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다
급하게 전화를 걸었지만, 선생님은 반갑게 전화를 받아주셨다.곧바로 교육을 받았던 센터로 약속을 잡고 직접 면담을 하게 되었다. 면담을 할 때 선생님은 프랜차이즈 베이커리에서 일하는 것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을 갖고 계시다고 느껴졌다. 예전 정규 교육이 끝날 때도 면담을 했었는데, 프랜차이즈 베이커리는 '뜨는 해', 윈도 베이커리는 '지는 해'에 비유하셨던 기억이 난다. 다시 잘 왔다며 경력직 교육 2주 수료하고 바로 지원기사(오픈하는 매장이나, 다른 제빵기사가 휴무일 때 들어가서 제품을 생산해 주는 제빵기사)로 근무하다가, 고정 근무지로 파견해 준다고 했다.
2주 동안 센터에서 교육을 받고 부산시내에서 몇 군데 매장에 실습을 가야 한다고 했다. 첫 번째 매장인 영도로 갔다. 거기에는 원래 일하던 기사님이 있었는데, 그때 인계를 받으면서 조금 친해졌다. 집에서 조금 멀었지만, 다니기 괜찮았고, 점주님이 잘해주셨다. 그 다음 서면으로 갔다. 거기에는 훈련원에서 같이 교육받았던 같은 기수 언니가 메인 기사로 있는 곳이었다. 같이 교육받을 때는 여리여리하고 소극적이었는데, 같은 기수지만 인계를 받는 후배 위치로 가서 언니를 대하니, 강단 있고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다음은 부산역. 바로 아는 사이는 아니고, 그 당시 내가 만나던 남자친구와 아는 사이였던 언니였다. 그 이유 때문인지 그 기사님의 까칠했던 성격 때문인지 친하게 지내지는 않고 사무적으로 대했다. 그저 시키는 일만 조용히 할 뿐이었다. 다음은 용호동. 임신 7~8개월 정도 된 기사님이 있었고, 곧 출산 휴가를 사용한다고 했다. 용호동은 근무환경도 좋고, 점주님이 점심식사까지 챙겨주셔서 고마웠다. 무엇보다 집이 가까워서 정말 좋았다. 그 점주님도 나를 마음에 들어 한다며 기사님이 출산휴가 가기 전 나를 메인기사로 추천하겠다는 말도 해주었다. '여기가 내 근무지면 정말 좋겠다...'라는 생각으로 지원을 왔었다.
이렇게 실습을 돌아다니면서 며칠 인계를 받다가 각 매장에 기사님들이 쉬는 날 대타로 들어가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때는 돌아다니는 게 싫어서 빨리 고정근무지로 파견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기왕이면 용호동으로...)갑자기 센터에서 연락이 왔는데, 곧 오픈하는 매장에 지원을 1달간 가라고 했다. 그래서 간 곳이 사상터미널 쪽이었다. 꽤 큰 평수의 매장이었고, 메인기사도 2명이었는데 특이하게 두 명 다 남성 기사님들이었다.
기사의 성비는 여자가 90% 정도로 압도적이어서 더 놀랐었다. 2층에서 식당을 하는 점주님이 1층에 매장을 낸 것이었는데, 물량이 참 많았고, 오픈 빨로 사람들도 참 많았다. 기사님들이 배려를 많이 해주셔서 힘들지 않게 했는데, 오븐 보거나 무거운 거 드는 건 전부다 기사님들이 하고, 나는 거의 케이크만 주로 만들었었다.
어느 날 영도에 있던 기사님이 연락이 왔었다. 내가 갈 매장이 정해졌다는 정보를 들어서 전화를 줬다고 했다. 부산에 오래 살았어도 듣지도, 가보지도 못한 아주 먼 동네였다.
'설마요... 저는 거기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요? 확실한 거예요?'
'확실하다니까! 사무실에 있는 동기한테 들었다. 근데 더 충격적인 사실이 뭔 줄 아나?'
'더 충격적인 사실도 있나요...?'
'그 매장 부산에서 top3 안에 드는 매장이다.'
'매출이요?'
'아니 진상 점주'
'...'
