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엄마도 천국과 지옥을 다녀왔겠지. 아마도 수백 번은.
"무슨 일이 생겨도 잘 버틸 자신 있는거지?"
"응"
연고도 없는 캐나다 살이에 자신만만했으나 우려되는 딱 하나의 단서조항. 아이가 응급실에 갈 정도로 아프지만 않는다면.
"다른 건 다 견딜 수 있는데, 애들이 아플때, 못 버틸 것 같아."
한국의 의료시스템이 세계 최고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반대로 캐나다의 의료시스템은 악명높다. 의사였던 지인은 내가 캐나다로 이주한다고 했을 때 '의료후진국'으로 간다며 깊은 우려를 표했다. 의료후진국이라는 오명을 내가 증명하게 될까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손가락이 잘려서 잘린 손가락을 들고 응급실에 갔더니 목숨이 위태로운 건 아니니 기다리라는 거야. 그 사이에 신경이 다 죽어서 손가락이 잘린 채로 살았대 글쎄'
'할아버지, 저는 지금 10시간째 대기하고 있어요. 할아버지는 얼마나 대기하셨던 거에요?'
'응, 난 어제 왔어.'
지인으로부터 들은 살벌한 에피소드도 한 몫했다.
캐나다에 온 뒤로 가장 챙겨야 할 것은 패밀리 닥터가 없는 우리 가족의 건강이었다. 건강 잘 챙기라는 일상 언어가 우리에게는 생존의 언어였다. 그렇게 '안전제일'을 가훈으로 실천하며 살던 어느 날, 발신자가 unknown으로 찍힌 불길한 전화. 그 진동음이 내 심장을 덜컹였다.
"헬로"
"헬로, 여긴 XXXX스쿨이야. 오늘 OO가 멍키바(한국에서는 구름사다리로 불리운다.)에 거꾸로 매달려 있다가 그대로 머리부터 떨어져서 이마가 부어올랐고 엄청나게 울었어. 지금 올 수 있겠니?"
나는 떨리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히고 짝꿍과 함께 학교로 돌진했다. 운동장에 배치돼 있는 안전요원들이 어째서 위험한 자세를 제지하지 않았는지 화가 치밀었다. 시퍼렇게 부어오른 이마 위로 얼음찜질을 하고 있던 딸은 우릴 보자 혼날 것이 두려웠는지 울음을 터트리지 않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상황을 설명했다.
"일단 집으로 가자."
이마에 피뭉침과 멍을 동반한 부종이 딸의 상해를 알려주고 있었다.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잘 걷던 딸이 안아달라고 칭얼댔다. 안아서 차에 태우자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창문을 살짝 열어줬더니 토할 것 같단다. 그 길로 우린 응급실로 향했다. 캐나다 온 뒤 첫 응급실 입성이었다.
짝꿍이 딸과 나를 멍크턴병원 응급실 입구에 내려주고 주차하러 간 사이, 22키로의 7살 아이를 안고 힘겹게 뛰는 나를 누군가가 불러세우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내 아이가 학교 운동장에서 놀다가 멍키바에서 머리부터 떨어졌어. 높이는 1.5미터 정도야. 괜찮아 보였는데 아이가 차에 타자마자 처지고 졸려하고 토할 것 같다고 해서 응급실로 왔어."
내 다급함이 통했던 것인지, 아니면 환자가 어린이라서였는지는 모른다. 나를 응급실까지 에스코트해 준 여자는 일사분란하게 현재 상황을 원무과 직원, 간호사, 의사에게 전달했다. 응급실 자동문이 열리자 쿠션감이 좋은 휠체어가 등장해 딸 아이를 태우고는 간호사의 굿 핸들링과 승차감을 채 맛보기도 전에 프리패스로 침상에 도착했다. 불과 5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천국행 티켓을 끊고 들어온 것 같았다. 한 여자 간호사는 패드가 장착된 트롤리를 끌어오더니 화면 상에 한국인 의사를 연결했고 통역을 부탁했다. 아무래도 내 영어가 못미더웠나 보다. 나는 한결 마음이 놓여 한국어로 상황설명을 했고 응급실 담당 의사는 딸아이를 진찰하더니,
"지금 아이의 상태는 양호하지만 그래도 X-Ray를 찍어서 결과를 확인하고 안심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어때?" 라며 내 의사를 물었다.
