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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태훈 Apr 13. 2020

도덕감정과 자본주의

내면의 모험가가 되면 세계는 모험의 장이 된다. 관점을 돌려라

 오래된 이야기 '다 의미가 없어요!'

 인생이 잘 안 풀릴 때는 인생에 의미가 무엇이 있나 그런 질문을 할 때가 있다. 이 질문과 오래 씨름을 하다 보면 보면 한국인이든 미국인이든 잘 나가는 사람이든 못 나가는 사람이든 삶에는 궁극적인 의미도 영원도 없다는 결과에 도달한다. 종교와 같은 논리적 비약을 전제해버리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 버리지 않는 이상 말이다. 어떤 이들은 이 사실을 모른 척하면서 살고 어떤 이들은 이것을 핑계로 삶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을 근거로 사용한다. 붓다는 이를 일찍 깨닫고 그것 위에서 철학하는 법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었다. 그렇다. 아 살아간다는 건 쓸쓸한 싸움이다. 


 신앙의 영역으로 점프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스타일은 제 각각이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쾌락을 최고의 가치로 삼으며 살거나, 죽지 못해 살거나, 그저 주어진 역할에만 몰두해서 세상만사로부터 거리를 두고 살거나, 현실세계를 지배하는 힘 또는 논리를 부단히 파악해서 그 안에서 자신의 포지션을 찾거나. 이런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자신의 내면에서 답을 찾는 사람들도 있다. 자신의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것으로 만족을 얻는 사람들, 자신의 마음을 사람들에게 이해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우린 이런 삶의 방식 중에 한 가지 또는 몇 가지를 선택해서 살아간다. 정답이 있는 게 아니니까,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고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해선 무관심하게 살아간다. 나의 경우는 어릴 때부터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해한 세계`와 `현실을 지배하는 힘` 두 가지 사이에서 많이 방황했다. 분명 나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세계가 좋고 옳아 보였지만 세상은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 무언가 이미 답이 정해져 있었고 나는 그걸 거부하는 것 같았다. 학벌이 아무리 나쁘고 뭐라 해도 사람들은 학벌을 원했고 돈이 아무리 뭐라 해도 사람들은 돈을 원했다. 내가 이해하는 세상이 옳은 것이냐, 세상을 지배하는 논리가 옳은 것이냐. 만약 옳은 것이 없다면 우리는 파편화된 믿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무엇을 위해 살아갈 수 있을까. 그 충돌은 내 마음속에서 아주 오랫동안 느긋하고 격렬하게 구워져 이제는 화석이 되었다.


나의 관점으로 본 세계, 진화의 관점으로 본 세계

 나를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본다는 건 뭘까. 개인의 가능성에 집중하고 자연의 섭리를 추종하며 살기보다는 그것을 초월하고자 하고 또 인간 특유의 내재된 가치 즉 인간성을 믿는 삶라고 나는 정의한다. 이 길에서 인간의 가치는 자연이라는 조류에 반기를 들고 이상을 향해 진보하는 데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조류에 반대하는 것은 바로 우주를 향한 공감능력과 도덕에 대한 감상에  많은 가치를 부여함을 의미한다. 이건 이 세상이 완벽하다는 걸 전제로 하지 않는다. 더럽다는 것도 알고 있다. 세상이 아름다워서 그렇게 변하도록 되어있기에 대세에 따라 믿는 게 아니다. 그저 마음이 그렇게 쫒는 게 또 다른 자연의 섭리라고 믿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편 이런 우리의 아름다운 마음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다윈주의 / 시장주의로 대표되는 경쟁과 도태를 통한 생존, 조금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위계에 의한 기반한 이해관계에 대한 무한한 숭배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경쟁을 통해 개체의 생사가 결정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불균형은 사회 성장의 동력이다. 어떤 이는 그 잔인함에 대해 스스로 인정할 때 짜릿함 마저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을 순리라고 믿는 순간, 그럼 인간은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생긴다. 끝없이 경쟁을 추구하고 누군가를 낙오시키는 게 삶의 유일한 방법이라면 우리 안의 도덕 감정은 타인에 대한 공감의 욕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저 인간 삶의 지향점이 최순실이나 조직에서 능수능란하게 타인을 이용하는 마키아벨리적 인간이 되는 건 너무 슬프지 않은가.