통화를 끝내고 잠시 충격에 빠진 나는 센터에 직접 확인을 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정말 확정이 됐다는 것을 3일 전에 스스로 알아버린 나...일단 출근길이 얼마나 먼지 확인 해야 했다. 집에서 첫차 타고 가도 1시간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안 그래도 새벽에 출근해야 하는데, 확인하는 순간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점점 불안했다. 그래서 정식출근 전에 모의출근을 위해 매장을 한번 방문했다. 작은 매장. 한산했다. 제품 상태는 좋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날이 오고 말았다. 대망의 출근날...1주일 정도 인계를 받는데, 거기 있던 기사님은 얼굴이 밝아보였다. 생각보다 점주님이 잘해주시나? 생각했는데, 인계를 받다 보니 그냥 퇴사 전에 근심이 사라진 얼굴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기사님은 행복한 얼굴로 여러 가지 주의사항을 알려주셨다. 주의사항을 듣는 내 얼굴은 점점 굳어갔다...본사 매뉴얼에서 사용하는 소스류 말고 직접 기사에게 만들어서 사용하게 하는 소스도 있다며, 레시피를 몇 가지 알려줬다. 메뉴 중에 에그롤인가 하는 빵이 있었는데, 삶은 계란이 들어가는 식사 빵이었다. 그 계란도 원래 본사로 주문하면 깐 계란이 오는데, 점주님이 계란을 사다 주니까 그걸 사용하라고 했다. 케이크는 매뉴얼대로 만들려면 초콜릿 장식품이 필요한데 그런 건 거의 안 시켜주시고, 통조림 과일을 주로 데코 하며 생과일은 거봉이나 오렌지 정도였다. 뭐... 그 정도야 맞추면 되지 하면서 씁쓸하게 웃었지만, 다른 곳에 지원 갔을 때 이런 점주님은 만난 적이 없었다. 그 좋은 점주님 다 놔두고 왜 나는 여기로 배정이 된 걸까...
골치 아픈 사실은 사실 원래 돈을 낸 점주님은 따로 있고, 내가 점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이름하야 '바지사장'이었다. 바로 옆에 부동산이 있었는데, 그 부동산 소장님이 진짜 점주님이고 매장에서 나와 안면을 튼 사람은 그 소장님의 조카였다. 그래서 간섭도 2배. 서로 말이 다를 때도 있었고, 부동산 소장님은 상당히 깔끔한 걸 좋아하셔서 내가 퇴근한 다음에 생산실을 다시 청소하셨다. 내가 출근하면 정리해 놓은 소도구들이 다른 자리에 가있어서 알게 되었다.매출이 높은 매장이 아니라서 매뉴얼 대로 하는 게 거의 없었다. 15년이 지난 지금과는 사정이 많이 달랐지. 점주님은 살기 위해 편법을 쓰지만 사실 그게 매출에 더 악영향을 끼쳤다.
출근을 더 일찍 하길 바라셔서 말 그대로 첫차를 5시 10분쯤 타고 출근했다. 그리고 점심을 먹지 않고 8시간 동안 일하다가 퇴근은 했는데, 퇴근하기 10분 전에 꼭 일을 시켰다.
'실장님! (이 매장은 기사를 실장이라 부르는 모양이었다.) 오늘 한가했으니까 마늘바게트 좀 만들고 가주세용! '
마늘소스 만들어 바르는데 10분, 굽는데 15분인데... 철판까지 정리하면 30분을 훌쩍 넘기게 될 거였다. 그래도 그냥 했다. 그것보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건 출근하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쪽지였다.
- 실장님! 오늘 팥빵이 너무 많이 남아서 내일은 생산하지 말아 주세요! -
이미 도우컨디셔너에서 발효가 다되어있는 빵을 생산하지 말라니...인계받을 때 냉동실에 철판채로 들어가 있는 빵생지를 본 적이 있다.
'기사님 이게 뭐예요?'
'아... 그거 점주님이 아침에 생산하지 말라고 한 거 냉동실에 넣어놓은 거예요. 이미 발효가 돼서...'
'네? 그럼 이걸 다시 해동하고 발효해서 굽는다고요?'
'네... 하하'
'아...? 그럼 빵이 제대로 나오나요?'
'아무래도 잘 안 나오죠... 발효점도 다르고...'
'...'
점주님이 발효되기 전에 마감하고 냉동실에 넣어두고 간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다음날 생산 안 하실 거면 미리 빼달라고 얘기해 봤는데
' 빼보려고 했는데, 뭐가 뭔지 잘 몰라서요... 실장님은 딱 보면 알잖아요! '
' 그날 내가 마감 안 하고 우리 큰 사장님(소장님)이 마감해서 내가 부랴부랴 와서 적고 간 거라니까!'
하면서 한 번도 빼놓은 적이 없었다. 편지 한 장 달랑 남기고 아침에 70% 이상 발효되어 있는 제품을 다시 냉동실에 넣는다는 건 솔직히 양심에 가책이 느껴졌다. 본사에서 하지 말라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퀄리티가 떨어지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냥 그 제품을 사 먹는 손님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게다가 각 매장을 관리하는 바이저들이 오면 빵 상태로 내 근무점수를 매긴다. 차후에 승급이나 급여 부분에 관여하는 점수를...
'이건 색이 왜 이렇죠?'
'이건 왜 이렇게 발효가 많이 됐죠?'
'냉동실에 이건 뭐죠?'
'이번 신제품은 왜 매뉴얼대로 진행을 안 했죠?'
그때부터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쪽지를 모아뒀다가 보여줬다. 하지만 바이저들은 점주님 하소연, 내 불만만 들어주고 그냥 갈 뿐이었다.
그렇게 메인기사가 된 지 3개월이 지난 어느 날 센터에 전화했다.
' 저 ㅇㅇ점 기사입니다. 퇴사하려면 어디에다 얘기해야 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