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소 Sep 30. 2021

변해가는 아빠의 낯선 모습

뒤늦게 찾아온 아빠의 사춘기

어릴 적 아빠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사실 좋은 추억보다는 많이 혼이 났던 기억이 대부분이다.

늘 일이 바빴고 집에 있는 시간보다 가게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 주로 엄마와 동생들과 시간을 보냈다. 게다가 다정다감한 성격이 아닌지라 엄격하고 호랑이 같은 모습이 머리에 남아 유년시절에 대한 좋은 추억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나에게도 찾아왔던 사춘기 시절, 아빠와 하루 동안 나눈 대화를 꼽아보자면... 하루로 치기보단 일주일에 다섯 마디 오고 갔을까? 서로가 무척이나 낯설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 아빠에게도 요즘은 뒤늦은 사춘기가 찾아온 듯싶다.



딸은 아빠와 멀어지는 순간이 있다던데


어릴 적 워낙 엄격했던 아빠 때문인지 중학교 사춘기가 찾아왔던 시절 3년 동안 아빠의 얼굴을 마주 보고

제대로 대화 한번 나누어본 적이 없었다.  엄격하기만 한 아빠가 그 시절에는 너무나도 싫었고 새벽 장사를 나가 나와 마주치는 순간이  등굣길, 아빠의 퇴근길 그 짧은 찰나인 게 다행 일 정도였다.

'학교 다녀올게' 정도가 나와 아빠의 유일한 대화였으며 거진 3년 동안은 아빠와 나눈 대화가 거의 없었다.

이렇게 마냥 어색하기만 했던 부녀관계가 조금은 말을

트게 된 계기가 있다면 아빠가 PC방을 동네에 시작하고서부터였다.


고등학교에 진학 후 주말, 하교 후 가게가 바쁠 때 아빠 가게에서 도와드리고는 했는데 그때부터 단 둘이 있는 시간이 생기다 보니 조금씩 서로 말문이 트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엄마 없이 둘 만 있는 자리가 너무 어색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다 보니 예전만큼 어색함은 사라진 듯싶었다. 가장 가까운 관계임에도 이렇게 어색하고 불편할 수 있는 걸까?


당시에는 '아빠는 전혀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아빠에게는 가족이 대체 뭘까?' 생각이 들며 늘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었던 거 같다.



아빠의 눈물이 보여준 진심


아빠의 마음을 늦게서나마 깨달을 수 있었던 계기가 있었다면 내가 바로 '미국으로 떠나는 날'이었다.

막상 그토록 원하던 유학의 길을 오르면서도 한편으로 가족들을 두고 가야 함에 많이 심란했던 나날들이었다.

처음 떠나는 날에는 그래도 가족들과 헤어짐보다 새로운 삶이 시작될 거 같은 기대감이 더 컸던 거 같다.


공항버스에 타기 전에 가게에 들려 인사를 하는데

아빠가 계단에서 내 손을 잡고 펑펑 울기 시작하는 거다. 표현이라고는 전혀 없던 아빠인지라 그렇게 우는 모습을 처음 보니 당혹스러움이 먼저 앞섰다. 나보다 더 아이처럼 우는 아빠의 낯선 모습에 엄마까지도 당황했었다.


이 날의 기억 때문일까? 시간이 지나면서 아빠의 그 모습이 머릿속에 박혀  서운했던 감정들이 점차 사그라들고 미안한 마음도 뒤늦게서야 올라왔었다. 나를 아끼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아빠의 마음이 뒤늦게나마 나에게 느껴진 것이다.


부모이기에 자식을 사랑하는 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충분한 표현이 없다면 자식에게도 그 마음이 전달이 될 수 있을까 싶다. 마치 내가 의심했던 순간들처럼 말이다. 아빠의 눈물을 통해 알게 된 진심이 나에게 다가온 가장 큰 진심이었다.



뒤늦게 찾아온 아빠의 사춘기


나이가 들면 남자들은 아이가 되어간다는 말이 아빠를 보면 조금은 이해도 될 것만 같다. 무섭기만 했던 아빠가 언제부터인지 웃음도 많아지고 가족들에게 시답지 않은 농담도 툭툭 던진다. 지금은 엄마보다 더 감성도 풍부해지고 우리들한테는 아빠의 마음속에 있는 하소연도 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엄마에 대한 불만이다. 최근 들어 사위까지 잡고 하소연을 시작해 내가 골머리가 아프다.


PC방을 접고 나서 억지로 아빠를 끌고 가족들끼리 처음으로 다 같이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었다. 그때만 해도 아빠의 심통이 어찌나 고약하던지 제주도에서 가족들을 버리고

혼자 서울로 오는 상상도 몇 번 했었다. 음식점에 가면 음식

맛을 평가하느냐 바쁘고, 사진을 찍으면 뭘 이렇게 많이 찍느냐 잔소리하고, 카페, 음식점마다 가격 물어보느냐

바쁜 아빠 때문에 너무 피곤해 가족여행을 후회하기까지

했었다. 엎친 데 덮친 격, 10년 넘게 밖에서 제대로 다녀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아빠 몸에 햇빛 알레르기까지 생겨

여행 이틀 차에는 밤늦게 동네 보건소를 간신히 찾아 주사까지 맞고 왔었다. 공항에서 돌아오는 날, 두 번 다시 가족여행은 내 인생에 없다며 다짐했었다.


하지만 여행이 처음이었던 아빠에게 시간이 지나고 나니 굉장히 좋았었나 보다. 그 뒤로 가족들끼리 전주에 당일치기로 짧게도 다녀왔다. 두 번 다시 우리와 안 갈 거 같았던 아빠가 이제는 먼저 여행 가자는 말도 하고 동네 카페, 맛집 등 나와 엄마, 동생들이 가는 곳에 늘 아빠도 함께한다. 과거의 아빠와 현재를 비교해보면 180도 다른 사람이라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그래도 나에게는 현재의 아빠 모습이 친숙하고 좋다.



아빠의 표현은 늘 서툴고 잘못됐었다. 그건 틀림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아빠를 이해하는 순간이 찾아왔고

그 또한 나에 대한 사랑이었음을 받아들이는 나이도 되었다. 여전히 고집스럽고 가족들의 말은 귀담아듣지 않는 지독한 사춘기가 찾아온 아빠이지만 이 모습도 아빠의 일부분이라 생각이 든다. 세상에 완벽한 부모는 없듯이 우리 부녀 관계도 여러 시행착오를 겪어 이만큼 올 수 있었던 거 같다.

이 역시도 감춰두었던 진심이 조금씩 서로에게 닿았기 때문이 아니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 부녀에게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려 관계가 회복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숨겨두었던 진심이 있다면 늦기 전에
 표현해보는 건 어떨까?




매거진의 이전글 새로운 가족이 생긴다는 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