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길
'재계약 안 할 거니까 세입자 구하세요.'
감정적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안 좋은 것인 줄 안다. 불구덩이에서 발버둥 치는 나에게 기름을 붓는 집주인의 말에 이성의 끈이 툭 끊겼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 것에 대한 후회는 하지 않았다. 이미 뱉은 말, 이미 결정된 일. 내 선택지는 두 개였다. 지금 이곳을 비우고 좀 더 중심부로 가서 매장을 알아보고 이 기물을 다 옮겨 새로 오픈을 하는 것, 여기를 비우면서 기물들도 정리하는 것.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그냥 이렇게 된 김에 쉬어가기로 결정했다. 이미 내 안에 모든 에너지가 고갈되어 있음을 느꼈다. 그렇기 때문에 급하게 매장을 이전하는 것보다, 뭔가 정리도 하고 마음을 다잡고, 다른 계획을 좀 세워서 새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정리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매장을 운영하며 깨달은 사실이 있다. 첫째 남의 건물에서는 장사하기 싫다. 대출이든 뭐든 내가 건물이나 상가를 소유하면서 매장을 하고 싶다. 그 길이 어려워도 방법은 늘 있기 마련이다. 둘째 더 이상 생계로 매장을 하는 것은 사업적으로 크게 메리트가 없다. 생계를 걸고 제품을 만들게 되면 원래 내가 추구하는 부분과 자꾸 부딪히게 된다. 하지만 내가 하는 사업의 일부분이라면? 쇼케이스 느낌으로 내 실력을 보여주는 공간이고,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트리거의 역할로 매장을 만든다면 내가 원하는 그림에 한 발자국 다가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당장의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다음에 매장을 하게 된다면 그런 느낌의 매장으로 만들고 싶은 느낌만 가지고 마무리를 준비했다.
내가 재계약을 할 생각이 없다고 하니 집주인은 바로 부동산에 올린 월세와 보증금으로 얘기를 했고, 생각보다 여러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둘러보고 갔다. 계약기간이 조금 남아있어서 계약기간 만료 전에 세입자가 들어오면 내가 복비를 내줘야 했다. 그러나 정리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바로 얘기를 해야지 복비가 아까워서 그때까지 기다렸다가는 타이밍이 안 맞을 수도 있다는 것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진행하라고 했다.
1달 정도 지났을까 돈가스집을 하겠다고 들어온 사장님이 인테리어가 너무 마음에 든다며 계약을 하겠다고 했다. 원래 돈가스집은 일식집 같은 인테리어가 많은데, 자기는 카페 같은 인테리어에서 양식집 같은 느낌으로 돈가스를 팔고 싶어서 여기를 계약하고 싶다고 했다. 현재 있는 인테리어가 매우 마음에 들며, 두 개의 가벽 중에 하나만 철거를 부탁했다. 그리고 그게 확정이 되자 바로 계약날짜를 정하고, 빠르게 진행됐다. 사실 새로운 세입자에게 넘겨줄 때 철거비용이 많이 드는 건 맞다. 원상복구의 의무가 있기 때문에 원래 있던 그 상태로 복구를 해야 하는데 앞으로 오는 사람이 인테리어를 그대로 받아서 하겠다고 하면 나는 그냥 인계해 주고 나가면 되는 거다. 다만 가벽을 철거하는 것도 철거에 해당되는데, 그 당시에는 코로나로 인해서 폐업을 하는 곳이 많아서 나라에서 폐업자에게 철거비용을 지원해 주는 제도가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 정리하고 나올 때 철거비용은 세이브 됐다.
이제 새로 올 세입자도 구해졌고, 매장운영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정해야 했다. 매장에 좌석도 없고, 애초에 코로나 때문에 배달위주로 많이 판매를 했지만, 나중에는 손님들이 매장에 직접 방문하시거나 픽업하시는 분들도 많았다. 한 가지 제품을 많이 주문하는 분도 많았기 때문에 내 얼굴을 알고, 안면을 튼 손님들도 제법 있었다. 소소하지만 SNS로 라인업도 올리고, 소통한 적도 있어서 일단 SNS에 공지를 올렸다. 게시물이 올라가면서 손님들이 댓글을 달아주기 시작했다. '아쉬워요', '언제 돌아오세요?' , '장사 잘돼서 확장 이전 하시나요?' , '인생빵집이었어요' , '아기 임신했을 때 먹었는데 아기가 태어나도 너무 좋아해서 먹었어요.' , '재충전하고 꼭 다시 와주세요' , '영혼이 들어간 빵이었어요' 등등 애정 어린 댓글을 보고 있으니 마음은 먹먹했지만 한편으로는 뿌듯했다. 내가 틀리지 않았고, 어디에서 다시 시작하더라도 이렇게 좋은 분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뭔가 모르게 든든했다.
마지막 날에는 선주문을 받아버리는 바람에 생산을 많이 했으나, 판매할 수 있는 제품이 많지 않았다. 근데 오픈전에 줄 서있던 손님들도 꽤 있으셔서 놀랐다. 매장 손님들이 많아서 배달 어플을 닫아놨더니 내 전화가 불이 나고, 주문이 안된다며 문자로 인사를 하신 손님도 계셨다. 매장에 오신 손님들 중에 다수의 분들이 손편지와 선물을 주고 가셨는데 너무 감사하고, 감동을 받았다. 오픈해서 영업을 길게 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와주시고 챙겨 주시는 게 놀라웠으나, 돌이켜보면 나는 손님 한 분 한 분 그리고 제품 하나하나에 전부 진심이었다. 그 진심을 손님들은 알아봐 주신 거라 믿었다. 그리고 매장을 운영하고, 정리하면서 느꼈던 감정들은 내가 앞으로 이 일을 잘 해내는데 중요한 초석 중에 하나가 됐다.
그렇게 마지막 영업일까지 깔끔하게 매장을 운영하고, 나머지는 기물을 정리하는데 시간을 써야 했다. 당분간 다시 매장을 할 일이 없어서 이 큰 기물들을 어디에 정리할지 고민했다. 업자한테 넘기면 진짜 헐값에 다 넘겨야 해서 일단 도전은 해보자는 마음으로 중고나라에 올리기 시작했다. 영업용 오븐, 버티컬믹서, 파이롤러, 발효실, 스탠드 믹서기, 컨벡션 오븐 2대, 작업대 등을 사진을 다 찍어서 친절한 설명과 함께 올렸다. 컨벡션 오븐은 유명한 브랜드 오븐이라 바로 연락이 왔는데, 처음 연락 오신 분이 전라도에서 클래스를 하고 있는 분이었다. 그런데 그분이 대뜸 이렇게 얘기하셨다.
'다른 기물도 보고 같이 사고 싶은데 혹시 매장에 가봐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