"당연하지! 나도 X-Ray를 찍으려고 온 거야."
어느 샌가 한국인으로 보이는 젊은 의사가 동석해 있었고 그 의사가 본인이 한국말을 할 줄 안다는 것을 밝혔을 때, 천사의 후광을 언뜻 본 듯도 했다. 모든 일은 그야말로 일사천리였다. 여기는 천국인가?
X-Ray를 찍으러 가는 동안 나는 천사와 대화를 나눴다.
"이 병원에 한국인 의사가 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어요. 여기서 한국인을 만나다니 정말 놀랐어요!!"
천사는 본인의 고향이 뉴브런즈윅주에 있는 다른 도시이며, 나의 둘째 아이와 같은 나이일때 부모님과 정착해 지금까지 그 도시에서 살았다고 했다. 어린시절에 오롯이 감내했던 인종차별과 그 고난 속에서 의사의 꿈을 이뤄냈던 히스토리를 들려주며 나에게 정말 잘 왔다고도 했다. 자기를 캐나다로 데리고 와 준 부모님께 감사하다는 대목에서는 적잖이 위로를 받았다. 그렇게 천사와의 대화가 오가는 동안 딸아이는 침상에서 고요히 잠에 빠져들었고 X-Ray 결과가 나오기까지 달콤한 잠을 누렸다.
한시간 가량 꿈나라를 헤매던 아이가 모든 피로를 풀었다는 듯 나른한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자 담당 의사는 X-Ray 상 아무 문제가 없으며 일시적으로 뇌가 흔들렸을 수 있으므로 2~3일은 절대 안정을 취하고 바깥활동을 엄금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따로 약처방은 없었고, 그도 그럴 것이 아이는 한잠 잔 뒤 기력을 완전히 회복했다. 의사가 준 막대 아이스크림을 냉큼 천연덕스럽게 받아먹을 때는 조금 민망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라면 한시간 정도면 끝났을 정형외과 진료가 캐나다에서는 응급실에서 3시간 새에 이뤄졌다. 지인들 모두가 3시간이면 '럭키'라며 축하를 해 주었다.
"어린 아이이고 위급해 보이는 상황에서는 대기 없이 바로 진료를 해 주는구나"
진료비를 지불하지 않고 의사의 배웅을 받으며 문턱을 넘으니 기분이 묘했다. 응급실과 무상의료의 첫 경험이었다.
그래도 응급실 올 일은 왠만하면 만들지 말자고 11월 6일, 우리 가족은 약속과 다짐을 했다.
그로부터 한달 남짓 지난 12월 19일. 곧 연말 holiday 시즌과 맞물린 겨울방학이 시작될 즈음이었다. 발신자 unknown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걸려왔지만 지난달보다는 느긋하게 전화를 받았다.
"헬로"
"헬로, 여긴 XXXX스쿨이야. OO이가 목에 조금 두드러기가 있던데 왜인지 아니?"
등교길에 딸아이의 오른쪽 목에 500원짜리 동전만한 두드러기가 보였으나 이 정도는 자연히 사라지기도 했던 터라 되려 내쪽에서 선생님을 안심시켰다.
"응, 알고 있어. 어제 낮에 친구가 준 초콜렛을 먹고 두드러기가 생겼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단 한번도 알레르기가 없었기 때문에 더 심해지지는 않을 거고 자연히 없어질거야. 아마 너무 놀아서 피곤했나봐"
"아, 이미 알고 있구나. 그렇다면 됐어. 확인해 줘서 고마워, 안녕"
전화를 끊고 일하던 중 다시 unknown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지만 받지 못했다. 내가 전화를 받지 않자 학교 담당자는 내 짝꿍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의 두드러기가 번지고 있으니 집으로 데려갈 것을 권고했다고 했다.
캐나다에서는 아이들의 알러지에 민감하므로 학교 측의 우려에 공감하며 짝꿍이 아이를 데려왔고 당최 딸아이가 신경 쓰인 나는 짝꿍에게 집 근처 Drug store 에서 약사에게 상태를 보여주고 연고라도 처방받아올 것을 부탁했다.
짝꿍은 두 아이를 데리고 10센티도 넘게 쌓인 눈길을 헤치며 약국에서 항히스타민제 연고인 베나드릴을 처방받아왔다.
