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인터넷 유행어라는 건 시대의 세태를 반영하며 특히 기성세대에 대한 비판적 함의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아 그저 웃어넘길 수만은 없다. 왜 그런 말들이 생겨났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진지충이란 유행어에 대한 이런 진지충 같은 태도라니) 하지만 한편으로는 비판받는 대상뿐 아니라 비판하는 주체의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는 있을 텐데(비판이라기보단 비난조에 가깝지만), 이 '진지충'이라는 단어는 그 발화자의 문제라는 점에서 비판해보고 싶다.(자, 꼰대가 되어보자)
몇 년 전 개봉한 헐리웃 영화 중에 [돈 룩 업 (Don't Look Up)]이라는 작품이 있었다. 비판적인 관점에서 정치, 사회 문제를 다루는 아담 맥케이(Adam McKay)라는 감독의 작품인데(벌써부터 진지충의 스멜이...), 화려한 출연진을 자랑하는(디카프리오, 제니퍼 로렌스부터 케이트 블란쳇, 티모시 살라메, 메릴 스트립까지..) 이 영화의 아이디어는 대략 이렇다. 어느 천문학자가 지구로 날아오는 혜성의 존재를 알게 되고 충돌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백악관에 알리고 뉴스에까지 출연하지만, 다들 그 사실의 심각성을 회피하고 농담 소재로만 여기며 웃고 넘긴다는 이야기다. 심지어 충돌할 시에는 지구 멸망을 막을 수도 없는데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소재여서 예전 같으면 절대로 영화화되기 어려웠겠지만 지금은 헐리웃의 명망 있는 감독이 대배우들을 섭외하여 야심 차게 영화화가 되었다. 그러니까 재난 영화가 한창 유행하던 예전 같으면 이런 이야기는 지구에 닥친 위협의 심각성과 전 세계인의 경악, 그리고 영웅의 등장과 함께 가까스로 위험을 모면하며 역시 전 세계인의 박수를 받는 그런 전개로 펼쳐졌겠지만, 이 영화는 '이제 그런 심각한 이야기는 사람들이 더 이상 좋아하지 않아'라는 걸 잘 아는 듯, 재난 영화를 아주 다르게 풀어간다. 영화 속 천문학자는 심각한 표정으로 이 심각한 사태를 심각하게 경고하지만 아무도 그 심각성에 귀 기울이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방법이 없어 뉴스에도 출연하여 고발해 보지만 뉴스에서마저도 토크쇼처럼 농담 소재로 활용할 뿐이다. 그러니까 심각하게 얘기할수록 사람들은 오히려 가벼워지는 것이다.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자 주인공은 같이 농담으로 희화화하여 이 사실을 전달해 보려고도 하지만 그 마저도 소용이 없자 어느 순간 폭발해버리고 만다. (이때 생방송 중 디카프리오가 절규하는 대사는 꽤나 의미심장하다)
영화의 참신함을 떠나 여기서 중요한 건, 이런 말도 안 되는 소재가 영화화가 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다. 그러니까 이런 해괴한 소재가 심지어는 꽤나 공감이 된다는 바로 그 지점인 것이다. 지구 멸망이 바로 코 앞에 닥쳐도 사람들은 들으려 하지 않고 지구로 날아드는 혜성이 하늘을 뒤덮어도 사람들은 올려다보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제목이 '돈 룩 업'이다) 사람들은 진지하고 심각한 건 싫고 가볍고 재미있는 것만을 원한다.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컨텐츠에 대한 기대는 특히 그렇다.(그것이 '뉴스'일 지언정) 지구가 멸망해도 그건 내 문제가 아니고 누군가 알아서 해야 할 일인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며 나는 이런 태도를 딱 꼬집어 말해주는 대한민국의 인터넷 용어, '진지충'을 떠올렸다. 혹은 '설명충'도 있겠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디카프리오는 진지충과 설명충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분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고발한다. 현실을 알고 싶지 않고 보고 싶지 않아 하는 태도, 재밌는 것만 보고 기분 좋은 것만 받아들이려는 여과적인 감각, 그것이 어떤 사회적 현안에 대한 논의와 여론에 미치는 심각성을.
