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힙한 방황

노아 바움벡, [프란시스 하]

by 빨간우산
I'm not a real person yet.


'뉴욕을 배경으로 한 힙스터들의 청춘과 방황을 그린 영화'라고 소개할 수는 있겠으나, 이 영화는 '청춘과 방황'이라는 두 단어로 뭉뚱그릴 수 없는 시대상과 디테일이 있다. 그러니까 그냥 청춘이 아니라, 힙한 아이들의 있어 보이는 방황이다. 좀 더 디테일하게 들여다볼까. 있어 보이려는 '척' 하느라 정작 찾아야 할 것을 잃어버린 무위한 방황이랄까. 아니 그 'let it be'의 무위가 아니라, 정말로 무언가를 잉태하지 못하는 무위 말이다. 무위라기보다는 '허위'가 더 적절한 단어려나.



허공에 대고 있는 힘껏 팔을 휘휘 저었는데, 손에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그나마 '있어' 보이지도 '힙'하지도 않다.(영화는 시종일관 주인공의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보여주느라 바쁘다) 돌아오는 건 또래 아이들의 핀잔뿐. 하지만 그들의 핀잔도 맥락은 다르지 않다. 또 다른 허위일 뿐. 허위가 허위를 핀잔한다. 모두 있어 보이려는 몸짓 속에서 헤매지만 정작 무언가를 해야 할 땐 철저히 혼자다. 그러니 다시 뉴욕의 거리로 나갈 밖에. 혼자 질질 짜려고 뉴욕에 온 건 아니니까 말이다.


뉴욕에서 힙스터로 산다는 건 생각보다 힘겹고 치열하다. 감독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드라이하게 말이다. 훈계하거나 경고하지 않는다. 거리를 두고 평가하지 않으며 쿨하게 그저 보여준다.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어때, 이게 너희들이 말하는 힙한 거 아냐?"



노아 바움벡은 뉴욕의 힙스터를 힙하게 한 꺼풀 벗겨낸다. 그리고 그렇게 벗겨낸 힙한 청춘들의 속내는 안타깝게도 하나도 힙하지 않다. 대놓고 드러내진 못했지만, 찌질함에 가깝다. 그들은 자신들의 찌질함을 쿨하게 인정하는 태도로 무마해 보지만, 결국엔 그 찌질함을 대면하지 않고선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프란시스는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뉴욕의 청춘이다. 직업도 무용수다. 그러니까 뉴욕에서 예술하는 힙스터의 대열에 합류할 조건을 갖춘 셈이다. 하지만 왠지 그녀는 조금씩 몰락하고 있다. 안간힘을 쓰지만 현실은 견고하다. 동료들은 말한다.


"너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 이런 건 가난도 아니야"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투 같지 않은가. 그렇다. 직장 상사의 단골 멘트. 그들도 어쩌지 못한 현실의 벽을, 그들은 이런 식으로 외면한다. 외면하고 외면하고 또 외면한다. 서로에게 핀잔을 주어가며 잠깐의 우쭐함에 취해도 본다. 그리곤 또 서로 외면한다.



영화 속에서 프란시스는 여기저기 부유한다. 이 친구 저 친구, 이런 일 저런 일, 이 집 저 집을, 옮겨 다녀 보지만 마땅히 내 것이다 할 만한 건 없다. 고향에도 가보지만, 그곳에도 나의 삶은 없다. 그러니까, 뭐든 "진짜로 하고 있지" 못하다는 걸 그녀는 알게 된다.(어쩌면 영화가 흑백이라는 것은 그런 진짜이지 못함을 드러내는 장치가 아닐까) 그리고 떠난 파리 여행은 그야말로 허위와 부유의 끝으로 마무리된다. 그 아름다운 파리의 풍경을 뒤로하고 하릴없이 걷다가 세느강 어느 다리에 이르러 담뱃불조차 붙여지지 않는 헛도는 라이터의 부싯돌을 연신 돌리는 장면은 가히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다. 그리고 영화는 전환점을 맞는다. 몰락은 바닥을 보였고,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다.


니체가 말했던가, 인간은 몰락해야 한다고. 그렇다면, 프란시스는 제대로 길을 찾은 셈이다. 이제 니체가 말했듯, 자신을 건너가는 일만 남았다. 그리고 영화는 그렇게 방황하는 청춘을 건너 어엿한 안무가로 성장한 프란시스의 모습을 보여주며 마무리한다.


글쎄, 영화 내내 보여주던 쿨한 태도와는 다르게 갑자기 감싸안는 따뜻한 포옹 같은 마무리에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그렇게 부유하게 내버려둘 수만은 없지 않았겠는가. 달리 다른 결말을 생각할 수는 없지 않았겠는가. 어쨌든 청춘의 성장영화인데 말이다.


노아 바움벡은 함부로 기성세대의 잣대를 청춘들에게 들이밀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거리 둠, 훈계하지 않는 시선, 혼란을 혼란 그대로 존중하는 태도가, 아마도 이 영화의 백미가 아닐까. 그러니 완성되지 않았다고 하여 불안해할 일도, 종용할 일도, 비난할 일도 아니다. 어쨌든 청춘은 성장하고 있는 중 아닌가. 영화 제목이 '프란시스 해리스(Frances Harris)'가 아닌 '프란시스 하(Frances Ha)'로 끝난다는 점은, 그리고 영화 제목이 영화의 마지막 신을 장식한다는 점은, 감독의 그런 의도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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