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지 않기

by 재아

사람들은 만날 때마다 서로의 마음속에 작은 그림을 그려 넣는다.


처음에는 연필로 가볍게 그은 선에 불과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웃음과 따뜻한 말 한마디, 함께 했던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그 그림은 점점 더 짙어진다.


어느새 우리는 그 그림이 실제 그 사람이라고 착각하기 시작한다.


"진정한 친구라면 이럴 텐데."

"가족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데."

"나를 사랑한다면 이렇게 해줄 텐데."


이런 생각들은 우리가 상대방을 마음속에 그려놓은 틀 안에 가두는 것과 같다. 그들의 고유한 삶의 방식과 속도,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을 모두 지워버리고, 우리가 그린 그림과 같아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기대는 사랑이라는 포장지에 싸인 감옥이다. 우리는 상대방이 우리가 그어놓은 선을 조금이라도 벗어날 때 실망하고, 상대방은 우리라는 감옥 안에서 고통받게 된다.


바라지 않는다는 것은 포기가 아니다. 오히려 더 성숙하고 용기 있는 사랑의 방식이다.


기대를 내려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사람만의 계절과 날씨, 언어와 침묵을 온전히 보게 된다. 그때 발견하게 되는 것은 내가 그려놓은 그림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신비로운 한 인간의 우주일 것이다.


바라지 않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듣게 된다.


듣고 싶은 대답이 아니라 그들이 건네는 진짜 목소리를,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가 아니라 그들이 정말로 말하고 있는 것을.


인간관계에서 아름다운 순간들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온다. 내가 바라지 않았던 순간에 건네는 따뜻함, 기대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전해지는 사랑의 표현들. 그런 선물들은 오직 기대라는 틀을 걷어냈을 때만 우리에게 다가온다.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 침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해주면 좋겠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그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자유 또한 상대방의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요구와 요청 사이의 얇은 경계에서 우리는 사랑과 집착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때로는 우리를 실망시키고,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한다.

그 불완전함까지 품을 수 있을 때, 우리의 관계는 비로소 어른의 관계가 된다.


기대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결국 서로를 자유롭게 하는 일이다.

그 자유 속에서 우리는 온전히 만날 것이다.



때론 시 같은 문장으로, 때론 과한 설명으로 글을 적습니다. 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누군가 한 분이라도 잠시 마음이 머물렀다면, 그것만으로도 글 쓰는 사람으로서 충분히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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