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6시 30분, 정신없이 아침 준비를 마치고 모두 잠든 집을 나선다.
매주 월요일 용인에서 구리 본사 출근을 위해 해가 뜨지 않은 어두운 하늘을 맞는다. 이 긴 출근 시간은 미국에 계시는 친정엄마의 안부를 묻는 여유를 만들어 주고 무뚝뚝한 나를 효녀로 만들어준다. 오늘도 나는 효녀가 되보겠다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바쁘신지 받지를 않으신다. 못 받는 이유가 있을 텐데 나도 모르게 아쉽고 엄마의 목소리가 그립다.
오전 10시 30분, 작은언니에게 ‘하늘색이 곱다’라는 문자와 함께 사진 한 장을 받았다. 타국에 사는 작은언니의 집 앞 풍경사진이다. 그 사진 속에는 야자수와 선인장이 들쑥날쑥 불규칙적으로 자라 있고 빨간색 물감을 찍은 붓에 물을 잔뜩 묻혀 하늘색 종이에 칠을 한 듯한 노을이 있었다. 언니의 사진을 보자마자 회사 주차장으로 나가 내 눈에 바로 보이는 하늘을 찍어 언니에게 답문자를 보냈다. 문득 나라는 다르지만 언니와 나는 같은 풍경 속에 있다는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많이 서툴지만 ‘그리움’을 표현해본다.
오후 2시, 다시 여름이 온 것 같이 해가 쨍하게 뜨겁다. 아니 덥다.
귀엔 에어 팟을 장착한 채 입은 계속 떠들고 손은 ‘타닥타닥’ 키보드를 치며 눈은 서류의 오타를 걸러낸다. 마치 활활 타오르는 오후의 태양처럼 나는 칼퇴근을 목표로 내 안에 에너지를 모조리 불태웠다. 드디어 ‘오늘의 할 일’의 마지막 줄에 ‘v’ 쓰며, 작성한 모든 문서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저장한 후 노트북 전원을 껐다. 책상 위 커피잔, 과자봉지를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먼길 떠나기 전 필수 코스 ‘화장실’까지 다녀오면 퇴근 준비 완료다. 이제 큰 소리로 ‘먼저 들어가겠습니다.’라는 기분 좋은 문장을 내뱉고 사무실 밖으로 나온다.
나는 업무 시간만큼은 이기적인 이성주의자가 된다. 내 일을 마치면 남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고 또한 나의 팀원에게도 계획한 일을 기간 내로 끝낸다면 조기퇴근을 하건 야근을 하건 나는 어떤 간섭하지 않는다.
오후 6시 25분, 퇴근길, 빨간 신호등에 멈춰 차창 밖 노을 바라본다.
붉은 기운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둠이 가라앉은 노을이다. 왠지 업무에 대한 긴장감이 사라진 조금은 지친 나와 닮은 것 같은 노을이다. 운전하는 동안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니, 일 할 때 이성적이었던 나는 지는 해처럼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겁 많고 걱정이 많아 힘든 일이 있을 때 무작정 엄마, 아빠 그리고 두 언니들에게 기대는 어리광쟁이 막내, 진짜 내 모습이 보였다.
새벽에 듣지 못한 엄마의 목소리가 다시 그리워지고 오전에 언니가 보내준 사진 속 나의 가족이 살고 있는 그 공간도 그리워진다. 낮 동안 붉은 태양 뒤에 숨어있다 어두운 하늘 틈 사이로 나타난 진짜 나는 이 그리움의 감정을 마치 가족을 잃어버린 미아의 두려운 감정으로 해석한다. 그 두려운 감정은 까맣게 어두워진 하늘처럼 아빠와 엄마가 내 눈에 영영 보이지 않는 깜깜한 세상으로 떠나가버릴 것 같은 불안감으로 번져버린다.
수명이 늘어 100세까지 살 수 있다지만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 언제가 죽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멀리 사시는 부모님에 대한 나의 불안감은 점점 커져간다.
그 불안감은 운전하는 내내 내 머릿속을 더 불안하게 헝클어놓는다.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한국에 모든 일을 던져버리고 미국으로 떠날 수 있을까?’
‘한국에 사는 내가 갑작스러운 슬픈 소식을 듣는다면 미국까지 어떻게 빨리 갈 수 있을까?’
‘내가 미국에 도착할 땐, 다 끝나버리진 않을까?’
‘다 사라져 버려 엄마, 아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면 어떡하지, 서로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면 어떡하지?’
‘엄마, 아빠 없이 나의 버팀목 없이, 나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왜 나만 여기에 두고 다 멀리 떠나가 버린 건가?’
‘그냥 다들 내가 있는 곳으로 올 수는 없는 건가?’
집에 거의 도착할 때까지 꼬리에 꼬리는 무는 불안은 계속됐다.
그러다 독서 클럽장 3기 수업시간에 읽었던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이라는 책이 생각났다. 작가는 먼저 불안의 원인 이야기하고 그 원인에 대한 해법을 제시했다. 작가가 이야기하는 다섯 가지 불안의 원인 중 나의 원인은 언제 부모가 죽을지 모른다는 ‘불확실성’,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또 언제 이상한 바이러스가 발생해 멀리 사는 가족을 못 만날 것 같다는 ‘불확실성’, 부모가 죽은 후 나의 삶에 대한 ‘불확실성’, 이런 ‘불확실성’이다. 책에서 나의 불안에 대한 원인은 찾았지만 작가가 제시한 다섯 가지 해법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안) 중 내게 맞는 방법은 없었다.
주차장에서 집으로 올라오는 엘리베이터의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보면서, 내가 가진 불확실성 한 불안의 시작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생각보다 단순하게 해결된다. 나의 불안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시작했으니, 이 그리움을 잘 해결하면 동시에 불안도 해결될 것 같았다. 그렇게 찾은 나의 불안에 대한 해법은 ‘있을 때 잘 하자!’이다. 떠난 뒤 후회 말고 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부모의 죽음에 대한 불안이 완전하게 사라지진 않겠지만 조금 줄어들 것이다..
이젠 가족을 잃을까 걱정하는 소심하고 내성적인 어리광쟁이 막내가 아닌 엄마, 아빠 그리고 언니들을 활짝 웃게 해 주는 재간둥이 막내가 되어 불안의 원인이 되는 그리움이 아니라 행복한 추억이 가득 찬 그리움을 만들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