그날 밤, 잠을 자던 아이가 칭얼대기 시작했다. 어기적 침대에서 피곤한 몸을 끌어내 딸아이 침대로 가서 보니 양쪽 어깨에 수십개의 모기물린 듯한 자국이 보였다. 한눈에 봐도 엄청 가려울게 분명했다. 밤새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술래잡기를 하는 두드러기를 찾아 베나드릴을 바르며 20~30분마다 발작적으로 깨어 가려움을 있는 힘껏 참아내는 딸을 진정시켰다. 20일 아침, 두드러기는 곳곳에서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온 몸 전체를 뒤덮기 시작했다. 긁으면 안된다는 엄마의 말을 철석같이 따르며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악물고 버티는 아이를 보니, 한없이 딱하고 겁이나 연휴가 시작되기 전에 회복되거나 병원에서 정확한 진단을 받아야만 했다. 다시 약국을 찾아 어제 처방받은 베나드릴 연고로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설명하고 액상형 항히스타민제를 받아왔다. 최소 4시간 간격으로 복용해야 해서 오전에 한번 저녁에 한번 투약했으나 오히려 증세가 악화되는 것을 보고 어쩔 수 없이 그날 저녁 온가족이 다시 응급실을 찾았다. 온몸에 두드러기가 포진해 있으나 상대적으로 얼굴은 멀쩡했던 딸아이를 본 응급실 접수 창구 직원은 천국의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우리는 지옥같은 대기실에 내던져졌다.
연휴 직전이어서인지 사람들이 유난히 북적였다. 대기실에서 2시간 정도 기다렸을까, 40대로 보이는 여자가 황급히 들어오더니 "나 숨을 못 쉬겠어" 라며 당장 진료해 줄 것을 요구했다. 누가 봐도 말짱했다. 얼핏, 캐나다 응급실에서는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진료를 봐준다는 얘기가 기억을 스쳤다. 그때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사람이 정직하게 살아야지. 어른이 되서 새치기나 하고."
우리 가족과 등지고 있던 한 할아버지는 맞은편에 앉은 인도인 두명의 청년과 두시간째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딸아이의 두드러기만 아니었다면 여기가 스타벅스였다. 할아버지 옆에는 30대로 보이는 엄마가 딸아이를 데리고 와 있었는데 아이가 열이 많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빼곡히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저마다 지루하고 무념무상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정말 저들이 응급환자들이란 말인가? 의구심이 일었다.
5시간 정도 경과하자 가려움을 호소하던 아이의 목소리에 짜증과 괴로움이 묻어났다. 긁기 대신에 문질러주고 있던 내 손과 팔도 기력이 소진되고 있었고 두 아이를 동시에 케어하는 짝꿍의 눈가에도 피곤함에 짙게 어렸다. 저녁 6시에 들어왔던 응급실 시계의 시침이 자정을 가르키고 있을때 나는 내일 낮 11시부터 밤 9시까지 풀근무를 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했다. 그리고 저녁에 새치기를 했던 캐내디언 여성의 임기응변이 얼마나 현명했던가를 깨달았다.
아이들이 지쳐가기 시작했다. 의자를 이어 붙여 아이들을 뉘였다. 지금까지 기다린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돌아갈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간다면 아픈 아이는 어쩌란 말인가. 아픈 첫째는 말할 것도 없고 의젓하게 누나를 기다려주는 다섯살 둘째에게 더 이상의 인내를 요구할 수가 있을까. 고민하던 새 새벽 1시가 됐다. 인도 청년들은 이제 체스를 두고 있었고 그들과 담소를 나누던 할아버지는 훈수를 두고 있었다. 진료실에서는 더 이상 호명조차 하지 않는다. 의사들이 자러 간 것인가? 아니면 환자가 응급하지 않아서 의사도 응급하게 대응하지 않는 것인가?
새벽 2시가 됐다. 아이들이 좁은 의자에 웅크리고 잠이 들었다. 그런 와중에서 딸아이는 가려움으로 괴로워하며 잠에서 깼다. 티셔츠를 젖혀보니 두드러기에 점령당한 등허리를 보고 다른 환자들과 간호사들이 모두 놀라며 말했다.
"이 정도면 빨리 진료를 봐 줘야 할 텐데..."
