 속으로 읊조렸다.


기껏 정상까지 올랐는데 피터 놈이 쓰잘데기 없는 걸 보여준다면 가만두지 않겠노라고.



아마 피터 혼자였다면 정상에 오르고도 남을 시간이 흘렀을 때, 피터와 먹짱은 겨우 산의 중심에 오를 뿐이었다. 먹짱의 옷은 작정하고 수영한 사람처럼 흠뻑 젖어있었고, 그에 반해 피터는 평소에 절반뿐인 힘을 쏟아 유난히 뽀송뽀송했다. 저러다 죽는 거 아닌가 싶은 마음에 피터는 눈치를 보다 털썩 주저앉았다.


“아, 힘들어. 조금만 쉬었다 가자.”


피터가 제 멱살을 잡고 한껏 펄럭이기까지 하니 이때다 싶은 먹짱이 피터의 옆에 퍽 누워버렸다. 쌓기만 했던 숨이 먹짱에게서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그 때문인지 주위의 나뭇잎이 파르락 휘날렸다.


“야, 이씨. 이거 살이 안 빠질 수가 없어. 벌써 한 십 키로는 빠진 것 같아.”

“그러고보니 얼굴살이 조금 빠진 것 같기도 하다?”


피터의 말에 먹짱이 씨익 웃었다. 먹짱의 웃음에 피터도 웃었다. 밤바람이 선선하게 불어 신선한 숲내음이 두 사람을 휘돌았다.


모두가 잠든 시간, 나무조차 잠시 눈을 감은 듯한 고요한 새벽. 이 새벽에 늘 혼자였던 피터는 가만히 자신의 곁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먹짱을 신기하게 내려봤다.


“넌 이 밤에 나오는데 엄마아빠가 뭐라고 안 하셔?”


피터가 물었다.


“나 엄마 없어. 아빠는 친구들이랑 술 마시고 있고. 집에 아무도 없어서 그냥 나왔어.”

“집에 아무도 없어? 동생도 없어?”

“응. 나 혼잔데?”

“우와. 부럽다.”


보통 이쯤되면 엄마가 왜 없냐고 묻곤 하는데, 피터에겐 그보다 동생이 없다는 게 더 중요한 모양이었다. 먹짱이 뻐근한 허리를 세워 앉으며 말했다.


“너 동생 있잖아. 팅커벨이었나? 이쁜 여동생 있으면 안 심심하고 좋지 않아?”

“동생이 너무 이뻐서 엄마랑 아빠가 동생만 봐. 내가 동생 근처에만 가면 내 손에 세균 많으니까 손 씻고 만지라고 하고. 옛날에 동생이랑 TV 보면서 놀고 있는데, 난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동생이 우는 거야. 배고프다고 울었겠지. 난 정말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엄마 아빠는 내 말도 안 듣고 내가 동생 울렸다고 다시는 동생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래. 다 동생만 이쁘다고 하고. 이럴 거면 날 왜 낳았는지 모르겠어.”


먹짱은 가만히 피터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이것봐. 아들이 맨날 밤마다 집 나와서 이러고 있는데 한 번도 들킨 적 없어. 아침에 집에 가면 동생 껴안고 잠만 자고 있고. 동생이 뭐만 하면 사진 찍고, 동영상 찍고, 좋은 말 다 하면서 나한테는 관심도 없어. 학교에 가도 애들은 동생 이쁘단 얘기만 하고. 내가 산에서 평생 내려가지 않아도 사람들은 아무도 모를 거야.”


피터는 울지 않았다. 피터는 이런 얘기를 누구에게도 하지 않아 먹짱에게 처음으로 해봤지만 감정이 울컥하다기 보단 속이 후련했다. 누구에게라도 해보고 싶은 말이었다.


어쩌면 평생 산에서 살지 않아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불현듯 먹짱이 벌떡 일어났다. 깜짝 놀란 피터가 먹짱을 올려다봤다. 먹짱이 그런 피터를 내려다보며 손을 뻗었다.


“가자. 정상은 찍어야지.”


