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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 작가 Sep 17. 2022

단지 나는 이 자리에 서 있겠다

생각 노트 #20

 푸념하듯 내뱉는 말은 때로 무의식적으로 나오기도 한다.


 "세상 일이라는 게 참, 내가 바라는 대로 되질 않네."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얘기되는 건 그만큼 명확하게 정의될 수 있는, 세상의 진리를 담고 있어서이지 않을까.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단골 멘트일지도, 쓰라린 인생의 해답을 담은 문구일 수도, 지나가는 나 혹은 다른 이의 일상적인 한숨일 수도 있다.




 허황되고 비약적인 생각일 수도 있다. 몽상적인, 혹은 극히 일반적인 통념일지도 모른다. 머리로는 하나의 소설,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허구적인 그것으로 여겨지는데 마음은 도통 그렇지가 않다. 마치 확답에 다가간 느낌이니 야릇한 기분을 떨쳐내기가 무척 어렵다.


 이곳저곳에 섞여 생활을 하다 보면 그 사람의 패턴이 보이더라. 정확히는 이야기이다. 한 사람의 역사와 느낌, 그 모든 것들이 섞인 고유의 개성이자 가치관이 보인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멀리 떨어져서 그 사람을 생각하면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색채로 나에게 느낌을 그려준다. 하지만 극히 비슷해도 완벽하게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은 없다.


 내 삶은 사람을 만나는 게 가장 중요하다. 바꿀 수 없는 알맹이이자 이렇게 설계되어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내 눈에 비치는 이야기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 가에 대한 것들이더라. 가령 저 친구는 이렇게 사람을 만나고 사귀더라. 그게 저 사람의 색깔이자 이야기이니까. 그리고 사람을 만남으로서 얻을 수 있는 궁극적인 행복을 취하는 데는 이러한 고유한 수단이 있더라.




 마치 그 사람의 운명이라고 할까. 얼마나 일반적이고, 창조적인 단어이며 허황된 말인가. 그런데 나는 믿는다. 그것도 강렬하게.


 사실 우주는 멀티버스이고, 지금 내가 살아가는 우주 또한 복제된 우주일 것이다. 최초일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이며 마치 어느 한 게임과 같이, 나라는 사람을 만든 다른 이가 분명하게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고 여긴다면, 창조주는 나의 이야기 실타래를 어떻게 풀어낸 것일까. 창조주가 나를 움직이게 만든 칩이자 핵일 수도, 아니면 사실 전지전능한 이가 분명히 존재하고, 마침 인간이 중심이어서 정말로 운명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어떤 경우라도 상관없다. 감정 하나에 휘둘린 느낌을 세상의 진리라고 믿으려고 하는 우매한 나에게는 드높은 위를 바라볼 기회조차, 아니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나는 항상 갈구한다. 그게 뭔지는 명확하게 콕 집어낼 수 없었다. 어릴 적엔 너무나도 깊다고 여긴 내 생각 보따리를 와르르 풀어내는 게 순수한 욕망이라고 여겼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아주 중요한 한 가지가 숨겨져 있다는 확신을 받았다. 와르르, 누구에게. 바로 다른 사람들에게.


 처음엔 공포에 가까웠다. 내가 가진 것들은 퍽이나 이상했고 괴상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래서 혼자서만 간직했다. 하지만 원초적인 욕구로 인생을 사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나둘씩, 보일 듯 말 듯하게 꺼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씩 자신감이 붙었다. 또한 내가 세상을 사는 수단을 결정했다. 저 사람의 이야기를 읽고 가장 비슷한 걸 보여주자. 나는 무척이나 다양한 게 많으니까. 비슷한 건 무조건 있을 거야. 비슷한 게 없으면 가장 둥글둥글한 것을 보여줬다. 이조차도 불가능하면 화려한 겉포장지만 씌우려고 했다. 그 사람이 좋아할 만한 것으로 말이다.




 원만했다. 그리고 즐겁다고 느낀 빈도가 많아졌다. 하지만 취하고 무뎌지는 건 한 순간인 법. 점점 나는 나를 더욱 드러내려고 했다. 화려한 겉포장지를 벗기고 온전한 나를 덧댔다. 그들의 눈에는 허름하고 녹슨 것으로 보일까. 기쁘고 즐거운 것을 넘어서 행복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나를 다 보여주어야만 했다.


 속에서 번개가 이는 듯했다. 찌릿한 느낌과 함께 운명의 거친 울타리에 부딪혔다.


 '너는 더 이상 나갈 수 없어. 여기까지가 너의 한계야. 그만.'


 다 보여주니 통 멀어지더라. 한 순간에 완전한 공감을 받았다고 해도 갑작스럽게 멀어지더라. 그리고 딱 내 울타리 밖의 거리만큼만 유지하는 관계들이 되더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든, 나를 좋아했던 사람이든 간에 불변의 법칙은 항상 나를 옥죄었다. 그래, 운명이 말이다.




 그래도 감정이 너무 강해서 울타리를 뚫으려고 한 적이 많았다. 그러면 거친 송곳들이 솟아났다. 머리부터 시작해 팔과 다리, 온몸 여기저기에 바람구멍이 났다. 뜨겁게 흘러내리는 것과 함께 몸도 생각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고는 감정의 대상은 휑하니 사라졌다. 울타리 밖에서라도 볼 수 있던 사람이, 내 주위에서 떠나갔다. 차갑고 단호하게 말이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이처럼.




 많이도 울었다. 수천 번 뚫려도 새살은 돋아나고 감정은 다시 싹을 틔우더라. 그래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가 않는다. 이것 또한 내 운명인 듯, 행복을 바라는 과잉적인 태도는 나를 매몰차게 몰아놓고선 그렇다고 무릎을 감싸 앉아 모든 걸 거부하고 눈을 감게는 하지 못하게 했다. 이제는 학습되었는지 감정에 휘둘리기 전에는 따끔한 생각부터 반사적으로 차올랐다. 어차피 의미 없는 짓이지 않을까.


 실타래는 내 전신을 묶고서는 꼭두각시처럼 인생을 흘러가게 한다. 이카루스는 태양을 쳐다보고 날기라도 했지, 나에게는 눈부시게 빛나는 비행 영상만을 보여줬다. 그리하여 울타리 안의 철저한 방목은 내 등껍질을 그을리고 흉 지게 했다.


 그래도 나는 눈 감을 수 없다. 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인두이니까. 지금 회상해도 행복하다고 느낀 적이 당연하게 없다. 다른 이들의 목적지로 다다른 행복을 바라보는 것도 고통이구나. 나는 도달할 수 없는 곳이니까. 


 또 부딪히겠지. 많이 아파하고 내 운명을 자책하겠지. 이제는 이미 익숙한 진리이자 참인 내 이야기를 알아버렸어도. 나는 이렇게 살아가야만 하니까. 


 삐걱대는 꼭두각시가 아니라 붉은 실타래에 묶여 안구만 덩그러니 내놓은 허수아비라도. 울타리 밖의 이들을 부러워하며 눈물만 아래로 떨어져도.


 단지 나는 이 자리에 서 있겠다. 울타리 밖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휑한 그 풍경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공포스러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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