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리뷰 시리즈 2ㅣ어쩌면 해피엔딩

반딧불이 같은 삶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by 최은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2025년 토니 어워즈에서 작품상을 비롯한 6관왕의 영예를 거머쥐었다. 한국창작 뮤지컬의 자랑스러운 문화적 성취임과 동시에, 작고도 단단한 하나의 이야기를 오래도록 사랑해온 관객들에게 돌아온 선물처럼 느껴졌다. 수상을 진심으로축하하며, 리뷰를 남겨본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인간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로봇들이, 인간보다 더 인간답게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다. 배경은 가까운 미래의 서울의 낡은 아파트. 버려진 구형 헬퍼봇 ‘올리버’와 ‘클레어’는 유효기간이 끝나가는 어느날, 예기치 않게 마주친다. 그 만남은 명령도,계산된 알고리즘도 아닌 우연이었다. 그리고 그 우연에서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다.


작품은 우연한, 그러나 운명 같은 사랑을 담아낸다. 사랑하지 않도록 설계된 존재들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이야기. 버려진 로봇들의 사랑이라는 다소 판타지적인 설정, 그러나 비현실성을 통해 더 현실에 가까워지며, 비인간 서사가 도리어 인간성을 가장 인갑답게 보여준다. 극은 그들이 왜 사랑하게 됐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이유 없이, 그리고 멈출 수 없이 서로에게 다가간다. 그 지점이 사랑의 근원을 가리킨다. 우리는 사랑에 빠지는 것이지, 사랑을 계획하거나 결심하지 않는다.


어쩌다 태어나, 우연히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 덕분에 조금 더 나은 존재가 되는 이들. 우리의 삶처럼 110분의 시간이, 불완전한 존재들이 맞물려 만들어낸 빛으로 가득하다. 우리는 어느새 공연을 따라 웃고, 울고, 사랑하게 된다.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사랑을 고백이 아닌 시간의 누적으로 보여준다는 데 있다. 사랑은 단발적 폭발이 아니라 지속적인 축적이며, 순간의 전율이 아닌 다정한 반복이다. 마치 반딧불이의 빛처럼 작고 조용하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물들이는 감정. 결국 우리는 이 작고 느린 쌓임에 마음을 내어 주고 만다.


클레어의 배터리가 다 닳았을 때, 자신의 충전기를 빌려주는 올리버의 다정함. 계획에 없던 제주도로의 여행을 감행하는 순간의 용기. 낯선 드라이브 속에서 서로의 이상적인 사랑 이야기를 장난처럼 주고받는 웃음. 이 모든 장면이, 사랑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대한 가장 진실한 답이 된다.


이 뮤지컬은 음악과 서사, 감정의 결이 하나의 직물처럼 촘촘히 엮여 관객의 감정을 뒤흔든다. 피아노, 첼로,바이올린의 삼중주가 직조해내는 정서는 섬세하면서도 깊다. <고맙다, 올리버>에서는 올리버의 다정함이 처음 모습을 드러내고, <Driving>에서는 새로운 설렘이 차창을 스치는 바람처럼 번진다. <반딧불에게>는 감정이 깨어나는 소리이며, <사랑이란>은 그 사랑의 고조를, <The First Time In Love>는 첫사랑의 떨림을 기록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에서는 사랑의 복잡성과 아름다움이 서정적으로 터져나오고, <그것만은 기억해도 돼>가 흐를 때는 감정의 둑이 마침내 무너진다. 말보다 더 진실한 음악. 이 작품에서 가장깊은 진술은 음표들 사이에 스며있다.


작품의 결말부, 올리버와 클레어는 결국 이 사랑이 영원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고장난 팔은 더 이상 서로를안을 수 없고, 클레어는 곧 완전히 멈춰버릴 미래가 예정되어 있다. 만남의 기쁨은 빛처럼 흩어지고, 이별의 아픔은 가슴에 새겨지는 것만 같아서 일까. 그들은 사랑했던 기억을 지우기로 한다. 사랑하기 이전으로, 서로가 없어도 괜찮았던 시절로 그만 돌아가려는 결정은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과연 그들은 사랑했던 기억을 없애고 말 것인가.


나는 그 순간이 그들의 ‘첫 이별’이 아니라고 해석한다. 같은 멜로디를 반복하면서도 매번 하모니를 변주하는 듀크 엘링턴의 음악처럼,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 그들은 사랑하고 이별했고, 또다시 사랑했을 것이다. 우리가 무대 위에서 목격한 것은 그들이 지우지 못한 가장 애틋한 기억일지도 모른다.


처음 관람했던 날, 오열하고 말았다. 아마도 그날의 나는 올리버였고, 클레어였다. 한때 사랑했고, 잃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사랑하고 싶은 존재였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단순한 감미로운 로맨스 뮤지컬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의 조용한 변주곡이며,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따뜻하고도 깊은 메타포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해피엔딩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끝내 상실보다 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는가. 이 작품은 “어쩌면요”, 라고 다정히 속삭인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정적인 두 인물의 감정만으로 관객의 심장을 움직인다. 스펙터클 없이, 다정함으로 승부한 이 작품은 창작 뮤지컬이 감정 서사의 진폭으로 세계에 도달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반딧불이가 어두운 밤을 은은하게 밝히는 것처럼, 우리의 짧은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이 이야기는 누군가의 가슴을 조용히 비추고 있을 것이다. 언젠가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손을 맞잡을 누군가와 함께, 이 뮤지컬을 다시 보고 싶다. 기쁨과 고통, 기억과 망각마저도 사랑으로 함께할 수 있기를 바라며.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