왠지 굉장한 것이 정상에 있을 것만 같았다. 뼈밖에 없는 몸을 더 깎아내어 피터가 닿고자 하는 이 산의 정상에 대체 무엇이 있는지 먹짱은 꼭 보고 싶었다. 그리고 정상에 오른다면 말해주고 싶었다. 피터가 말해준 속사정만큼 자신의 것도 말해주고 싶었다. 피터에게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와 아빠의 이야기, 먹어야 하는 자신의 이야기. 그리고 피터와 마찬가지로 혼자이고 싶지만 외롭기는 싫은 속마음을.


피터는 그 온 마음을 먹짱이 내민 손에서 읽을 수 있었다. 전부 다는 몰라도, 적어도 먹짱도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고민을 안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두 사람은 꿋꿋이 어둠을 뚫고 산을 올랐다. 피터는 이 칠흑의 산이 더는 외롭지 않았고, 먹짱은 처음 접하는 팔흑의 산이 무섭지 않았다. 숨이 가쁠수록 머리 위로 찬바람이 스멀스멀 피어내리기 시작했다. 내내 땅만 바라보던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들렸다. 정상이었다. 정상에 도착했다.


먹짱은 처음 보는 광경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처음 보는 탁 트인 밤하늘과 그 하늘에 잔뜩 박힌 별, 어제보단 선명치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크고 밝기만 한 초승달. 이 모든 것이 두 사람만을 위해 준비된 영화 속 장면인 것만 같아 신이 난 먹짱이 꺄르르 웃으며 방방 뛰어다녔다.


“야. 너 여기 때문에 맨날 산 타는 거였어? 와, 다이어트 할만 하네.”

“아닌데? 산 타려고 다이어트 하는 게 아니라, 나는 달을 타려고 하는 거야.”


피터의 모든 말을 이해하지 못한 먹짱이 요상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마저도 피터에겐 웃기만 했다.


“잘 봐라. 이제 내가 뭐하는지.”


피터가 어깨를 펴고 슬슬 몸을 풀었다. 먹짱은 그 모습을 하나라도 놓칠까봐 눈을 부릅 떴다. 피터가 정상에서 가장 큰 바위에 올라섰다. “야, 위험해!” 먹짱이 걱정스레 피터의 몸을 잡았지만 피터는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피터가 손을 번쩍 들어 초승달의 다리를 붙잡자 먹짱이 소리를 빽 질러버렸다. 먹짱의 소리가 동네산을 타고 온 동네를 향해 뻗어나갔다.


여느 때처럼 피터는 초승달에 앉았을 뿐이었다. 어제도 했고, 그 전에도, 그 전달, 그 전년에도 했던 일이었다.

피터에겐 늘 똑같은 일상이었지만, 먹짱은 턱이 땅에 닿을 정도로 경악할 일이었다.

피터가 초승달에 앉아 먹짱을 내려다보았다.


“죽이지? 쩔지?”


피터의 말에 먹짱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피터가 달의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그러자 달이 피터의 몸무게를 못이겨 기울어졌다. 깜짝 놀란 먹짱이 피터가 떨어지는 줄 알고 피터의 다리를 부여잡았다. 피터는 익숙하게 바위 위에 도로 앉았다.


“위험하잖아!” 화를 내는 먹짱의 머리를 피터가 잠시 쓰다듬으며 말했다.

“몸이 무거워지면 달이 기울어서 떨어져. 여기서는 몰라도 하늘 가운데서 달이 지고 있을 때 떨어지면 죽을 수도 있어. 그래서 다이어트 하려는 거야. 떨어지면 안 되니까.”

먹짱이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우리 둘 다 다이어트 성공하면 같이 타보자.”


이날 피터와 먹짱은 해가 뜰 때까지 정상 위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가 모르는 서로의 이야기를 잔뜩 나누고, 함께 하고 싶어진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하늘이 차츰 밝아오고, 땀으로 젖었던 옷이 마를 새도 없이 아침 이슬로 젖어가자, 그제서야 일어서 함께 산을 내려갔다.

각자의 집으로 흩어지기 전, 피터가 말했다.


“그나저나 나 궁금한 거 있어.”

“뭔데?”

“너 이름이 뭐야?”


그러고보니 피터나 먹짱이나, ‘피터’나 ‘먹짱’이 아닌 진짜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두 사람은 그저 웃겼다.


그 웃음은 두 사람 모두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처음 가져보는 사람이었고, 처음 만나보는 관계였다. 이것이 우정이자 친구라고 불리는 것을 먹짱도, 피터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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