도덕 감정이 주는 미래에 대한 비전

 도덕 감정은 고등 포유류들이 향유하는 특이한 시스템이다. 도덕 감정은 구성원을 평등하게 여기라고 명령하고 약자를 돕는다. 호혜주의는 감정이란 막대기로 마음을 두들겨 패면서 종족을 성장시킨다. 개미는 자신을 기꺼이 포기한다. 어떤 박쥐는 미래에 보답받을 것을 기대하며 먹이를 양보한다. 도덕 감정이 견인하는 호혜주의는 고통에 공감하게끔 하고 사회를 순수한 경쟁의 전장이 아니라 같이 사는 것을 목표로 하게끔 만든다. 무엇보다 이 도덕 감정은 집단의 경쟁력을 강화시킨다. 충성심, 공공질서를 준수하는 사람, 내적인 만족을 위해 기꺼이 봉사하는 사람, 손해 봐도 양심을 지키는데 안심하는 사람 모두가 사익보다 공익을 앞세우는 모습의 단편이다. 거의 모든 동물을 학살해가며 확장해온 인간에게 있어 진화 압은 외부보다 종내부의 집단 간에서 더 치열했다. 도덕 감정은 사회를 유지시키는 필수적인 덕목이다.


 자기 생존만이 아니라 공공의 선도 섬기라는 이 명령, 양심의 눈을 마음에 안고 살아간다. 그로 인해 비열함을 경멸하고 정직함을 칭찬하고 선행을 추켜세워준다. 공공에 대한 헌신을 기억한다. 그럼에도 기회가 있을 땐 타락하기도 하지만, 인간이 도덕적으로 고민하는 이유는 이러한 선대들의 역사, 성공 비결을 유전적으로 또는 문화적으로 잘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덕 감정이 잘 작동할 때는?

 현대의 지배적 이념은 자본주의다. 모든 게 돈으로 계산되고 돈이 많은 것이 여러 가지 싫은 것을 피하게 해주기도 하고 무언가 할 수 없다는 아쉬움도 피하게 해 준다. 도덕 감정은 실체가 동반한 현상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작동한다.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주인공을 생각해보자. 약자에 대한 폭력을 막는 도덕적 주인공이란 이미지를 상상해보자. 한 문장만 들어도 수많은 영화 장면이 떠오른다. 그 모습들이 설득력 있고 가슴 저리게 다가오지 않는가. 하지만 실체가 없는 아닌 돈의 지배는 문제가 어려워진다. 기껏해야 돈을 많이 버는 주식사기 영화가 떠오를 뿐 돈으로 누군가를 구제한 이야기는 매력이 없다. 많은 사회복지 관련 종사자들이 자신의 일에 가치를 부여하기 힘들어하는 이유에는 바로 자신의 일의 의미를 부여하기 힘든 것은 이 돈이란 매개체의 중립 적질 성질에 기반한다. 누군가를 구제할 여유가 있어서 세금을 내는 사람들은 그 세금이 어디서 쓰이는지 알 수도 없고 도움을 받는 사람도 그 세금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다. 모두가 세금을 내기를 싫어하지만 국가가 제공하는 혜택이 자신을 보호하기만을 바란다.


