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21
인간의 몸이란 얼마나 나약하고 부서지기 쉬운가.
우리의 몸은 수 억 개의 세포가 각기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과정을 통해서 유지되고 지속된다. 그토록 복잡하고 예민한 유기체로 구성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모든 복잡과 예민이 조화롭고 균형 있게 유지된다는 것 자체가 놀랍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체의 활동을 '신비'라고 말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런 신비의 조화는 어느 한 군데의 작은 균열이라도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의미하고, 그런 균열의 발생은 전체 유기체의 활동에까지 영향을 미치기에 이른다. 우리가 평상시에 당연하게 생각하는 건강한 신체란 그 균열을 맞닦드렸을 때, 그러니까 어디 한 군데라도 문제가 생기면 그 소중함을 절감하게 된다.
며칠 전 갑자기, 느닷없이 배가 아프기 시작하더니 가게를 쉬는 휴무 내내 화장실을 전전하며 하루 종일 누워 곤욕을 치루었다. 뭘 잘못 먹은 것도 아니고(먹는 데에 유난히 조심하는 편이라), 과식을 한 것도 아닌데(평소 소식하는 편이라), 매일매일 무리 없이 해 내던 소화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몸의 균열을 체험하며 새삼스럽게 소화기능에 대한 소중함과 고마움을 느낀다. 그렇다. 사실 몸이 제 기능을 제대로 해주는 건 당연한 '권리'라고 할 수는 없다. 몸의 모든 기능이 제대로 작동되기 위해 내가 기여한 바는 전혀 없고(태어날 때부터 그랬으니), 그런 타고난 몸의 정상 기능들을 잘 유지 관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의무'겠지만(선택의 문제일 수도), 그렇다고 어느 날 몸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을 때 그것을 탓하는 건 '권리'는 아닌 것이다. 탓한다고 했을 때 그 대상을 찾기도 어려울뿐더러(대개 부모를 탓할 수도 있겠지만 유전이란 부모가 의도한 바가 아니지 않은가), 행여나 '신(神)'과 같은 존재를 상정해서 탓해본다 한 들 그것이 신의 잘못이라 하기엔 지나친 책임 전가라 할 수 있다. 애초에 신이 나의 몸의 균형을 제대로 유지해 주기 위한 의무를 가진 존재인가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는 의문이고, 어찌 보면 신이란 존재는 그런 천재지변(몸이 갑자기 아픈 것도 천재지변이 아니겠는가)을 탓할 누군가가 필요한 탓에 만들어진 그 '누군가'가 아닌가 싶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고 갑자기 이유도 없이 아픈 몸을 그저 받아들이자니 무력하고 화가 나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또 그렇다고 내 몸의 허약함을 탓해 보아도 몸이 무슨 잘못이겠나 싶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평소에는 너무도 그 복잡함을 잘 유지해 내는 고마운 존재 아니겠는가, 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지기도 한다.
먹는 걸 신중하고 조심하게 선택하고 몸이 제대로 기능하도록 돕기 위해 운동으로 에너지를 북돋아주는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겠지만, 결과적으로 몸이 잘 작동하지 않는다 해도 어쩔 도리는 없다.(물론 심하면 병원에도 가보곤 해야겠지만) 게다가 노화나 죽음 같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찾아오는 기능 저하와 소멸을 인간의 힘 따위로는 막을 수는 없다. (늦춰볼 수는 있다 하여도, 건강하지 못하면 또 늦추는 게 어떤 의미가 있겠나 싶기도 하다만)
평소에 잘해주던 간단한 소화 기능 하나 제대로 해 내지 못하는 몸 상태가 야속하여(실제로는 간단한 과정은 아니겠지만) 이틀을 누워 있으면서 별의별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지만 그냥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결론에 도달하며 자포자기하는 때 즈음에, 몸은 다시 회복기에 들어섰고 소화하기 편하라고 죽을 쑤어 먹여보았더니 평소의 정상성에 가까운 소화력을 보여주고 있다.(물론, 약간의 삐걱대는 불편함은 있지만) 그리고 그런 회복기에 접어드니 내 위와 장이 얼마나 고맙고 기특하게 느껴지던지. 아파보니 건강의 소중함을 알게 되더라는, 흔한 말의 위력을 깨닫는 순간이다.
곧, 몸은 완전히 정상화될 테고 그렇다면 다시 매일 하는 그 소화력에 더 이상 감사하지 않으면서 잊어버리고 말 테지만 그래도 감사하는 마음의 힘은 조금은 더 늘어있겠지. 그리고 그렇게 '정상'이라는 몸의 신비를 위해 힘을 더 보태보고자 하는 노력이 조금은 더 늘어나겠지. 그렇게 복잡하지만 예민하고, 허약하지만 신비롭게 지탱하는 이 몸과 더불어 잘 살아가야만 그토록 좋아하는 책도 읽고, 생각도 하고, 대화도 하고, 글도 쓰는 일상의 소중함을 유지하고 지속해 나갈 수 있겠지. 그렇게 순간순간을 몸과 함께 잘 살아갈 때, 언젠가 닥칠 몸의 기능 소멸을 겸허하고 순순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