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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우산 Dec 22. 2023

나는 옳아

20231222

극과 극이 공존하는 요즘 시대의 진기한 풍경은 여러 가지 영역에서 자주 관찰되는데 '지적질'과 '지적에 대한 거부반응' 또한 그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요즘엔 사람들이 타인의 다른 무언가에 대해서는 지적하고 평가하기를 참으로 즐겨하는데(겉으로 드러내든 속으로만 생각하든), 반대로 지적과 평가를 받는 것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민감해하고 거부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지적질과 평가질이야 인간이 본래부터 좋아하는 행동이고(옆에서 바둑을 두면 훈계하고 싶어 하듯이), 거꾸로 누구든 지적받고 평가받는 건 당연히 싫어하겠지만 문제는 그것의 범위와 정도에 있다.


인간이면 누구나 지적을 좋아하고 지적당하는 걸 싫어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지적하고 평가하는 일은 원래 그럴 만한 위치 또는 역할에 있거나(직장 내 직급과 같이) 혹은 그럴 만한 자격 또는 전문성을 가지고 있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경우(의사는 건강에 대해 지적할 자격이 있다)에 행해지는 일이었다. 여기서 지적하는 사람의 위치와 자격의 적정 여부를 논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테지만 래도 예전에는 그런 가정이 어느 정도는 서로 인정되고 통용되는 편이었다. 하지만 권위주의가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로 폄하되고(그건 바람직한 현상이겠지), 전문성이 특정 직업인이나 계층에 한정되지 않고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능력으로 인정되면서(이 또한 바람직한 현상일 것이다), 지적과 평가는 그 누구도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그것에 자격과 권위가 특별히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지적과 평가의 대중화가 일어나게 되었다.(그렇다고 이런 현상이 바람직한 일까)


권위주의의 폐기, 전문성의 확산 경향과 함께 누구나가 지적과 평가를 할 수 있다는, 일종의 자격 같은 것이 주어지게 되었고(실제로 오디션 프로그램에선 '국민 프로듀서'라는 말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사람들은 지적과 평가에 좀 더 용감하고 과감해지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용감'과 '과감'에 있다. 어떤 특권 계층만 다른 사람을 평가할 수 있다는 자격과  권위의 벽이 무너진 것은 바람직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과연 바람직한가 확신은 들지 않지만), 타인을 지적하고 평가하려면 자격과 권위는 아니어도 '실력'은 갖추고 있어야 할 텐데 문제는 그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사람이 타인을 지적하고 평가하는데 너무도 용감하고 과감해졌다는 데 있다. 게다가 인간은 본래 지적과 평가를 좋아한다는 본성, 즉 우월감에 대한 욕망이 더해져 지적과 평가는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일상 속에서 확산되어 갔다. 일상 속 지적과 평가는 내가 상대보다 '높아진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그 적용의 범위와 강도가 점점 더 세지고 있다.


이렇게 지적과 평가가 난무하는 일상을 살다 보니 나는 지적과 평가의 '주체'가 될 수도 있겠지만 거꾸로 타인의 지적과 평가에 언제든지 노출되는 '객체'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지적과 평가를 당하는 일에 지쳐가다 보면 당연히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지적과 평가에 갈수록 민감해져 가는 경향의 원인일 수 있겠다. 하지만 지적과 평가에 민감해지는 이유가 단지 그런 측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제든지 내가 지적과 평가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그 가능성, 즉 내가 더 우월한 역할을 하고 싶다는, 혹은 할 수 있다는 그런 가능성 쪽에 더 욕심을 내게 되기 때문에 객체의 역할은 더욱 거부된다. 그리고 그런 욕심이 커져가다 보면 내가 나 스스로에게 '그럴 만한 자격과 권위'를 부여하게 되고 그리고는 어느새  '지적과 평가의 주체'라는 왕좌에 자신을 스스로를 앉히게 된다. 결국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비약적으로 이런 생각을 은연중에 품게 되는 것이다.


나는 (절대적으로) 옳다


그리고 이런 나의 옳음에 대한 믿음은 어떤 경우에도 통용되는 '절대적'인 가치가 된다.


이런 믿음은 자신감이라기보다는 어떤 판타지에 가깝다. 자신감이라 한다면 노력과 훈련의 오랜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는 나 스스로에 대한 믿음 같은 것일 텐데(이런 자신감의 경우는 대개 겸손함의 태도로 드러난다), 절대적 옳음으로 상정된 '나'의 경우에는 우월한 위치에 나를 올려놓기 위한 욕심의 발로이기 때문에 어떤 노력과 실력의 근거를 탄탄하게 가지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런 실력이 있다 해도 대개는 얄팍하기 그지없거나 혹은 실력이라 할 만한 통찰이 전혀 없는 경우도 다반사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그러니까 실력을 쌓기 위한 오랜 시간의 고통과 인내를 거쳐온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토록 쉽게 스스로에게 절대적 왕좌를 부여해 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 실력을 쌓은 사람들일수록 자신의 부족함을 더 절실히 느끼기 마련이다)


뭐든 잘 모르는 사람들이 더 잘난 체를 하는 법이다. 그렇듯이 실력이 없는 사람들일수록 남을 평가한다는 것의 무게와 어려움을 실감하지 못하고 쉽게 생각하곤 한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지적과 평가를 할 수 있는 자격, 즉 '실력'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그런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걸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을 욕망함으로 굳이 자격이나 실력 같은 골치 아픈 것은 따지지 않으려 드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우월한 위치가 절대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신을 '절대적으로 옳은' 위치로 올려놓게 다.


자, 다시 돌아와서 요즘같이 지적과 평가에 노출되기를 극단적으로 거부하는 현상은 단지 그것이 본래 불편한 감정이기 때문만은, 혹은 너무 많은 지적과 평가에 노출되어 왔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내가 지적과 평가를 당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옳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과 부딪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우월한 위치를 점유하고자 하는 욕망, 혹은 그래야 한다는 집착의 발로일 수도 있다.


우월한 위치에 있고자 하는 그 안간힘, 그것은 타인과 타인의 결과물을 보는데 인색하고 부정적이 되는 경향을 낳기도 하고 자신을 과대평가하여 판타지 속에 살게 하는 망상을 낳기도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차근차근 한 발 한 발 한 단계 한 단계 기본부터 쌓고 올라가 고통과 인내의 오랜 시간을 거쳐 실력을 형성하려는 끈기를 애초부터 잃게 하는 힘이 있다는데 가장 큰 위험이 있다. 그러니까 내가 나 자신을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자'로 만들며, 노력하지 않아 실력이 쌓이지 않으므로 그 본모습을 감추기 위해 더욱더 우월해 보이려는 제스처(이것이 지적질과 평가질의 본질이다)에 집착하는 악순환의 닫힌 고리에 자신을 가두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광경이다. 그러니 지적과 평가 전에는 내가 그럴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한번 더 생각해 보는 신중함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지적과 평가에 노출되었을 때는 상대가 그럴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해안과 함께 때로는 지적과 평가를 겸허히 수용하는 열린 자세도 같이 갖추는 여유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여유야말로 오랜 시간의 고통과 인내를 건너온 실력자의 자신감만이 갖출 수 있는 어른다운 태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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