 국고라는 이름으로 돈을 모두 퉁치는 게 아니라 한 달에 한번 세금을 내는 사람과 도움을 받는 사람이 모여서 감사파티라도 하는 자리를 만든다면 어떨까. 바로 자원을 저장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생산성이 낮은 원시사회는 이렇게 돌아간다. 원시사회에서 부자는 자신의 부를 나누는데 충실함으로써 도움을 받는 사람은 존중을 받는다. 한국처럼 자신이 도움을 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또 한편으로는 도움을 주는 사람을 증오하지도 않는다 도움을 주는걸 억울하게 뺏긴다고 여기고 한편으로는 도움을 받는 사람을 멸시하지도 않는다. 원시사회에서 부자는 한국의 재벌처럼 을에 관계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종으로 부리는 것도 아니다. 조금이라도 타인을 비인격적으로 대한다면 무리에서 배제될 위험을 안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관계를 맺기 위한 방법에서 돈으로 무언가를 한다는 개념이 빠져있기 때문에 전인격적인 인간관계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보좌관은 월급을 받고 일을 하지만 고대 사회에서는 보좌관(또는 제자)은 그 사람의 은덕을 존중하고 그 비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일을 했었다. 이런 현대사회와 고대사회가 교차되어 부딪친 사례로는 로마시대의 기독교 사회를 들 수 있을 듯하다. 예를 들어 바올은 만난 적도 없고 죽은 사람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로마라는 현대 시스템에 대해 극렬히 저항하고 믿음을 통해 살아가는 방법을 서방에 퍼트린 사람이다. 비록 기독교의 여러 교파 중 위계를 강조하는 전통파가 득세하고 또 로마의 시스템과 결합해가며 때 기독교는 자신의 저항적 정신을 잃어버리고 한심한 시스템으로 타락하긴 했지만 말이다. 


도덕 감정이 잘 동작하지 못하는 현실

 바올의 이야기는 도덕 감정은 도시에서 자신의 위치를 잃었다는 사례로 볼 수 있다. 지구적 단위에서 벌어지는 경제 시스템 속에서 부의 재분배는 과연 가능한 것인가. 어디까지 이뤄져야 적당 한 것인가. 전 세계가 하나의 시장이 된 마당에 국내에 한정한 정치적인 결정은 얼마나 의미 있는가? 지속은 가능한 것인가? SNS에서의 도덕률은 어떻게 동작해야 하며, IT 기업들의 정보독점을 통해 주도되는 산업혁명의 과실은 누구의 것인가? 정부의 감시는 어디까지 허용될 것인가. 각자의 도덕 감정은 이런 감정들이 작동할 원칙을 세워나가기도 전에 돈과 익명이 주도하는 개혁의 폭풍 속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강력한 시장주의의 숭배자들은 도덕 감정을 배제해야 한다고 믿는다. 언더그라운드 도그마를 외치며, 무임승차에 대한 강력한 보복을 원한다. 이들은 사다리를 걷어차고 자신의 성취를 정당화하는데 에너지를 쏟는다. 그들에게는 도덕 감정에 에너지를 쓸만한 여유도 없거나 현대의 사회 시스템에서는 득 볼 게 없다고 판단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한편으론 이건 이 세계를 지배하는 논리에 이해하고 그대로 사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다. 원칙이 없는 이들은 이 논리를 편하게 사용한다. 사달 리에 오르기 전에는 사다리가 없다고 혐오하고 자신이 오르면 사라리를 걷어차고 싶어 하는 것이다. 시장주의는 이런 부조리를 찬성하는 구조에서 태어났다. 기업은 어째서 혁신하는가에 대해 프리드먼은 기업의 독점에 대한 기업의 열망에서 시장을 개혁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IT 플랫폼 사업자들은 경쟁자가 사라지기 전까지 온 세상에 자신의 것을 다 때어줄 것처럼 행동하다가 경쟁자가 다 사라지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이익 추구가 모든 게 정당하다고 믿는다. 이게 어떤 이념의 본질은 아닐 수도 있지만, 지금 세계를 지배하는 시장과 자본주의는 가열하게 도덕 감정을 배제한 사람들의 등을 밀어주고 도덕 감정을 되돌아보고 하는 이들을 조금씩 배제한다.


이건 계속할 수 없다.

