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야 할 것들을 '그리움'이라 부르게 되는 것
나는 이민병에 걸렸던 사람이 맞다.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난 뉴질랜드로 6개월짜리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조용한 도시 해밀턴에서 여러나라에서 온 학생들과 섞여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학생이었기에 차도 없었고 그때는 핸드폰이라는 것이 없었는데도 불편한지 몰랐다.
단순히 학교에 있는 로컬폰만 사용했고, 어딘가를 가려고 하면 종이지도를 먼저 찾아본 후 사람들에게 수소문해서 길을 알아냈다. 그 길들을 메모하고 기억해서 다녔다. 조금씩 지리에 익숙해 지자, 수업이 없는 날에는 밖에 나와 그 나라 문화와 사람들을 접하려고 여기저기 잘도 헤집고 다녔다.
그렇게 아름답지만 무료하고 조용한 뉴질랜드의 짧은 삶이
내 남은 인생을 뿌리채 흔들리게 만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돌아온 순간부터 나는 다시 나갈 궁리만 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결혼을 했는데 남편도 뉴질랜드 학교에서 만났던 사람이어서 였는지 우리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이유없이 무조건 나가야 된다고만 생각했다.
앞으로의 더 나은 인생을 위해서.
수 많은 기회와 좌절을 겪으면서 이 나라 저 나라를 찔러보기를 15년째 해 왔었다.
그러다 기회가 온 것이다.
우리는 드디어 외지인 캐나다에 왔고 그리고 벌써 6년차가 되었다.
넉넉하진 않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자리를 내린것 같다. 아니 그렇게 믿는 것이 마음에 편했다.
아무리 치솟던 주택가격이 내리고 있다지만 아직도 우리가 감당하기엔 턱없이 높았고, 날로 오르는 물가는 피부를 와 닿다 못해 뚫을 지경이었다. 매달 급여명세서를 보면 놀라운 세금때문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래도 영주권이 생겼으니 거주의 자유는 보장받은 것이라며 다행이라고 다독여본다.
그러나 정말 좋으냐고 묻고 싶다.
나는 가족들보다 4달을 먼저와서 학교를 다니면서 취직을 했었다. 하루라도 빨리 워크퍼밋 비자를 받아서 가족들에게 안전한 비자를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아무에도 말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는데, 어쩌면 매몰비용(한국정리, 캐나다학비, 홈스테이 등등의 비용 및 시간)이 발생하더라도 다시 돌아가는 것이 정답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그때 나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높은 세금과 생활비에 비해 내 급여는 정직하게 내가 일하는 만큼-시간제로 급여를 받으니 주말은 그냥 무급-만 받으니 사실 감당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나에게 이런 체면을 걸 수 밖에.
"더 어린 나이에 뉴질랜드도 겪어봤는데, 직장도 있는 내가 그리고 우리 부부가 조금만 시간을 투자하고 믿어본담면 반드시 해 낼 수 있을거야. 그러니 불도저처럼 무작정 밀어부쳐 보는 수 밖에"
그런데 현실은 한 겨울의 칼바람 보다 더 매서웠다.
나는 매일 샤워를 할 때 바디워시를 사용하지 않고 비누(Bar)를 때밀리 타올에 묻혀 씻는다.
좋은 제품을 사용하기에 비누로 해도 특별히 건조한 느낌이 나지 않아서 계속 사용하는 것도 있지만, 사실 때밀이 타올로 몸을 구석구석 닦으면 혈액순환도 되고 뭔가 거품용 퍼프보다 각질제거가 되는 느낌이라 지금까지 잘 사용하고 있다.
현재 사용하고 때밀이 타올은 내 캐나다 삶의 시간과 일치한다.
6년차에 접어든 이 녀석들은 이제 손을 넣으면 받쳐줄 막힌 부분이 없다. 중간 중간 해진 부분이 많아서 꿰멜 수도 없다. 방법은 다른 녀석들로 교환하는 것 밖에는 없는데 내 마음이 허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나오기 전 엄마와 함께 목욕탕에 갔다.
한국에 있을 때에도 부모님과 나는 서로 다른 지방에서 생활했기에 자주 볼 수는 없었다.
자주라고 해봤자 4-5 개월에 한 번 정도. 그러니까 1년에 3-4번이 고작이었으니 엄마와 함께 목욕탕을 간다는 것은 짧은 만남의 시간에 그렇게 긴 시간을 할애하는 행위는 도전 중에 도전이었다.
그러니 한국에서의 마지막 일주일을 엄마와 보낼때 정도 되어야 목욕탕이라는 곳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거기서 때밀이 타올을 샀다. 엄마는 마트에서 사면 더 싼데 왜 여기서 사냐고 핀잔을 주셨지만, 나는 목욕탕에서 파는 때밀이가 훨씬 강하다(거칠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일부러 구입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나는 각질제거에 진심이 편이라서.. 이런 재미난 옥신각신을 보았나..
마음이 속상하고 감당하기 힘든 일을 당할때면 이 핑크색 때밀이 타올을 보면서 엄마를 떠올리곤 했다.
집 안 형편이 좋지 않아서 우리 남매들은 왠만한 일들은 자기 스스로 해결해 나가야만 했지만, 더 해주지 못해 미안해 하는 엄마는 또 자식에게 채워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라는 게 있어서 그런지 눈물 마를날이 없으셨다. 나 역시 그런 엄마에게 그렇다할 효도한번 여행한번 못가본 것이 마음에 걸린다.
내 때밀이 타올은 그런 엄마를 그려준다.
내 때밀이 타올은 내가 사랑하는 내 모국을 대표한다.
내 때밀이 타올은 그때의 어리석은 내가 이제야 비로소 깨달은 수 많은 그리움들을 떠올리게 해 주는 중요한 매개체이다.
그래서 내 때밀이 타올은 오늘도 하루를 연명한다.
여기도 사실 한국마트가 있어서 때밀이 타올을 다시 사면 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내 타올은 버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내 타올은 나의 따뜻한 추억이자 그리움이다.
맞다. 나는 한국이 너무도 그립다.
먹고 싶은 음식도 때문도 아니고 사고 싶은 물건이 많아서도 아니다.
멋지고 편한 생활환경 때문이 아니라 그냥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그립다.
보고싶다.
대한민국은 내 해진 때밀이 타올처럼 결코 밀어내려 해도 밀어내지지 않는 따뜻함이다.
누군가 이국땅에 살면 다 외국자가 된다고 했던가.
그말이 사실이다.
헬조선이라는 오명을 쓰면서도 인자하게 웃고있는 헤븐의 나라, 대한민국.
분명 누군가는 또 말할 것이다. 배부른 소리 한다고. 기회의 땅을 밟았다면 그 땅을 넓히라고.
그런데 그대는 아는가,
내 걸음을 지탱하는 것은 결코 다리가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