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노트 #34
신년이라는 말의 힘과 무게감이 점점 약해지는 걸 느끼는 요즘이다. 합당한 계획과 만족스러운 다짐으로 시작한 나날은 소름 끼치도록 빠른 유수에 절반 이상은 물거품이 되었다.
다들 신년계획은 원래 그런 거라고 하지만, 게으른 자책과 아쉬운 느낌은 쉽게 사라지지가 않는다. 하지만 계획을 이루지 못했다고 해서 내 주위에 광명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적잖은 기간 동안 머무른 지금의 빛줄기는 더욱 맑은 기운을 뿜어낸다. 나 또한 이것을 흡수하려는 일관되고 꾸준한 노력이 있었다. 단지 새로운 것에 대한 수확이 없었을 뿐, 현재를 지키기 위한 페달은 끄떡없었다.
익숙한 게 무서운 법이라고 했던가. 지금의 환경에 적응하면 할수록,
'다른 삶을 바라는 내가 과분한 것이지 않을까.'
라는 문장이 내 머릿속에 경종을 울린다. 굳이 지금도 따스하다고 느끼는 보금자리에, 대체 왜 회의감을 느끼는가. 머무른다고 해서 썩는 것이 아닌 익는 것일 텐데 말이다.
픽션에 나올 법만 한 가학적인 범죄의 증가, 전 세계적으로 역대 최저의 경악스러운 출산율, 이에 따른 정치권에 대한 비판, 또 세대와 성별 간의 격차의 심화, 그리고 맹목적인 비교와 게으름으로 생기는 자괴감과 자기 비하 등 폭발적으로 증가한 암울한 미디어의 급류들이
회피하지도 못하게 나를 덮쳤다. 감정과 가치관은 우직했으나 도서관의 군데군데는 회색으로 채워졌다.
한 눈 팔면 휩쓸릴 게 뻔한데 왜 깊은 곳에서는 고민과 스트레스가 나를 괴롭히는 것일까.
'썩 살기 좋은 행성이다, 그러나 나에게 유토피아는 아니다.'
같은 공간에 존재하나 제각기 다른 행성 위에서 별을 탐하는 우리가 있고, 분명한 유토피아에서 살고 있는 우리 또한 실재한다.
근원적인 측면에서, 1차적이고 가장 강력한 욕구는 나는 왜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가였다.
항상 같은 질문과 유사한 대답의 반복이지만, 이렇게 매번 다른 글로도 남기는 나 자신은 정말로,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다.
가장 두려웠던 건 성격이 물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두려운 만큼 자신도 있었다. 이미 내 색채는 눈부신 검정에 가까웠으니.
그러나 두 가지 가치관은 생각지 못한 강적이었다. 가치관의 플러스가 아닌, 거대한 하나의 명백한 분립은 한정된 내 에너지를 나눠가졌다.
그리하여 현재를 유지하는 따스함과 기존의 불확실한 소망에 대한 자신감 하락으로 이어졌다.
일상에서의 미디어의 침습과 에너지의 부족은 나를 잠식하려고 했다. 그리고 나를 결정적으로 흔든 유효타는 점점 더 친밀해지는 현재의 동료들이었다.
일에서의 확실한 스트레스 요인을 제거할 수는 없으나, 더욱 견고한 동료애로 견딜 수가 있었다. 길게 그인 상처가 아물며 유대 또한 더욱 솟아났다.
힘들었다. 두 가지 모두를 가질 수 없는 규정이 원망스러웠다. 지금의 것들에게 회피하려던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떨리는 몸을 붙잡았다. 흔들리기만 해서 안쓰러운 나를 누군가 구원해주지는 않는다.
차가운 설원에 손을 뻗어 내리는 찬란한 글줄기를 잡아야만, 비로소 더할 나위 없는 안정을 찾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