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 Sheep May Safely Graze BWV.208 - 9
스물여섯 여름에 순천만이란 곳이 궁금해서 혼자 순천으로 떠났다.
여행은 끝내줬다. 세찬 비가 내려 아무도 없는 순천만에서 혼자 소리 내어 웃으며 뛰어다니고 홀딱 젖은 채로 바들바들 떨며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었다. 처음 보는 이들에게 기웃기웃 말도 붙여 보고 이른 아침 선암사를 오르는 길엔 공기가 너무 맑아서 다 내뱉지도 않은 숨을 연거푸 들이쉬다 코가 매워지기도 했다. 버스 기사 아저씨들은 주민들 일과를 훤히 뚫고 있었고 어제는 왜 안 나왔는지 오늘은 뭘 샀는지... 서로 아는 것도 궁금한 것도 참 많은 정다운 그들은 어리숙한 외지인에게도 꼭 그렇게 다정했다.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던 여행의 막바지, 어느 작고 한산한 시장에 들러서 생선이며 대나무 자리 같은 것들을 구경하다 어느 과일 노점 앞에 섰다. 주변에 사람도 가격표도 없고 과일만 잔뜩 있어서 냄새나 맡고 가야지 하던 차에 주인 할머니가 어디서 순식간에 나타나셔서는 “아가씨 뭐? 주란대로 주께!” 하셨다. 헉.
어디서 어떻게 순간이동을 하신 건지 그리고 '주란대로 주께'가 무슨 말씀인지 당황해서 “아, 괜찮아요” 하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돌아섰다.
이쯤 되면 이 아름다운 고장에 동화되지 않았나 착각하고 있던 무렵 할머니의 기습에 당황해버리고 만 나는, 준비된 점원과 흐트러짐 없이 쓰인 가격표를 읽고 “주문하시겠어요?”나 "결제하시겠어요?"란 말을 듣는 데 익숙한 어쩔 수 없는 ‘서울 아’였다.
길을 따라 나오면서 할머니를 따라 되뇌었다. '주란 대로 준다'니, 곱씹어 볼수록 재밌고 따뜻했다. 익숙해져 있는 재미없는 것들보다 훨씬 익숙해지고 싶은 말이었다.
뒤로 돌아 다시 걸었다.
금세 돌아온 나를 다시 아무렇지 않게 맞아 주시며 ‘서울 가는 기차에서 혼자 먹을 것’이란 말에 좋을 대로 담으라 하시더니, 골라 담은 복숭아 자두 몇 개에 마음대로 매기신 가격 이천 원.
기차역 화장실에서 잘 씻어 서울행 차에 자리를 잡자마자 복숭아를 베어 물었다.
울퉁불퉁 못생긴 게 별 맛도 없었는데 피실피실 웃음이 나왔다.
기차가 출발했고 이내 그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