물론 영화는 과장되어 있지만, 과장이라 해도 이 영화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생각이 드는 건 그만큼 지금 사는 이 사회가 진지한 것을 싫어하고 오직 재미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만연하기 때문이다. 물론 재미있는 일을 찾고 인생을 즐기는 태도야 필요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사는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문제점을 밝혀내고 해결책을 고민해 보는 '진지한' 노력은 필요하다. 현실이란 것은, 그 자체로 너무도 많은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히고 꼬여 있어 현실에서의 문제를 풀어내려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도 모를 정도로 머리가 아픈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이 어떤 지를 알고자 할 때 우리는 진지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비롯되는 그런 문제들이란 대개 그 고통과 상처의 정도가 크기 마련이므로 한숨이 푹푹 쉬어질 만큼 심각하거나 우울해지는 기분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들여다보아야 하므로 우리는 그런 기분을 감당하면서 진지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방법들이란 것 또한 역시나 마찬가지로 어려운 개념들이 복잡하게 얽히는 경우가 많아, 그 해결책이 얼마나 효과적인가의 여부를 떠나 그 해결책 자체를 이해하는 데만도 많은 생각과 고뇌의 과정이 요청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현실의 문제를 말할 때는 진지한 태도가 될 수밖에 없고 길고 어려운 말로 설명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너무 심각하고 지루하다는 이유만으로 외면된다면 우리는 결국 우리가 어떤 현실 속에서 살고 있는지 알지 못하게 되며, 그 가운데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과 실천에 대해서는 더더군다나 무관심하게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아 몰랑, 내 알 바 아님'이 되는 것이다.
요즘은 현실의 어떤 문제에 대해 누군가의 얘기를 듣게 될 때 화제를 꺼내 설명하는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듣지 못하고 이렇게 되묻곤 한다. '아니, 그러니까 그래서 뭘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 결론만 말해' 그리고 그 결론을 듣고는 그것을 내가 할 수 있는지 아닌지, 하고 싶은지 아닌지, 나에게 이득이 되는지 아닌지만 판단하고 잊어버리고 만다. 그렇게 되면 문제점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그 결론이 어떻게 도출됐는지도 이해하지 못하며, 따라서 결론에서 말하는 실천에 대해서도 그 적합성을 판단하기보다는 그저 나의 편의와 혜택의 관점에서만 취하게 되므로 그것은 '선택'이라기보다는 그저 기분에 따라 고른 것에 불과하다. 마치 메뉴판에서 된장찌개와 김치찌개를 고르듯, 짜장과 짬뽕 사이에서 고민하듯. 하지만 우리가 사는 사회의 문제에 대해 우리가 선택할 때, 김치찌개와 된장찌개 고르듯, 짜장과 짬뽕 사이에서 고민하듯 고를 수는 없지 않겠나. 우리의 현실을 좌지우지할 만큼 중요한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을 뽑을 때도 그럴 수는 없지 않겠나. (우리는 그 결과를 지금 참담하게 매일매일 목도하고 있다)
사실 무언가를 말할 때 너무 진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왕이면 귀에 쏙쏙 들어오게, 내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쉽게, 농담도 섞어가며 얘기하면 더 좋을 것이다. 예전에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훈계할 때 그런 진지한 태도로 근엄하게 말하며 길게 잔소리를 늘어놓아 그에 대한 반발로 생긴 말이 '진지충', '설명충'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지한 것은, 심각한 것은 무엇이든 거부하는 태도는 결국 '주체로서의 나'를 거부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리고 내가 당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내가 감당해야 하는 모든 피해와 불이익에 대하여, 내게 닥칠지도 모르는 재앙과 폭력에 대해서도 나는 어떤 적극적인 태도와 행동도 취할 수 없게 된다. 그때 가서 (내가 미처 알지도 못했던) 환경 탓과 남 탓을 해봐야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미리 방지할 수도, 피해 갈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무기력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지금의 인류는 정치, 경제, 사회, 환경... 등의 모든 분야에서 모든 것들이 붕괴되고 있는 광경을 역시나 진지하지 않게, 마치 농담하듯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진지충이 되지 않기 위해, 유쾌하고 스마트한 사람이 되기 위해 나는 오늘도 이렇게 되뇌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