 이런 현실에 대해 각자도생이란 말을 따라 각자 모두 알아서 잘 살면 좋겠지만 그 말로는 뻔한다. 도덕 감정이 멸종하고 공공선에 대한 믿음 없이 시장만 믿는 믿는 사회는 자비도 배려도 없다. 총기사고가 일어나도 자유가 중요한 것이고 다쳐도 의료비가 무서워 아픈 걸 참는 지경이 돼도 공공의료에 대한 반대하는 사람이 절반이 된다. 사회가 무너지면 개인은 없다. 지방 군벌 또는 마피아의 통치에는 품위도 문명도 없다. 오직 개인의 이해관계만이 복잡하게 얽혀있을 뿐이다. 현대의 남미의 폭력조직이나 로마가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이 엄격한 위계질서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만이 중요하므로 도덕감정의 명령은 귀찮은 짐이 된다. 그 삶은 언제나 누군가에 비해 하층에 있는 나 자신에 대한 불안감과 도덕 감정을 저버린 자신에 대한 죄책감으로 점철되어있다. 그래서 교회에 가서 풀던가, 내면에서 점점 무뎌지는 감정으로 인해 우울의 나락으로 빠지던가 현대인들은 그래서 우울하다.

 

대안의 시작

 따라서 도덕 감정을 존중한다는 말은 이 사회를 그냥 흘러가는 대로 자본주의가 인도하는 대로 효율이 이끄는 대로 사는 것을 거부하고 내면의 목소리를 쫒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공통적인 감정들도 있지만 그 양태는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다. 공장식 축산을 거부하고 어느 날 갑자기 채식주의자가 된 사람들, 사회주의자가 되기로 한 미국인들, LGBTQ 이론을 믿는 사람들, 경제이론의 허구적 가정에서 벗어나 실제로 일어나는 심리적 현상에 주목한 행동주의 경제학자들.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200년 넘게 믿어왔던 자본주의에 대한 맹신을 조금씩 흔들고 진짜로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은 무엇인가 우리의 마음이 신경 쓰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질문에 우리가 신경을 쓸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더 나은 삶에 대한 눈을 뜨게 된다. 이런 질문들은 삶은 엄격한 위계가 아니라 스펙트럼 속에서 사는 게 우리의 삶이라고 인정하게 만든다. 정치를 금권주의 엘리트의 전유물로만 놔두는 게 아니라 감시하고 참여하는 민주주의적 방향으로 흐르게 한다. 이런 각자가 믿는 이상적 가치에 대한 추구 행위는 우리의 삶이 그저 생존 기계인 것은 아닌가란 비극적 인식에서 우리를 구원시켜준다. 동물적인 현대사회의 알기 쉬운 자연스러움에서 벗어나 알기 어렵지만 뿌듯한 사회적 감각의 추구. 이것은 인간 삶을 긍정하게 만드는 에너지가 되어준다.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궁극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세계에서 동물적인 지배를 거부하고 문명적인 욕망을 긍정하는 것. 그 말과 믿음이 주는 심리적 에너지가 인간을 허무로부터 의미의 세계로 견인하는 것이다.


 단순히 반시장주의, 반자연주의가 이런 자기 이해를 중심으로 한 삶의 태도의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각자의 삶을 독특한 방식으로 이해함으로써 타인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독특한 것만이 의미를 가지는 건 아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이해받고 성취하는 것에서 에너지를 얻기도 한다. 남들이 뻔히 하는 것을 나도 하는 것은 의미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 내적인 추구는 시장이나 관료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외면받기 쉽기 때문에 우리 삶을 어렵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다. 이건 자신을 주장하는 일이다. 자신을 주장하지 않는다면 인간에게 남은 것은 대세가 무엇인지 확인하고 이익만을 추종하는 태도만 남는다. 이런 관점에서 자기를 주장하는 것과 현실에 적응하는 것은 극단에서 대립하고 있다.


