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2008년 그녀와 나의 삶에 대한 기록
우리들의 몬트리올
특정 장소에 묻어 있는 진한 그리움이 있다. 그 장소를 떠 올리면 그 장소에서의 온기와 대화가 떠오른다.
2002년 겨울 나는 그녀에게 고백을 했다. 갑작스러운 고백을 받은 그녀는 목포로 친구와 여행을 다녀온다는 말만 남기고 잠수를 탔다.
속이 새까맣게 타 들어갔던 그 겨울 밤, 고백한지 나흘째 되던 날 새벽녘에 문자 한통이 왔다. 청량리역에 도착했는데 내일 시간되면 대학로에 위치한 까페에서 보자고.
소풍이라는 이름의 작은 까페였다. 그녀는 한 참 나를 바라보더니 조용히 입을 뗐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아직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나도 너를 좋아하는 것 같아. 그런데 내가 두 달 뒤에 캐나다 몬트리올로 유학을 가기로 되어 있어. 최소 4~5년 정도는 몬트리올에서 공부를 하게 될 거 같아.”라고 말했다.
그렇게 2003년 나는 몬트리올에 갔다.
연인이 된 지 2개월 만에 지구반대편으로 떠난 그녀를 보기위해서.
그리로부터 6년간, 그녀가 몬트리올에서 대학을 진학하고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나는 매해 몬트리올에 갔다.
내가 한학기동안 과외를 해서 모은 돈으로는 150만원에 달하는 항공료를 지불하기에도 빠듯한 돈이었다. 나머지 한달간 몬트리올에 같이 있으면서 함께 쓸 용돈은 그녀가 캐나다에서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충당했다.
한국에서의 전공과는 전혀 관련이 없던 미생물학이라는 새로운 전공을 택했던 그녀는 유독 공부량이 많았던 탓에 사실상 알바를 할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 그 바쁜 시간을 쪼개어 틈틈이 알바를 했으니, 한학기 동안 알바를 했어도 모인 돈이 많을 리 없었다.
가난한 대학생들이었다. 팀홀튼의 치킨수프와 베이글, 서브웨이의 샌드위치, 집 앞 인도 아저씨가 운영하는 1.99달러 피자가 우리의 주식이었다. 너무 가고 싶어 수없이 기웃거리며 지나다녔던 올드포트 거리의 근사한 레스토랑들은 한달내내 아끼고 아껴서 마련한 돈으로 이별하기 직전에 마지막 저녁을 함께했던 곳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몬트리올에서 가장 아름다운 올드포트 거리는 행복했던 순간보다는 슬픈 기억이 먼저 떠오르는 곳이다.
몬트리올은 우리에게 그런 곳이다.
2003년부터 2008년까지 그녀가 머물렀던 곳.
그녀를 만나기 위해 반드시 와야만 했던 곳.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누구도 신경쓰지 않고 거닐고 또 거닐었던 곳.
6개월 만에 만나 미친듯이 끌어안고
매번 공항에서 눈시울이 시뻘게져 펑펑 울며 헤어졌던 곳,
애정과 슬픔이 짙게 서려있는 곳,
우리에게 몬트리올은 그런 곳이다.
2016년, 다시 그녀의 손을 잡고 추억의 몬트리올을 거닐었다.
그리고 이번엔 그녀의 손 뿐만 아니라 그녀와 나의 딸 선율이의 작은 손도 함께 였다.
몬트리올에 있는 내내 복잡한 감정들이 날 따라다녔다.
매해 너무 힘들었고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던 긴 터널을 지나,
우리 둘의 딸과 함께 이 곳을 거닐고 있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지난 십 수 년간,
거의 변하지 않았던 몬트리올처럼,
그녀도 내게 참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일 벌리기 좋아하는 남자 곁에서,
그 일이 실제로 가능하게 조용히 도와주는 사람.
사람 만나기 좋아하는 남자 곁에서,
인간관계에서 놓치고 있던 부분들을 이야기해주는 사람.
군대에서, 변호사시험을 준비하며, 사회생활을 하며
내가 조급하고 불안감을 느낄 때 마다,
내 손을 잡고 내 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를 차분하게 하는 힘이 있는 사람.
한결같은 그녀와 함께 또 다시,
우리의 한결같은 몬트리올을 찾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녀는 선율이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고,
나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일을 위해 다시 미국으로 향한다.
처음으로 몬트리올 도르발 공항에서 눈물 흘리지 않고 이별했지만,
우리들의 몬트리올이 심하게 그리울 것이다.
2016. 6. 도르발공항에서 한이와 선율이를 떠나보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