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hubert Impromptu Op.90 No.3
동생이랑 <지구용사 선가드>나 <웨딩 피치> 같은 것들을 보고 나면 이미 두려운 어둠이 와 있었고 하루 일과 중 가장 별로였던 기다림만 남아있었다. 동생이 먼저 잠들고 나면 좋지 않은 기분인 채로 나도 모르게 잠드는 때가 많았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아빠만 서울에 남고 엄마와 우리 남매는 제주에 있는 친척집에서 지내던 시절이었다.
‘황금 같은 휴일’이라고 부르던 일주일 중 하루를 빼고 우리가 매일같이 기다렸던 엄마는 겨우 서른 일곱 언저리였다.
그 시절의 엄마를 내가 언니라고 부를 수 있는 정도의 나이가 되었을 무렵부터 그 저녁들 동안의 동생과 내 모습이 아닌 엄마의 모습을 생각하게 됐다.
늦은 시간 부리나케 일을 마치고 돌아와 잠든 아이들을 다시 만났을 때의 안도, 반가움, 미안함.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거나 땀에 젖은 머리를 넘겨주거나 쓰다듬거나 이부자리를 바로 해주거나. 어떠한 반응도 돌려받을 기대 없이 한동안 혼자만의 재회의 의식을 치렀을 것이다. 한숨 돌리고 나서야 거울 속 지친 얼굴을 마주쳤을 것이고 그제야 오늘 겪은 험한 장면, 억울함, 속상했던 일들이 하나씩 떠오를 것이다.
나는 왜 원치 않는 일을 해야 하며, 이곳에 있고,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하는 가.
식솔들을 먼 곳에 맡기고 서울서 동분서주 애쓰고 있을 남편이 밉다가도 이내 그리워졌을 것이다.
그러다 다시 잠들어 있는 아이들을 본다.
나를 온 우주인 양 기다리는 나의 유일한 희망. 내 존재의 이유.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이 생활을 이어가야 하는 이유. 잠자리 날개같이 미약한 날들이라도 잇고 잇다 보면 다시 날아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그에 반해 곱게 잠들어 있는 나의 또렷한 두 소망.
소피 마르소처럼 고왔던 내 젊은 엄마에게
꼭 당신의 밤 같은 슈베르트 즉흥곡 3번을 라붐의 한 장면처럼 들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