현실을 쫒는 태도

 현실논리를 추종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환기해보자. 앞에서 나는 그것을 자기주장의 대립이라고 했는데, 현실논리를 추종하는 것은 자신을 배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요구되는 것이 자신이고, 사회적으로 대세인 것을 쫒는 게 좋다고 믿는 삶에는 무난하고 튀지 않음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게 있었지만 묵묵히 참아낸 노동자에게 주어지는 임금, 배제와 차별로부터 자유, 무난한 선택지로 인한 안정감. 그렇게 예측 가능한 삶을 가혹하게 말하면 노예의 삶이다. 스스로의 목소리를 포기한 삶이기 때문이다. 배부른 돼지가 행복하게 끝나면 다행이지만 사람은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주장을 하도록 태어난 동물이다. 안정과 교환한 자기주장의 배제는 장기적으로 앞에서 장황하게 설명한 인간다움으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를 낸다. 관료구조에서 적응하기를 선택한 사람의 성공과 끝을 김기춘이라는 사람으로 살펴보자. 돈은 많이 벌었으니 가족으로부터 존경받는 아버지였겠지만 그는 한국정치 시스템을 사적으로 영유한 최순실에게 협력한 결과였다. 동물적으로 볼 때 높은 사람에게 복종하여 권력을 극대화한 영리한 사람이었겠지만 도덕 감정에 기초한 자율적 조정을 목표로 하는 민주주의라는 인간적인 도전에는 훼방을 놓은 시대의 악인이 되고 말았다. 


 일반적인 조직에선 잘 나가는 사람 또는 자신의 미래를 결정해줄 사람에게 잘 보여야 한다. 이 시스템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가장 큰 의사결정을 할 사람이 이런 조직에 대한 큰 경계심을 갖고 있지 않는 한 시스템은 조직의 목표 위해 돌아가는 게 아니라 상사에게 잘 보이는 것을 목표로 돌아간다. 쉽고 안정적이며 예측 가능한 보수적인 선택지들이 보신 주의자의 카드 패에 쥐어져 있다. 어렵고 안정적이지 않으며 예측도 어려운 선택지들이 그 대립항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때 자기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괴롭다. 어떤 이들은 꾸준히 현실에 복종하는 삶을 선택하여 살아갈 수도 있고 그것에 만족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자신이 자신의 가치를 주장하면서 살아가고 싶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인생의 갈림길에서는 매번 자신의 가치 대신 적응과 안정을 선택하면서 살아가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선택하지 못한 내심 바랬던 그 길이 매 순간 생각나고 안정으로 점철되고 자신의 개인적 의미가 배제된 삶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지게 된다. 어느 순간 어려운 길을 선택하였던 사람들의 소식이 들릴 때마다 그때 선택하지 못했던 순간이 후회된다. 세상엔 순수한 의미의 안정이란 없다. 안정을 선택하면 그 사람에게는 문제를 해결할 기회를 받지 못한다. 문제를 해결할 기회가 없으니 성장도 없다. 안전한 길을 선택했다고 믿지만 심리적으로는 안전하지 못하다. 자신이 방어적인 길을 선택했다는 길을 알기에 불안하다. 그 불안감을 숨기기 위해 그 선택을 정당화할 논리들을 수집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추구한다는 것은 힘든 길이다. 누군가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매번 자신의 길에 대해 스스로 점검해야 한다. 운명을 찾아간다는 한다는 태도가 견지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영양가가 있으리란 보장도 없다. 인간이라면 싫어하는 불안을 회피하기보다는 즐겁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삶의 방식을 택하라는 이야기이며, 굳이 누가 가라고 한건 아닌데 마음이 시켜서 힘들게 가는 것 이게 자기를 추구한다는 숨은 뜻이다.


내면의 삶

 모두가 그런 방식으로 살아갈 필요는 없지만 성격적으로 그렇게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될 운명의 사람들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성격심리학적으로 따지면 개방성-신경성이 높고 외향성, 친화성이 낮은 사람들이 그 전형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인 사회적인 통념으로는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이기 힘든 면이 있다. 세상사를 있는 그대로 느끼기보단 주관적 느낌과 생각을 담아 이해하고 주관을 담아내야 하다 보니 반응이 느리다. 이런 독특함과 신중함이 잘 드러나면 좋겠지만 스스로도 드러내는 것을 어려워하는 측면도 있고, 조직을 움직일때는 그런 독특한 해석과 신중함은 부적절할 때가 많다. 때문에 이들은 조직 안에 부딪치거나 또는 자신의 목소리를 죽인다. 하지만 이런 선택들이 나중에 나쁜 결과로 돌아온다. 표현하지 못한 모든 내면의 생각과 감정들은 억눌려 있다가 마지막에는 폭발하기 때문이다. 폭발이라도 하면 주변 사람들이 피곤해하는 것으로 끝으로 날지도 모른다. 폭발시키도 않고 자기 스스로 그 상황으로부터 도망치는 선택을 한다면 영원히 끝나지 않는 도피의 생활이 시작되고 만다.


