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시청각 자료실에서 한참 자료를 찾아보다 배가 출출한지도 몰랐다. 손목시계를 보니 2시가 넘었다.
‘벌써 심리학 수업은 끝이 났겠는걸?’
삐삐에는 여러 통의 숫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1시 30분쯤에 찍혀 있는 ‘11010’.
‘흥? ’
1시 50분쯤 ‘1414’.
‘십사십사, 식사? 밥 먹자는 거군’
확인하고 있는 이 순간 막 새로운 숫자가 찍히고 있었다.
‘14141418181818’에 음성사서함에 음성까지 남겼다.
마일두가 대출에 성공했으니, 아마도 이렇게 집요하게 밥을 사달라고 육두문자(18)를 붙여가며 짜증 섞인 문자를 남겨놓은 것이리라.
‘알았다, 알았다. 커피까지 사줄게.’
마일두는 이름만큼 재미있는 과 동기였다. 현역으로 입학했기에 나보다는 1살이 어려서 말을 놓기에는 좀 억울한 감은 있었지만, OT 때부터 나이 많은 나를 꺼리긴커녕 편하게 대해주는 유일한 친구였다. 이름처럼 ‘마일드세븐’만 피는 나름 오렌지족이었고, 공부보단 유흥에 관심이 많은 친구였다.
“여기야! 지수야.”
대우다방에 도착하자마자 일두가 무섭게 내 이름을 불렀다.
“네가 아침부터 SOS를 치다니, 부지런한 네가 대출을 다 부탁하고 말이야. 어찌 됐든 기브 앤 테이크 알지?”
“너밖에 없네. 간밤에 동아리 일 때문에 잠을 못 잤어.”
대우다방 식권 한 장을 건넸다.
“다음에는 외식(?)시켜 줄게, 오늘은 그냥 짬밥 먹어.”
우리에게 외식이라고 해봐야 학교 밖 분식집 제육 덮밥 정도지만….
“하하하, 짠돌이 지수한테 식권은 20,000원짜리 일식집 초밥을 얻어먹는 것과 진배없지. 고맙다. 그나저나 동아리 일 때문이라니 꽤 동아리 생활이 재미있나 보네?”
빈속인데 마일두가 마일드세븐을 권했다. 후추 냄새가 난다는 마일드세븐 한 가치는 매국노 소리를 들어도 한 대 빨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시청각 자료실에서 확인한 내 능력 때문에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기에 담배 한 모금이 절실했지만 참았다. 진정한 뮤지션이 되기 위한 내 결심이 있었기에….
“후~. 나 메아리에서 음악을 제대로 해볼 생각이다.”
“네가? 저번에 로바타야키 갔다가 2차로 노래방 갔을 때 너 노래 들었었는데, 음악을 할 정도의 목소리는 아니었는데…. ”
그럴 만도 했다. 저번이라면 벌써 2주 전, 과 신입생 환영파티를 얘기하는 거 같은데,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란 것을 마일두는 알 리가 없었다.
“네가 제대로 한다면야, 내가 우리 삼촌한테 소개해 줄게. 우리 삼촌 홍대에서 제법 큰 클럽을 운영하시거든. 라이브 바에서 실제 가수도 공연하고 그래.”
“후, 만우절이니 거짓부렁이니? 썰렁하다. 인마! 밥이나 먹어.”
“백지수. 너 내 말을 안 믿네? 나 농담 아닌데?”
만우절 농담일 것이라고 넘기려고 했지만 솔깃한 내용이긴 했다. 그게 가능하다면 용돈도 벌고 내 눈으로 가수들도 볼 수 있을 테니까.
“기회가 되면 언젠간 내 노래를 들려줄게.”
“그래, 기회는 내가 만들어보지 뭐.”
기회를 만든다? 그 빌미로 다음에 술 사달라고 하고서는 노래방까지 나보고 쏘라고 하겠지. 시답지 않은 음주가무에 시간을 낭비할 시간은 없지만, 대충 맞장구를 쳐줬다.
“하하하하, 기회나 만들어보고 얘기해 줘, 나 이제 가봐야겠다.”
대우다방에서 마일두와 식사를 마치고는 다음 주 수업 시간에 보기로 했다. 물론 마일두가 주말에 홍대로 놀러 가자는 소리는 어김없이 했었지만, 사양했다.
내가 지금 놀러 다닐 때가 아니었다. 내 나름의 ‘노력’을 위해 다짐한 게 있었으니까. 그래서 마일드세븐도 마다했으니까 말이다.
‘아! 동방에 어제 오디션 결과가 나왔겠지….’
평소보다는 늦게 동방에 가는 것에 약간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벌써 거만해지면 안 되지. 그런 건 딱 질색이니까.’
공지된 바대로 동방 문에 대자보가 붙었다.
- ’ 94, 10주년 정기공연 보컬 및 세션표
“얏호!! 좋았어!”
예상대로였다. 독고풍이 어제 보낸 문자 ‘1472’로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눈으로 확인을 하고 나니 생각 같아서는 저 대자보를 학교 정문에 걸어두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이제 내 음악인생이 시작되는 거야!’
