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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깎이 Jul 14. 2021

사칭 한 번 안해 본 '니가 기자냐?'

라떼는 흔했다는 사칭 취재, 요즘 기자들은 왜 안 하는 걸까

'니가 기자냐?'는 1980년대에 한창 기자생활을 한 저자가 자신의 취재 경험담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출판사는 "암울했던 군사독재 시절 기자들은 어떻게 취재했는지, 때로는 울분을 달래기 위해 어떻게 술을 마셨는지 기록영화를 돌려보듯 생생하게 들려준다"고 소개한다.


공공연하게 보도 검열이 있던 군사정권 시절의 기록을 들여다보는 것은 착잡한 일이다. 하지만 출간 의도와는 달리, 책을 읽으면서 일견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권을 향한 비판의 칼날은 무뎠지만, 방향을 다른 쪽으로 돌리면 기자가 휘두르는 펜의 위세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했기 때문이다. 또한 사건 현장을 함께 돌며 경찰을 비롯한 취재원들에게 훈계하고 문서를 스스럼없이 낚아채는 등 취재현장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그 시절 기자 또한 또 다른 특권층이었음을 보여준다.


"시경 형사과장과 동대문서 수사과장 등 4명이 보도자료 초안을 수정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 있는 초안을 낚아챘다. 수정에 정신이 없던 수사과장이 필자를 알아보고는 '이 사건에 도꼬다니(*단독 기사)는 없어'라고 소리치면서 초안을 빼앗았다." / '니가 기자냐?' 35P

압권은 도둑이 든 집에 전화를 걸어 경찰을 '사칭'하는 대목이었다. 피해자 집에 전화를 걸어 서울시경 관계자라고 사칭하고는 피해자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털어버린' 것이다.

결국 피해자가 기자가 사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들키게 된 상황에 대해 송구스러워할 뿐, 죄책감 같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거짓말에 속아 얘기를 해준 피해자가 한밤중에 술상까지 내오며 기사를 내보내지 말아 달라고 읍소한다.


"A씨 집에도 사칭을 한 상태여서 내키지 않았으나 찾아갔다. 밤늦은 시간이다. 2층 양옥에 정원이 있는 큰 집이었다. 인터폰을 누르자 '누구냐'고 물었다. 새벽 1시가 가까운 시간이었으니 협박편지에 시달리던 가족들이 놀랐을 것이 뻔하다. '한국일보 기자입니다.' 대문이 열렸다. A씨 부부는 자지 않고 있었다. 소파에 앉으라고 권한 A씨는 '전화를 한 사람이 정 기자냐'고 물었다. 이제 숨길 이유가 없었다. '죄송합니다'며 사과했다.
부인이 양주 조니워커에 치즈 안주를 내왔다. A씨가 잔을 권하며 기사가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사정했다.  
/ '니가 기자냐?' 16P




그랬던 시절로부터 한 세대를 훌쩍 넘긴 2021년.  또 다른 기자가 취재 과정에서 경찰을 사칭하적발됐다. 그런데 이를 대하는 사회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사칭이 더 이상 당당한 '취재기법'으로 인정받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당장 해당 언론사부터 메인뉴스 시간에 이 같은 행동에 대해 사과하고 해당 기자를 징계하겠다고 밝혔다.


사칭을 해가면서까지 취재하려던 대상이었던 윤석열 전 검찰총장 측은 해당 기자를 사칭 및 강요죄 등의 혐의로 고발하면서 "불법 취재까지 동원한 정치적 편향성도 드러났으므로 현장 기자들의 단독행위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개인적으로 이번 사건은 특종에 대한 욕심이 지나쳤던 일선 기자의 섣부른 판단이 빚은 해프닝이라고 본다. 하지만 윤 전 총장 측에선 앞서 채널A 기자가 유시민 이사장의 뒤를 캐려고 협박성 취재를 하다 적발됐을 때 여권에서 주장한 것처럼 이번 사안이 현장 취재기자의 자의적인 판단이 아닌, 윗선의 지시에 의한 조직적인 행동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대다수 언론이 이번 사칭 취재를 비판적으로 보도한 가운데, 기자 출신 국회의원이 이를 옹호하고 나섰다가 논란이 일자 결국 사과했다. 김의겸 열린민주당 의원은 YTN 라디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좀 나이가 든 기자 출신들은 사실 굉장히 흔한 일이었고요. 아마 제 나이 또래에서는 한두 번 안 해 본 사람이 없을 겁니다... 윤석열 총장이 이걸 고발한 거, 저는 너무 심했다고 생각합니다.

김의겸 의원은 1988년 한겨레신문에 입사해 청와대 대변인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까지 약 29년간 기자 생활을 했다. 전두환 정권을 이어받은 군사정권 끝자락에 기자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본인 얘기대로 이 같은 사칭 취재가 '굉장히 흔한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기사나 기자를 얘기할 때면 '공익'적인 측면이 강조되곤 하지만 기사를 쓰는 기자 대부분은 엄밀히 따지면 민간 회사에 소속된 회사원 신분이다. 출입처나 취재원이 '관행상' 취재에 응하고 편의를 봐주지만 법이나 규정대로 하자면 이들은 기자의 취재에 응해야 할 하등의 의무가 없다. 이들이 입을 다물어 버리면 기자 입장에선 그야말로 속수무책이다.


후배 기자들의 이러한 상황을 십분 이해하기 때문인지 김 의원은 “(MBC) 기자가 수사권이 없으니까 경찰을 사칭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김 의원 말대로 기자가 수사권이 없는 건 맞다. 하지만 그래서 경찰을 사칭한다는 건 지 않다. 실제로 대부분의 기자들은 이를 잘 알기에 과감히 경찰이나 권위 있는 누군가를 사칭하는 대신, '을'의 입장이 되어 취재원을 어르고 달래고 읍소하는 쪽을 택한다. 사칭을 한다는 건 이런 수고를 건너뛰고 '갑'의 입장에서 취재원을 윽박질러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겠다는 심산이다.




좀 나이 든 기자들 사이에서 흔한 일이었다는 사칭 취재가 언제를 기점으로 뜸해졌는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다만 민주화의 진행과 반비례해 그와 같은 취재 관행도 점차 사라지지 않았을까.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정권을 잡은 권위주의 정부는 상대적으로 남의 허물에도 관대하기 마련이다. 당시에 법은 자의적으로, 대개 힘 있는 사람에겐 느슨하게, 힘없는 사람에겐 엄격하게 적용되곤 했다. 당시 기자들의 사칭 취재가 용인되었던 건 정권의 비리와 부정을 올곧게 지적하고 비판하지 못하는 데 대한 보상으로 일종의 면죄부를 부여받은 셈이다.

더 이상 총칼이나 주먹으로 언론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막돼먹은 정권이 없기에 이제 언론도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는 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다. 대신 이를 취재할 때는 법과 원칙에 따라야 한다. 기자라고 예외를 인정받을 순 없다.


기자의 사칭 취재는 구시대의 전유물이다. 누구 말마따나 한때는 흔한 일이었고 관행이었는지 몰라도 지금 시대엔 맞지 않는 후지고 비겁한 취재 방식이다. 그런 취재 방식을 옹호하는 건 결국 본인이 후지고 시대의 흐름에 뒤처졌다는 걸 자인하는 셈이다. 기자가 기자질 하기 힘들다고 느낄 때 세상은 전보다 좀 더 나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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