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커리어, 각자의 세계
와이프를 소개팅으로 처음 만났던 10년 전.
그녀는 간호학과를 막 졸업한 예비 간호사였다.
입사 예정인 병원이 정해져 있었고, 주사 놓는 게 아직 익숙하지 않아 나를 상대로 마루타(?) 실습을 하기도 했다.
살짝 따끔했지만, 어쩐지 그 장면은 지금까지도 내 마음 속에 유쾌하고 선명하게 남아 있다.
시간은 흘러,
이제 눈 감고도 주사를 놓는 그녀는 10년 차 베테랑 간호사이자,
관련 분야 석사 학위까지 마친, 현장에서도 후배들에게 존경받는 의료인이 되었다.
한때는 실습생이던 그녀가, 이제는 병동에서 팀을 이끄는 중간관리자 역할도 종종 맡는다.
나 역시 학위 과정을 마치고, 국립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다.
매일 강의실과 연구실을 오가며 수업을 준비하고, 논문을 쓰고, 행정업무에 치이며 살아간다.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우리 둘 다 '사람을 돌보고, 성장시키는' 일을 한다는 점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매일같이 연락을 주고받고, 매일 통화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로의 '일'에 대해선 의외로 구체적인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와이프는 내가 어떤 주제를 가르치고, 어떤 방식으로 연구를 하는지 깊이 묻지 않는다.
나 역시 병원이라는 전장 같은 공간에서 그녀가 어떤 긴장을 안고 하루를 보내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초반엔 그게 조금은 섭섭하기도 했다.
‘왜 내 이야기를 깊이 안 들어줄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고,
와이프도 아마 비슷하게 느낀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해’보다는 ‘존중’이라는 감정이 더 크게 자리 잡게 되었다.
한 번은 와이프가 병원 내 교육 발표를 준비하느라 주말 내내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는데,
내가 PPT 만드는 걸 조금 도와주다가 그녀가 만든 자료를 보며 깜짝 놀랐다.
정리된 구조, 핵심을 꿰뚫는 표현, 자료의 깊이.
“와, 이거 진짜 잘 만들었네.”
그 순간, 내가 알던 ‘아내’가 아닌 ‘전문가’로서의 그녀가 보였고,
괜히 내가 더 뿌듯했던 기억이 있다.
반대로 내가 논문 마감이나 강의 일정으로 한껏 예민해져 있을 때면,
와이프는 무슨 말보다도 먼저 이렇게 말한다.
“뭐 시켜줄까? 치킨이라도 먹고 하자.”
가끔은 따뜻한 위로보다, 이렇게 실질적인 배려 한 마디가 훨씬 더 큰 위안이 되기도 한다.
같은 공간에서 매일 붙어 살았다면,
어쩌면 이런 각자의 세계가 부딪히고 충돌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주말 부부.
그래서 오히려 서로의 ‘일터’를 일정한 거리 두기로 존중할 수 있었고,
그 거리를 유지하면서 조금씩 상대방의 ‘세계’를 엿보는 순간들에서
작은 감탄과 진심어린 존경이 쌓여갔다.
이제는 서로의 일을 전부 알지 않아도 괜찮다.
모르는 만큼, 우리가 가진 세계는 더 단단해졌고,
그 세계를 가끔씩 나누는 대화는 더 깊고 따뜻해졌다.
“그래서 주말의 대화가 더 소중하다.
우리는 서로를 전부 알지 못하지만,
그래서 더 조심스럽고, 더 진심으로 존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