부서질 듯 힘차게 동아리 문을 열고 들어갈 찰나.
“억!”
갑자기 오히려 동방에서 사람들이 문을 열고 나와서 하마터면 문에 밀려 날아갈 뻔했다. 문을 밀고 나오는 동아리 사람들은 곧 어디론가 급히 뛰어나가는 것이었다.
“떴데!”
누군가 떠드는 소리에 영문도 모른 체 같이 뒤 따라 뛰어나갔다. 학교방송국 입구 중앙대자보판 앞에 메아리 사람들 외에 다른 학생들도 웅성웅성 모여 있었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의 향기로움에 취해서 그런지 4월의 대학교 교정은 유난히 밝고 찬란했다. 그 찬란함을 뚫고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1994 원천대동제 5월24일-5월26일 ’
학교를 대표하는 색, 하늘색 현수막에 감색의 커다란 글씨는 축제 시즌이 오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최근에 본 적이 없었는데 어느 틈엔가 걸려 있었는데, 그보다 더 또렷하게 눈에 띄는 건 ‘떴데’라고 말한 이유, 바로 아래에 있는 또 다른 현수막 때문이었다.
‘가요제!’
가요제, 천하제일무도회 같은 것. 대학을 가는 이유 중 하나!
정신없이 캔디눈을 하고서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틈엔가 누군가 내 옆에 와서 어깨에 팔을 감았다. 독고풍이었다.
“이번 공연 보컬이 된 거 축하해! 백지수! ”
“응, 고마워. 근데 이번 축제는 뭐가 특별한 게 있나? 사람들이 난리네?”
“응, 이번 연도는 기념할게 참 많기도 하지? 동아리도 학교도….”
“20주년?”
“응, 우리 학교 개교 20주년 기념으로 축제를 좀 크게 한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사실이네. 가요제 상금 봐봐.”
독고풍의 말대로 가요제 상금이 상당해 보였다.
대상 1,000만원, 금상 500만원, 은상 300만원, 동상 2팀 각 100만원, 총상금이 2,000만원이나 되었다. 작년에는 겨우 대상 100만원짜리 가요제였다면서 독고풍은 말을 이어갔다.
“이 참에 학교 위상을 제대로 알려보겠다는 취지인 건가? 참가자격도 경기권으로 제한하는 게 아니고 전국 대학 재학 또는 재적생이네.”
대학가요제 포스터를 직접 눈으로 본건 처음이었지만,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독고풍에게 물었다.
“원래 대학가요제 후원을 ‘기획사’가 해?”
“응? 아니. 대개 수원시나 경기도, 자치단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관공서에서만 하는 걸로 아는데. 어? 그러네? 동아시아기획? ”
그 순간이었다. 동아시아기획.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이름. 그리고 강한 끌림. 하지만 확실히 처음 들어본 그 이름이 낯설지 않다면 이는 김현석과 관련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여기 우리나라 전설적인 레코드회사인 걸로 아는데…. 그런 곳이 이런 지방 대학교 후원을 한다고? 이 정도면 본선은 방송 타겠는데?”
‘방송에 나올 수 있다고?’
동방에서 본격적인 가요제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가요제 참가신청마감은 4월 15일까지. 곡은 발표된 적 없는 순수 창작곡, 개인이든 팀으로든지 상관이 없었으며, 예선전은 5월 6일.
“아마도 스파이크스 출신 가수 류승호의 노래‘질투’가 큰 인기를 끌고 나서 자연스럽게 동아시아 기획사에 속한 류승호가 우리 학교에 제안을 한 거라는 소문이 있어요.”
스파이크스 멤버들과 친하다는 9기 이재환선배의 정보였다.
‘아! 그 ‘질투’라는 곡의 얼굴 없는 가수 류승호가 스파이크스 출신?’
내가 고3 때 열광하며 봤던 드라마 ‘질투’. 92년도 그 해 6월부터 7월 종영까지 수험생들이 공부를 포기했다는 그 전설의 드라마?
“확실하게 스파이크스가 인지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겠군. 스파이크스도 가요제에 나오겠는걸?”
9기 회장 나병수 선배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하자 이 가요제가 가수로 뜰 수 있는 첫 번째 관문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계속 시야에 맴도는 후원사 ‘동아시아기획’ 5글자.
‘왜 이렇게 가슴이 뛰지?’
그저 노래를 할 수 있게 돼서, 메아리의 멤버로서 뮤지션이 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는데, 아무렴 이제는 더 큰 욕심이 꿈틀대고 있었다.
“인지도가 무슨 소용이야. 실력으로 승부하면 돼. 이번 가요제는 전쟁이야.”
메아리의 중심, 언제 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선배가 잠자코 있다가 입을 열었다.
선배가 가요제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했다. 그렇지만 어떻게? 신입생인 나도 참가가 가능한 건가? 쎄션은? 자작곡은? 내가 작사 작곡을 해야 하나? 곡을 받아야 하나? 그럼 곡은 어떻게 쓰지? 많은 생각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무엇보다 예선 무대 만이라도 설 수나 있나 궁금했다.
