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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우산 Jul 24. 2023

투정의 글

20230724

오늘 부대찌개를 해 먹었다.


평소 건강을 챙기는 습관 때문에 인스턴트 음식이나 의사들이 비권장하는 재료들은 기피하는 편인데,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메뉴들이 몇 가지 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부대찌개. 대신 먹는 주기를 정해 놓는데 부대찌개는 1달에 1번 이하로 정해 놓고 있다. 이번에는 정말 오랜만에 해 먹는 부대찌개라(아마도 3달 정도 된 것 같다), 작심하고 맛난 햄과 소시지를 사다가 듬뿍 넣어서 끓였다. 올 초에 김장해 놓은 김치와 국물도 넣고 간돼지고기도 넣었다. 물론 설탕과 조미료도 빠지지 않는다. 이럴 땐 이것저것 다 넣어서 폭발력 있는 맛을 내는 게 중요하다. 건강이라는 개념은 철저히 넣어둔다. 이런 음식을 먹으면서 건강을 염려하는 것만큼 어설픈 일도 없다. 마요네즈는 하프로 먹지 않고, 우유도 저지방은 먹지 않으며, 콜라도 제로는 싫다. 대신 먹는 빈도를 낮춘다. 식도락에 있어 나에게는 그것이 나름 건강과 맛을 모두 지키는 방법이라면 방법이다.


치즈와 라면사리도 넣었어야 했지만 그건 자제했다. 건강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소시지의 훈연의 맛에 집중하고 싶어서였다.(이번엔 훈연된 소시지를 샀으므로) 오랜만에 먹어 보는 스팸도 오리지널의 그 느끼하고 꾸덕한 맛을 원했다. 재료들을 다 때려 넣고 보글보글 1시간을 끓였다. 햄과 소시지만 있다면 부대찌개는 얼마나 쉬운 요리던가, 육수조차 필요 없고 야채도 없으면 안 넣어도 그만이다. 그리고 뭐든 찌개는 오래 끓여야 맛있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는 터라 일단 불 위에 올려놓고 1시간은 기다린다. 찌개는 육류의 육수와 지방이 충분히 우러나와야 국물이 그만큼 감칠맛이 더 진해지고 지방의 고소함이 국물에 베인다. 1시간은 긴 것 같지만 그동안 아침 공부를 하고 있으면 시간은 후루룩 흘러간다.


소시지와 김치, 국물을 같이 떠 첫 입을 베어무는 순간, 입안 가득 차는 국물의 감칠맛과 소시지를 씹을 때마다 베어져 나오는 기름과 육수의 진한 맛이 온몸의 세포를 흔든다. 오래 기다려 온 맛이라 그 순간의 기쁨이 아직도 입 안을 맴돈다. 오래 기다리고 참은 보람이 있다. 이토록이나 맛있다니. "맛있다!"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그리고는 연이어서 나오는 말이 있다. "왜 맛있는 건 건강에 안 좋을까", "왜 이런 걸 만들어 놓고 먹지 말라고 하는 걸까"


세상엔 왜 이렇게 참아야 할 것이 많은가



그런 탓을 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어디 부대찌개뿐이겠는가, 세상에 참아야 하는 것들이. 음식만 해도 수 백 가지 안 좋은 재료들이 즐비하다. 음식이야 이렇게까지 참을 필요는 없다고 하더라도 음식 말고도 참아야 하는 것들은 주변을 둘러보면 널려 있다. 사고 싶은 것들은 왜 또 그렇게 많은 건가. 그리고 산다 한들 더 새롭고 예쁜 것들은 끊임없이 내 눈앞에 아른거린다. 가보고 싶은 여행지들은 끊임없이 사진과 영상으로 스크린에 둥둥 떠다닌다. 하지만 그에 비해, 나를 성장시키고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준다는 것들은 왜 다들 그렇게 힘겹고 어렵고 오래 걸리는가. 그토록 맛있는 라면은 순식간에 사라지는데, 책 1권을 제대로 읽으려면 도대체 몇 시간을 쏟아부어야 하는가.


이런 어린아이 같은 투정을 아무리 해봐야 바뀌는 건 없다. 얼마나 내가 유혹에 나약한 인간인지를 확인하는 처절하고도 지겨운 결론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세상은 이토록이나 불공평하기에, 이런 투정이라도 해 볼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투정하는 일을 글쓰기로 대신해 본다면 그건 또 건강한 스트레스 해소 아니겠는가. 그러니 오늘은, 이 글을 읽고 있을 누군가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저 투정으로 글을 채우고 마무리해보려 한다. 그러니까 투정을 위한 투정의 글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도 참는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그토록이나 하기 싫은 팔굽혀 펴기를 하고 조깅을 하며 땀을 뻘뻘 흘리겠지. 건강한 식사를 위해 야채를 씻고 다듬어 반찬을 만들겠지. 하루에도 열두 번씩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명상을 하고, 마음의 그릇을 넓히고 지식의 탑을 쌓으려 한 글자 한 글자 책을 읽어나가겠지. 청소를 하고 진열대를 정리하며 손님들을 웃으며 환대하고 설거지를 끝도 없이 하겠지. 그렇게 한 두 달을 보내다가 어느 날 마트에서 스팸과 소시지를 잔뜩 사들고는 함박웃음을 띠며 내일 먹을 부대찌개의 짜릿한 맛을 상상하겠지.


이렇게 늘어놓고 보니, 인생이란 참 고달프구나 싶은 생각에 뭔가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유혹을 이겨내고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하고 견디며 지켜낸 끝에 얻어지는 작은 선물과도 같은 일상, 별 탈 없이 건강하게 평화롭게 흘러가는 그 일상을 흐뭇하게 만끽할 수도 있겠지.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작고 소박한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의미 있는지를 문득 깨닫고 만족할 날도 가끔 있겠지. 부대찌개의 짜릿한 맛 같지는 않더라도, 그보다는 훨씬 더 고양된 영혼의 충족감일 수 있겠지. 일상의 고요와 평화의 참 맛을 알게 될 날이, 언젠간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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