 나는 내면에 목소리가 많은 사람이다. 목소리를 표현해도 이해받지 못할 거란 두려움이 있고 그런 목소리들의 존재 자체를 모르게 하고 싶다는 마음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때문에 이 목소리들은 많은 경우 처치 곤란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내 목소리를 숨기되 나에게 주어진 일을 우직히 하면 그 문제를 숨길 수 있으리라, 언젠가는 내 우직한 일상으로 얻어 낼 수 있는 외부의 피드백이 그 처치 곤란한 목소리를 없애주리라 믿으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렇게 어떤 선망하는 마음이 외부의 긍정적인 피드백을 눌러주리란 기대는 이뤄지기 힘든 것 같다. 마음이 억눌러져 있거나 자신을 거부하는 사태에 빠지면 결국 외부로부터 어떤 말도 안 듣는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이 마음은 끝도 없이 억눌린 자신의 상태에 대한 합당한 근거들을 수집할 뿐이다.


 내 마음의 목소리와 씨름하는 건 까다롭다. 어렵다고 피할 수도 없고 매 순간 자기 안의 여러 가지 목소리들을 잘 중재해가며 목소리를 잘 선택하는 지혜를 갖춰나갈 필요가 있는것 같다. 그게 진짜 지혜인 것 같다.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없는척하고 사는 건 당장의 위협을 피할 순 있지만 자기를 해친다. 그리고 그들이 마음대로 날뛰게 해서도 안된다. 각자의 목소리들은 하나의 인격이다. 그 인격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스스로 잘 대화를 해가며, 어떤 상황에서 목소리를 허락할지 시기적절하게 활용하는 게 필요하다. 한편으론 저주 같지만 잘 쓰면 축복이다.


다른 길로 가는것 같아도 결국 만나는 길도 있다


대안을 향해 go

 때때론 대세를 추종하고 내면의 목소리에 관심도 없는 사람이 마음 편하게 사는 것 같아서 부럽기도 하고 일에 미쳐서 사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다. 떠들썩한 사회 모임에서 끝없는 자극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부럽기도 하다. 더욱이 자본주의는 그런 것을 권장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것을 부러워하기만 하고 자신의 스타일을 알지 못한 채 따라 하면 없던 문제도 생기게 된다. 병적이지 않다면 개인은 자신의 삶의 방식에 대해 전적인 신뢰를 가져야 한다. 자기 내면 인간성을 탐구하는 모험가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시장에서 미디어에서 팔리는 인간성을 숭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에 잘 팔리지 않는 자신을 너무나 쉽게 부정하곤 한다. 그런다고 자신이 바뀌는게 아니니 그러지 말아야 한다.


 이로 인해 생겨나는 반대급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장은 팔리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고 때문에 팔리지 않는 모든 것들에 대한 동경심도 커지고 있다. 그래서 그걸 소개하는 사람들도 시장에서 파이를 얻어가고 있다. 자신만의 이해를 추구하는 사람과 공감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시장이라는 안정된 질서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탐험가 같은 것이다. 내면의 세계가 깊은 사람은 우리가 끝이라고 믿었던 어떤 경계선을 넘나들며 외부에 소개할 어떤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이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자신을 부정하기보다 인생에서 자신이 자신에 대한 모험가임을 자각한다면 이 불안함과 이해받지 못한다는 고통을 좀 더 가볍고 재미있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글을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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