"치킨팍스 아니야? 아이가 엄청 힘들겠어"
저마다 안쓰러움에 내뱉은 말이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체스에 훈수를 두던 할아버지는 짐을 챙겨 일어나더니 "나 이제 집에 가려고. 기다린지 12시간 됐거든. 안녕" 하고 웃으며 떠났다. 지옥에서 여유롭게 탈출하는 뒷모습이 어쩐지 대범해 보였다. 내 맞은편에 앉아서 내 딸아이를 근심스럽게 바라보던 여자도 주섬주섬 짐을 챙기며 자신의 딸에게 옷을 입혔다.
"스위티, 내일 다시 오자. 노바스코샤(뉴브런즈와 이웃한 주로 주도는 할리팩스)는 이 정도까진 아니야" 라며.
나는 지금까지 함께 기다린 그녀가 떠나는 것이 전우를 잃는 것마냥 슬퍼져 물었다.
"지금까지 기다렸는데 정말 가려고? 그리고 내가 살던 한국에서는 한 두시간이면 해결돼. 어디든 병원이 있거든."
그녀는 그녀 자신보다 내가 더 딱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인사를 대신하고는 떠나갔다.
곧 이어 난민과 다름없는 우리에게 간호사가 다가와 묻는다.
"너는 더 기다릴 거야?"
이건 또 무슨 시츄에이션인가. 이 지옥에서 탈출하지 않고 더 버텨볼 것인지를 묻는 것인가, 아니면 더 기다려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돌려 말하는 것인가. 저의를 알 수 없는 질문에 황당해하는 사이 새벽 3시가 됐다. 닭모가지를 비틀어도 아침은 올 것이고 나는 어쨌든 일하러 가야 한다. 나와 짝꿍은 응급실의 시계를 망연자실 바라보며 마침내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밖에 나가보니 20센티 가까이 눈이 쌓여있었다. 잠든 두 아이를 차례 차례 차에 옮겨 실으며, 응급실만 아니었다면 참 좋은 날이네. 라며 하염없이 휘날리는 눈을 짝꿍과 함께 맞았다.
쌓인 눈을 밟고 흐드러지는 눈발을 헤치며 천천히 달려 집에 돌아왔다. 집앞에도 투명하리만치 하얀 눈이 현관을 넘어들만큼 쌓여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의 귀가를 환영해 주는 것 같다. 짐을 풀고 아이들을 뉘인뒤 나는 딸아이 침대 한 귀퉁이에 누워 아이가 발작적으로 깰때마다 발진 부위를 찾아 연고를 도포했다. 밤새 임무를 완수했지만 일터로 나가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고 온전히 아이들을 책임져야 할 짝꿍에게도 미안했다. 무력감의 무게는 상당했다.
이틀째 잠을 못 잤지만 아이가 아프니 오히려 각성이 되는 듯했다. 일터에 와서는 에스프레소를 연달아 들이부었다. 수시로 아이 상태를 짝꿍과 톡으로 체크했는데 이웃집 엄마가 준 연고라며 사진을 보내왔다. 지르텍, 세노바퀵, 펙소나딘, 유락신연고까지 모두 항히스타민제로 한국약이었다. 원래 크리스마스 이브를 같이 보내기로 했던 이웃이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아 미리 연락했더니 챙겨준 모양이었다.
"역시 한국약이 잘 들어. 약 먹이고 발라줬더니 아주 많이 좋아졌어"
짝꿍의 말 덕분에 나는 밤 늦게까지 조금은 편하게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어제 응급실에서 보낸 9시간이 온 가족에게 미안해서 눈물이 났다. 집에 돌아가면 꼭 안아줘야지.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이 상태부터 살폈다. 분명히 완화됐지만 두드러기가 발적으로 변한 흔적이 보였다. 곳곳이 붉어져 있었다. 혹시 약의 부작용인가 싶어 일단은 복용약을 중단하고 연고만 발라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제 딸아이는 가려움과 동시에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허벅지에 흰 스팟이 곳곳에 생기고 피부가 땡땡하게 부어올랐다. 발목과 허벅지 뒷쪽이 괴사하는 듯 청색으로 피부색이 변화하기 시작했고 아이는 걷는 걸 거부할 정도로 아파했다. 단순 두드러기가 아니라 단단히 잘못된 것 같다.