“9기들 잘 들어. 참가신청까지 2주밖에 남지 않았어. 세션은 알다시피 정해져 있고, 우리는 밴드로 승부할 건데 중복 참가는 허용이 되지 않으니, 가장 승산 있는 자작곡을 가지고 세션을 정하고 참가를 하는 것으로 하겠어.”
하지만 선배는 짐짓 진지한 얼굴로 동아리 멤버들에게 가요제 참가에 관해 말을 하고 있었다. 9기라고 지칭한 것을 보면 신입생은 아예 말도 꺼낼 수 없는 분위기였다.
독고풍이 나에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번에 들어서 알지? 하지만 선배만의 락스피릿이 충만한 ‘고백’이란 락발라드. 아마도 그 곡으로 하지 않을까 싶은데….”
지금 유력한 곡은 저번 2차 오디션 때 처음 들었던 ‘고백’이란 곡이었다. 내가 봤었을 땐 그리 대단한 곡 같아 보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때였다. 지만 선배의 눈을 바라보던 나의 머릿속에 수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응? 재능지수 100?’
동아리의 중심이라 할만했다. 내 주위에서 본 뮤지션 중에서는 최고였다. 아무리 김현석의 능력치를 흡수했다 하더라도 나는 아직 하지만 선배를 넘지는 못했다. 감성 수치를 빼고는 나은 게 없었다.
‘내가 너무 자만했던 건가? 아직인 건가?’
이번에도 내 마음에 '스콜‘이 내렸다. 실망감에 이어 더 분발하라는 마음속의 외침. 노력 없이 음악 천재가 된다면 그 음악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빈틈은 내가 채워야 한다고 스스로 다시 다잡고 있었다.
오히려 내 감성지수가 재능지수에 거의 근접하고 있다는 것이 또 다른 좋은 징조가 아닐까? 순간 기쁨이든, 슬픔이든, 분노이든 그것을 밖으로 끌어내는 진정성. 재능을 제대로 끌어내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지만 선배가 그 재능을 감성으로 잘 발현시키지 못하는 거라면 그래서 감성지수가 나보다 낮은 거라면?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위로가 되는 것 같았다.
용기를 냈다.
“하지만 선배님. 신입생도 가요제에 참가할 수 있나요?”
지만 선배의 수치가 어떻든, 지금은 동아리의 중심은 지만 선배였다. 가요제 참가 또한 그의 손에 달려 있었다.
“신입이? 뭐 좋아.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보컬로 참가 가능해.”
“정말 이십니까?”
‘보컬로 가능하다면? 이거 완전히 열심히만 하면 되는 건가? 너무 쉬운데?’
“하지만... 지수야”
역시나 내 당돌한 질문에 제동을 걸기 위한 하지만 선배의 ‘하지만’ 논법이 시전 되는 순간이었다.
“네가 저번에 보여준 보컬 감성은 정말 멋지긴 했어. 하지만 내가 추구하는 보컬 색깔과는 달라.”
여지없이 진입장벽을 쳐주시는 하지만 선배였다. 노래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니었던가? 락스피릿이 충만한 락발라드라면 얼마든지 내 창법을 바꾸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선배는 내 생각을 읽었는지 재빨리 한마디를 덧붙였다.
“작곡자가 선호하는 목소리라는 게 있는 거니까. 그리고 우리 동아리는 작곡자의 의견을 가장 우선하지.”
‘작곡자의 의견?’
너무나 당연하고 공평한 진리. 또 다가온 잔인한 현실. 나는 이제 막 노래를 부를 줄 아는 사람이 됐는데, 선호하는 보컬색이 있다고? 인정해야만 했다. 내가 모창가수도 아닌데 목소리를 자유자재로 바꿔서 작곡자의 비위를 맞춘 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내고 싶은 건 내 목소리니까.
이대로라면 나는 20주년 가요제에 나갈 길은 없었다.
왜냐하면 하지만 선배의 재능 지수를 보고 미루어 짐작해 보면, 직접 가요제에 나갈 꿈을 꾸고 있을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보컬 가요제 본선 참가의 명운을 한 낱 신입생에게 걸겠는가 말이다.
내가 그 입장이 돼도 내 노래에 신입생을 쓴다는 것은 너무 무모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참가하는 데에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본선까지 나가야 할 실력을 보여줘야 한다면….
또 실망. 지금 느끼는 절망감을 이겨낼 만한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포커페이스를 못하는 나의 표정을 보았는지 독고풍이 심드렁하게 툭 거들었다.
“정 나가고 싶으면 네가 작곡자가 되면 되겠네. 소주 뎃 병 갖다 놓고….”
‘작곡자가 되라고?’
아무 생각 없이 낄낄대며 농담처럼 말했던 독고풍. 내 동공이 확장되는 것을 보고는 다시 급속도로 표정이 굳어가는 것이 보였다.
“아! 그러면 되겠네! 풍! 넌 천재야!”
독고풍의 주문대로 나는 '작곡'이란 걸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