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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자 Oct 13. 2022

구더기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쯤, 주말마다 골프를 치러 다니셨던 아빠는 뜬금없이 ‘견지낚시 입문’ 책을 읽으셨다.

그 책을 읽고 난 뒤부터 지금까지 우리 집에서는 ‘아카시아 꽃이 피는 시즌’은 곧 ‘견지낚시 시즌’이 되었다. 아카시아 꽃이 피는 시기가 잉어와 피라미 등 민물고기들의 산란기이기도 하고, 30년 넘는 나의 견지낚시 경험을 바탕으로 유추해 보자면 꽃이 피는 그쯤, 강물의 수온도 높지 않고 장마가 오기 전이라 수초나 이끼가 많지 않아 대체로 맑은 물에서 낚시를 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견지낚시는 다른 낚시 장비에 비해 낚싯대, 줄, 바늘 그리고 얇은 납 정도의 장비만 있어도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는 점에 남녀노소 모두가 쉽게 즐길 수 있는 레저스포츠이다. 하지만 우리 집만의 낚시법을 꼽으라면 아빠만의 신선한 구더기와 떡밥 고르는 방법이다. 아빠는 특별하게 미끼를 고르는 방법은 없다고 하시지만 아빠 이외 다른 사람이 구더기를 사 오는 해는 어획량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아빠가 사 오는 구더기는 언제나 신선했다.

구더기를 ‘신선했다’고 표현하는 게 좀 우습긴 하지만 정말 신선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일이다. 그 해, 고등학생인 큰 언니를 제외하고 (사실 큰 언니는 집순이라 함께 여행한 적이 별로 없다) 어김없이 견지낚시를 다녀왔다. 그런데 다녀온 다음 날부터 갑자기 집에 많은 파리들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파리가 날아다닐 계절도 아니었고 설사 파리 많은 계절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 많았고 더 신기한 것은 이 파리들이 잘 날지도 못했고 어린 내가 손바닥으로 내려치면 바로 죽는 것이다. 엄마는 죽여도 계속 어디선가 나오는 파리들 때문에 더 열심히 청소를 하시고 쓰레기통도 비웠지만 그 이상한 파리들은 줄어들지 않았다. 엄마는 더 집요하게 파리의 출몰지를 추적하셨고 드디어 그곳을 찾으셨다. 그곳은 거실 피아노 옆 창고, 견지낚시 장비가 있던 곳이었다. 엄마는 장비를 속 뒤지다 미끼통에 미처 버리지 않고 남겨둔 구더기와 떡밥을 발견하셨다. 거기가 바로 파리들의 출생지였다. 그곳은 직사광선이 없이 고온다습했으며 최상품질의 떡밥으로 구더기들이 충분히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최고의  환경에서 파리로 변신한 구더기들은 파리로 변신도 못한 채 물속을 수영하다 물고기들에게 먹히거나 익사하는 다른 구더기들은 절대 상상할 수 없는 행복한 마음으로 우리 집 여기저기를 날아다녔을 것이다.


엄마는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자마자 서둘러 미끼통을 버리고 나머지 장비를 창고에서 꺼내 물로 모두 닦아내셨다. 나와 작은 언니는 엄마와 함께 낚시 장비를 닦는 동안, 구더기가 진짜 파리 새끼가 맞다며 너무 신기해했고 큰 언니는 기겁을 하며 그 파리들이 다 없어질 때까지 2층 자기 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다. 보통 낚시를 가기 전날 미끼를 사고 하루 종일 낚시를 하고 나면 해질무렵 팔팔했던 구더기들은 말라죽어버리거나 움직임이 둔해지기 마련인데 아빠가 사 오는 구더기들은 얼마나 신선했는지 낚시 상점에서 구매한 기준으로 2~3일 뒤도 살아 파리가 되었던 것이다.




2015년 아빠가 이민을 가신 뒤에도 우리는 매해 견지낚시를 갔고 아빠가 구매한 낚시가게에서 미끼를 구매했지만 한 번도 구더기가 파리로 변신하는 일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가게에서 나름 통통하게 생긴 구더기를 샀지만 영 신통치 않았다.


1cm도 안 되는 하얀 구더기.

공포 영화나 범죄 영화 속 시체에서 나오는 소름 끼치는 벌레이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손으로 만지기는커녕 보는 것조차 징그럽다고 하는 구더기. 하지만 나에게는 매해 많은 고기를 잡아 줄 것 같은 기대를 하게 만들어주고 아빠와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소중한 친구이다.


코로나 19로 한동안 한국에 오시지 못한 아빠가 내년에는 오실 계획이다. 나는 아빠에게 무조건 아카시아 꽃이 피는 5월에 오시라고 했다. 내년에는 견지낚시도 가겠지만 아빠와 꼭 한번 청량리 낚시 가게에 가고 싶다. 신선한 구더기를 사는 아빠의 노하우도 배우고, 살아계시는 동안 아빠와 나, 둘 만의 좋은 추억을 하나 더 만들고 싶다. 늦은 가을비로 쌀쌀한 날씨지만 아빠와 함께 할 내년 5월을 생각하니 어디선가 아카시아 꽃 냄새가 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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