아이가 아프면서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홀로 사는 노모를 남동생에게 맡기고 캐나다로 떠나온 길이라 무슨일이 있어도 엄마한테만은 걱정끼치고 싶지 않았는데, 이날 결국 나는 한국에 있는 엄마에게 현 상황을 이실직고하고 소아과의사인 외숙모에게 SOS를 쳤다. 아이가 아픈 것이 알려지면 끼칠 어른들 걱정이 내 걱정이었다.
그간의 경과를 소상히 보고하고 타임라인별로 찍어두었던 증세 사진을 보냈다. 숙모는 알러지스트와 상의하시더니 두드러기에 열과 통증까지 동반된다면 혈관염일 수 있으며 이 경우 항히스타민제로는 잡히지 않으니 스테로이드를 써야 한다, 스테로이드 주사 한번이면 증세가 나아질텐데 캐나다 상황이 가능한가를 물어보셨다. 불가능을 염두한 질문으로 들렸다. 나는 자신없는 목소리로 알아보겠다고만 하고, 아침이 밝자마자 약국에서 하이드로코르티손 1% 스테로이드 연고를 사서 환부에 도포했다.
놀랍도록 빠르게 회복되는 것이 눈으로 보였다. 그렇지만 외숙모는 병원에 다시 가서 검사를 받고 정확한 진단을 받아볼 것을 권장하셨다. 또 응급실을 가야 한다고? 나는 엄두가 나질 않았다.
스테로이드를 도포한 후 아이 컨디션도 많이 좋아졌다. 이웃과 다시 약속을 잡아도 될까 고민할 정도로. 그러나 만의 하나 혈관염이라면 바이러스에 감염됐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옆집 아이들과는 완치된 후에 다시 만나는 것이 낫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24일 크리스마스이브.
다리와 발목쪽의 통증은 여전히 남아있으나 가려움은 많이 완화된 아이에게 고마워 짝꿍이 직접 초콜렛 케이크를 굽기 시작했다. 소싯적 제빵을 했던 짝꿍이 여러 차례 실력 발휘를 해 왔기 때문에 아이들 뿐만 아니라 나도 들떠 있었다. 투박하지만 맛깔난 핸드메이드 초콜렛 생크림 케이크에 초를 꽂고 메리크리스마스를 외치며 아이들이 불을 껐다. 와구와구 퍼먹기 시작한지 1분도 되지 않아 딸아이 얼굴에 붉은색 반점들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 초콜렛!!!!"
그제서야 우리는 깨달았다. 지금껏 초콜렛 아이스크림과 초코바, 초콜렛 케이크, 초코도너츠 등 수도 없이 초코를 먹어 온 아이지만 느닷없이 알레르기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12월 19일 딸아이의 가장 친한 친구가 줬다는 것도 초콜렛. 그날 밤 두드러기와 발적과의 전쟁이 다시 시작됐다. 새벽 3시 30분. 네이버 카페에 아이의 상태를 교민들에게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글을 올렸다. 스테로이드 경구약을 구할 수 있는 방법과 이후 내가 취할 수 있는 조치에 대해. 한국에서 약사였으나 캐나다에서는 침술을 하는 분이 어혈을 알려주기도 했고, 911로 앰뷸런스를 부르면 무조건 응급실 첫번째로 들어갈 수 있다는 전략을 제시해 주기도 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연락처를 남겼고 채팅과 댓글 알림이 울렸다.
25일 크리스마스 아침. 아이의 얼굴이 퉁퉁 부었다. 왼쪽 눈은 떠지지 않고 입술은 새빨갛게 부풀어 올라 튀어나와 있었다. 이제 막 경기를 마친 복싱선수의 얼굴과 흡사했다. 지인들이 다시 응급실을 갈 것을 강력히 권고했고 이 상태로라면 응급실에서도 바로 진료를 봐줄 것이라는 기대(?)에 우리 일가족은 다시 천국일지 지옥일지 모를 그 문을 두드렸다.
응급실을 다시 찾은 건 크리스마스 당일 점심때쯤이었다.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가장 중요한 이 캐나다 시골에서 크리스마스는 연중 행사 중 가장 큰 명절이다. 그래서인지 이날만큼은 환자가 많지 않았고 아이의 얼굴 상태를 본 간호사가 곧장 나에게로 걸어왔다. 동양인이라 눈에 띄기도 했지만 9시간을 아이들과 버틴 일가족을 그녀는 바로 알아보았다.
