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제를 위하여

세일즈맨의 아내에 관하여

by 피터팬신드롬

‘마눌님은 자고 있겠지?’


새벽 2시. 선을 넘은 지 2시간이 지났다. ‘신데렐라’에 따르면 나는 노란 호박으로 변해있어야 할 터.


‘삑삑삑삑삑삑 띠로리’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숙취 나는 입을 틀어막고 조심스럽게 철문을 당겼다.


“이크!”

현관센서는 주책맞게 번쩍 켜졌으나 중문 너머 거실은 어두컴컴해서 안심하는 찰나….


거실에서 음산한 기운의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순간 이어폰을 하고 있는 건가 귀에 손을 가져가 봤으나 이어폰은 없다.


이건 분명히 거실에서 들리는 소리다.


‘엘리제를 위하여’


깜깜한 거실 전자피아노에서 들리는 연주곡이다. 중간에 음이 빗나가는 걸 보니 이건 마눌표 엘리제가 맞다.


“여보?”

“………”


계속 울려 퍼지는 피아노 연주소리. 얼음같이 서서는 불러본다.


“여보~?”

“………”


이내 뚝, 연주소리가 끊겼다.

스르르 일어나 뒤돌아보지 않고 안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그림자. 정확히는 아내 그림자. 그리고는 딸깍 방문 닫히며 손잡이 배꼽이 눌려지는 소리….



잔소리가 차라리 낫지, 술자리 한번 가졌다가 무슨 저주에 걸린 듯했다. 아내는 정확히 3일 동안 내 카톡도 안 읽고, 말도 안 붙였으며, 눈길도 주지 않으셨다. 침묵이라는 고문은 역시 강력하다.




세일즈맨의 아내는 도량이 넓어야 한다.

특히 세일즈맨의 피를 자기 피라 착각하는 Born to be Saleman의 경우라면 정말로 그 노고는 이루 말할 수 없(을거)다. (난 절대 태생부터 영업맨은 아니다.) 제시간에 퇴근하면 집에 와야 하는 것은 당연한데, 고객에게 그 기회를 뺏기는 경우가 허다하기에 아내는 외롭다. 그럴 때마다 사과 받을 수도 없고, 그냥 불가항력이어서 아내는 외롭다.


나도 안다. 뼈저리게 안다. 하지만 어쩌랴, 멀쩡할 때에는 고객 설득이 안 되는 걸….


술자리에서는 술기운 앞에서 대동단결!

적이 아군이 되는 놀라운 일들이 가능해지고, 불가능한 게 가능해지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했으니까.

내 매출의 전부가 그렇진 않더라도 대표 비기(祕器)는 폭탄주와 콜라보를 해야 제 힘을 발휘하는 걸.

밑천이 팔팔한 이 간의 힘을 빌어야 물 들어왔을 때 노라도 저을 수 있는데, 조금만 이해해 주면 안 되나 말이다.


비비꼬이는 곰장어를 잡아 잔뜩 나온 곱에 스며든 연탄불 훈연의 향을 소주와 함께 들이키며, 이것도 일이라고, 알코올인지 일인지 모두 중독이 돼버리는 것 같았다.


아내는 12시에는 내 신발이 현관문 안에 들어와 있어야 한다 했다.

그것은 마눌님이 정해준 ‘선’이었다.


안다! 당연히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인 걸 안다. 날이 넘어가는 외박의 선.


그런데 술을 마시면 선에 대한 지각은 전두엽에 있다가, 대뇌에서 잠깐 흘러서 소뇌에서 뒹굴다가 척수 끝에 매달려 소주와 함께 목구멍 저 밑으로 넘어가 버리는 거다. 이쯤 되면 알코올성 치매.



4일째 침묵 시전하고 있는 마눌님.

설거지 중인 뒷모습이 애처롭다.


그 뒷모습은 이마트 라면 시식 코너에서도 봤었다. 먹깨비 남편 라면 한 젓가락 먹여보겠다고 줄 서있는 뒷모습이 무척 애처롭고 귀여웠다. 괜스레 미안하기도 했다.


반면에….

베트남 여행 갔었을 때, 오렌지색 하늘 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전통 시장에서 유채색 홍등을 바라보는 뒷모습이 한 폭의 이쁜 엽서 같았던 눈부신 여인의 뒷모습도 우리 마눌님이었다.


세 가지 뒷모습이 내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설거지 하는 내 아내의 뒷모습이 내 눈앞에 있다.


케케묵은 세일즈맨의 영업방식으로 아내의 뒷모습이 외롭다.

고리타분한 세일즈맨의 개똥철학이 엘리제를 위하여라는 명곡을 장송곡으로 만들어버렸다.


결론은, 내 피로한 간과 내 아내와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나아가서는 침묵의 고문을 더 받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야.


바꾸자! 영업방식을!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