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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 작가 Oct 28. 2021

스쳐가는 인연에 눈길을 줄 때

생각 노트 #05

 평일의 등쌀에 바쁜 발걸음을 옮기는 수많은 사람들, 정류장의 그들에게는 시야에 모두 다 잡지 못하는 다른 그들이 지나간다. 너무 발걸음을 빨리 하던 이는 다른 이의 어깨에 부딪히고 만다. 잠깐, 그들의 시간이 겹치고 멋쩍은 인사와 사과의 마음을 건넨다. 하루마다 감각한 모든 것이 작은 모래알처럼 24시간의 모래사장을 채운다. 인연의 모래성에 그들은 한 줌을 듬뿍 쥐고 성벽의 한 부분을 장식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거센 파도에도 휩쓸리지 않고 긴 시간을 버텨낼 굳건한 인연이 될 수도.


 "오전에 출근하면서 내가 어떤 분 어깨를 부딪혔거든, 그런데…."


 유독 발걸음이 빠른 이는 원래의 인연에 소식을 전할 수도 있겠다. 지루한 일상에 조금의 특이점은 흥미를 가져오는 데 충분할 것이다. 이것 또한 사라질지어도, 기억을 조금 더 상기시키는 인연의 끈이 될지도 모른다. 혹시나, 감싼 어깨를 가진 상대방도 지금 이 시각 실타래를 풀고 있을지 모른다.




 "안녕, 오랜만이야. 너 학창 시절에 되게 멋있었는데."


 평소 소심해서 동창회를 잘 가지 않던 남자는 친구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술집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수년간 올 생각조차 없었던 이곳인데, 어색함과 불편함이 속에 가득 찬 그였다. 그런데, 남자의 앞자리에 누군지도 모르는 여인이 어느새 앉아있었다.


 옆자리의 친구는 몰라도 아는 척하라는 따끔한 제스처를 취했지만,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니, 내가 원래 학창 시절에 발이 넓었나. 도통 생각해도 모르겠다.


 "푸흡, 너 표정에 다 쓰여있어.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건 당연하지. 그땐 너한테 인사도 제대로 한 적도 없는 걸."


 장난기 가득한 그녀의 표정에 남자는 더욱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남자는 절대로 알아챌 수 없었던, 그녀만의 이야기이자 소중히 간직한 인연의 실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남자의 얼굴은 조금씩 화색으로 바뀌며 앞의 빛나는 끈을 꽉 잡았다.


 남자의 친구는 힐끗 쳐다보더니,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우리는 하루를, 1년을, 인생을 인연과의 씨름으로 지내고 있다. 겹친 시간과 공간은 필연적으로 기억을 각인시킨다.


 그때의 나이, 옷차림, 머리스타일, 날씨, 장소, 시간은 독창적인 인연의 실을 만들어 낸다. 상대방은 힐끗하며 지나갈 뿐이었지만 강렬함을 느낀 자신은 그 실을 고이 간직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미래의 우연에 설레는 가슴으로 간직한 실을 상대방에게 꺼낼 것이다. 그간 상상해왔던 상대방의 반응은 현실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사람이 좋다. 만남이 좋고 그 분위기를 사랑한다. 만남과 인연에서 지속적이고 큰 행복을 느낀다. 삶의 이유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외로움의 자리가 그만큼 크기에, 느끼는 행복도 이만큼이나 달콤한 것 같다.


 내가 행복을 바라는 친구는 나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지녔다. 집이 좋고 혼자가 좋단다. 혼자 있을 때 자유를 느끼며 방해받지 않아서 좋다고 했다. 필수적인 일과 만남을 뺀다면, 항상 집에 있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 이에 덧붙여 나랑 결혼하는 인연은 같은 성격을 지녔으면 좋겠다고, 휴일에는 여행이 아닌 집에서의 휴식을 전제로 한 교감을 바란다고 했다.


 부러웠다. 나와 정반대의 성격이기에, 너무나도 닮고 싶었다. 단단하고 확실한 소수의 인연에 만족하는 친구는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다.




 나의 작은 연못에는 형형색색의 실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다. 평수는 좁은데 인원이 많으니 이리저리 부대끼는 게 당연한 결과였다. 결국에는 다들 여기저기 피어난 상처를 가지고 지금까지 거친 숨을 헐떡이는 중이다.


 자존감이 낮아 사람에 호감을 잘 가지는 나라는 사람은 욕심이 과했다. 마음의 연못은 외로움의 숲 안에 존재했다. 나만 간직하는 인연의 실에 혼자서 쓰라린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고통에 못 이겨 나뒹굴 때, 어쩌면 나를 숲 밖으로 꺼내 줬을 수도 있을 실을 못 잡은 적도 있었다. 어느 한 시기의 멍청한 말로이지 않은가.




 최소한의 여유만이 존재하는 정류장에는 차가운 손을 잡아줄 그때의 인연을 기다리는 이들이 있다. 어느 사람은 당시의 인연에게 연락을 취하기도 했다.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에 옆의 이들 또한 긴장한 듯했다.


 그의 표정은 곧, 양극단을 취할 것이다. 그리고 이후 일어날 일에 주변 이들 또한 한 가지의 피드백을 선택할 것이다. 마침내 미정의 시기는 어떠한 한 가지의 분위기를 타게 된다.


 양극단 중의 한 곳, 밝은 표정을 가진 이에게 누군가가 다가온다. 대화를 나누고 간직한 인연이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고 확정받는다. 떨리는 몸과 감격한 표정이 그의 표정에 완연히 드러났다. 주변 이들 또한 한 차례 웃음 물결을 타고 박수를 친다.




 사람의 마음에는 인연의 정류장이 존재한다. 나처럼 앉을자리도 없는 꽉 찬 정류장에 서먹서먹한 인연들이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모습일 수도 있다. 아니면 친구의 정류장처럼 한적하지만 끈끈한 소수의 이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


 어떤 전경을 가진 정류장이든 간에, 기다리는 모든 이들이 꼭 누구 한 명씩을 만나기를 바란다. 기대했던, 혹은 의외의 인물일지라도 간직한 끈이 그와 연결되기를 바란다.


 울창한 외로움의 숲에 밝은 볕이 들기를 항상 고대하며 생각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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