"나 기억하지? 내 딸이 그날 두드러기로 엄청 힘들어했는데 결국 진료 못받고 돌아갔잖아"
"그럼, 기억하지. 지금 그녀는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딸아이의 얼굴을 심상찮게 들여다보던 간호사에 이어 의사가 바로 아이를 데리고 접수실로 데려갔다.
오늘은..... 천국의 문이었다.
트롤리를 동반한 번역용 패드가 재등장했고 화면 너머의 한국의사가 동시통역을 하며 상황을 설명한다.
나는 외숙모와 한국의 알러지스트 소견을 전달하며 스테로이드가 필요하다고 했다. 한 시간 가량의 대기를 거쳐 결국 젊은 의사는 스테로이드와 항히스타민제를 처방해 주었다. 그러고는 혹시나 발현될지 모를 부작용에 대비해 한시간 가량 응급실에 머무를 것을 지시했다. 아이가 완연히 회복되고 있었다. 빨간 점이 사라지고 두드러기가 들어가고 붓기가 빠지며 표정이 맑아졌다. 기다리는 한시간 내내 우리는 의자에 앉아 게임을 했다. 빨간 점이나 사각형 모형의 물체를 다섯개 먼저 찾는 사람이 이기는, 영 시덥잖지만 박진감 넘치게 즐거워하는 딸아이가 제안한 게임이었다. 물론 딸아이가 항상 이겼다.
1시간 30분쯤 흘렀을까. 의사가 찾아와 침상에 아이를 뉘인 뒤 온몸을 살핀다. 긁으면 안되기 때문에 잘때도 장갑을 끼우고 필요시에는 문질러 줄 것, 두드러기가 올라오면 약사로부터 처방받았던 물약을 먹일 것, 더 이상의 스테로이드제는 처방하지 않을 것임, 초콜렛 알러지일 수 있으니 알러지 테스트를 위해 알러지 클리닉으로부터 전화가 갈 것이라고 했다. 물론 이 전화가 1년 뒤에 올지 2년 뒤에 올지, 아예 안 올지도 모르겠다.
우선은 초콜렛을 끊었다. 아이가 먹고 싶어할까봐 다른 가족들도 반강제로 초콜렛을 먹지 않았다. 아니, 안먹어도 됐다. 그리고 나는 좁디 좁은 딸아이 침대에서 매일 같이 함께 잠을 잤다. 잠을 잤다기 보다는 그냥 누워있다가 아이가 괴로워하면 진정스프레이로 마사지를 해주고 연고를 발라주며 간병을 했다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렇게 수일이 지나 하루에도 수십번씩 호소하던 가려움증의 횟수가 점차 줄기 시작했다. 아이의 회복은 곧 가족과 일상의 회복과 직결됐다. 잠들기 전에 항히스타민제를 복용하면 깨지 않고 아침까지 자는 날도 있었다. 아프고 가려움에 시달리는 중에도 딸아이는 내가 불편할까 베개를 내어주고 추울까 이불을 덮어주었다. 내가 너를 걱정하는 것만큼 너도 엄마를 걱정하나 보구나.
내 나이 7살 때였나. 대청마루에 옆집 삼촌(정확히는 옆집 청년)이 얼기설기 매달아준 그네에 어린 남동생을 태우고 밀어주다가 뒤로 밀려 압력밥솥위에 철푸덕 앉아 허벅지 맨살이 타들어갔던 그 날. 워낙 어릴 때라 선명하진 않지만 어스름한 저녁으로 기억한다. 짧은 반바지를 입고 끓는 쇠솥에 주저앉았으니 연한 허벅지 살은 비닐이 타듯 일그러졌고, 엄마는 나를 들쳐없고 정신없이 병원으로 뛰었다. 수십년이 지나 내가 자식을 낳고 그 아이를 업고 뛰쳐 병원으로 들어갔을 때, 그때서야 기억이 났다. 그 날, 날 업고 뛰던 엄마가 울고 있었다는 것을.
엄마인 나는 그제서야 내 침대로 돌아왔다. 8일만이었다.
이렇게 나는, 엄마에게 진 빚을 내 아이에게 갚는다. 얼마만큼 더 천국과 지옥을 오가야 이 빚을 다 갚을까, 갚을 수는 있을까 생각하며 실로 오랜만에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