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아가기 위한 망각

by 훈자까

인간에게 존재하는 망각이라는 현상은 흔히들 축복이라는 말을 한다. 처음에는 이 문장이 이해되지 않았다. 어떠한 사실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고 미래를 대비하는 데에 있어서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괴로웠던 기억이라고 해도 말이다.


멈출 수 없는 시간의 능선 속에서 겪어야만 하는 고통은 힘겨운 기억으로 남는다. 그러나 망각은 기억을 잃게 하는 것이 아닌, 당시의 고통을 잊게 한다. 살갗을 짓누르는 그 위협감만을 옅고 흐리게 만들어준다. 더 나은 삶을 향한 본능인 것이다. 그리고 옅어진 그것은 다른 감정들과 융화되어, 밝은 모습을 되찾게 해 준다.




'훈 씨...'


아직 잠이 덜 깬 아침을 뭉그적 하게 열던 오늘, 이전에 퇴사했던 회사의 선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으로 보아 뭔가 또 일이 생긴 것 같았다.


회사도 괜찮았고, 특히 사람들이 너무 좋았다. 같이 합을 맞춰서 공동의 목표를 향해 달리는, 그 사람들이 주는 편안한 친밀감이 퍽 마음에 들었다.


오래전부터 갈망한 꿈은 글작가가 되는 것이었지만, 바란다고 실현되는 현실이 아니었으니. 처음으로 찾은 재능이 가장 잘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고. 가장 흥미를 가진 재능이 내 능력 중에서 뒤떨어지는, 안타까운 친구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애매한 재능'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넌지시 취미로만 남기려고 했었다. 그러다 보니 그 회사가 더욱 마음에 들었고, 쭉 근무를 하고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우연하게 들어간 그 회사의 모든 부분이 만족스럽다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였다. 특정 인물이 가진 부당함이 항상 마음속에 걸려왔었고, 나를 속박하는 게 싫었다. 공명정대함을 우선의 가치로 여기는 나였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거북함은 더욱 심해졌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퇴사를 결정했다. 그 거북함이 나의 성격과 가치관을 짓이기는 것 같아서. 내 모습을 잃기 싫었기에, 아쉬운 몇 번의 반려에도 깔끔하게 정리하고자 했다. 그래도 많이 괴로웠었다. 사람들이 무척 좋았으니까.




'아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 책상에 명함이랑 사원증이 놓여 있어서요. 생각이 나서 연락했어요.'


기분 좋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퇴사 전에도 가장 친했던 동료였기에 찡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 괴로웠었지. 이렇게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느낌이 많이 옅어진 것 같다. 내게 존재하는 망각이 일을 참 잘하는구나 싶다.


퇴사한 지 반년도 되지 않은 이 시점에서, 힘들었던 부분들은 지금의 나에게 유리된 느낌이다. 과거의 내가 경험한 것이 지금의 나를 에워싸지는 못했다. 그러나 좋았던 사람들의 향수는 아직까지도 진하게 남아있다. 이렇게 작은 안부 한 통에도 웃음이 흘러나올 만큼 말이다.


'저 점들이 그리움의 점들이었네요. 선배, 요즘 괜찮으시죠?'


웃으며 시작했던 안부는 근무할 당시의 행복한 부분들만 복기시켰다. 하루하루를 버티기 위해 습관처럼 방문했던 회사 근처의 카페도, 마셨던 커피의 달콤함도 액자에 걸어놓은 듯한 추억이 되었다.


액자는 대못으로 강하게 박혀 있어서, 지금은 그 뒤를 살펴볼 수가 없을 것 같다. 아마 그곳에는 나를 짓누르던 과거의 괴로움들이, 지금 꼼꼼하게 숨겨져 있지 않을까. 그렇게 쭉 견고하게 고정되어 있기를 바란다. 내가 웃으며 들춰볼 수 있을 때까지. 그땐 그랬지 하며.


좋은 사람의 소식에 이렇게 글로써 남길 정도로, 더욱 고통은 망각되어 버린 것 같다.




물론 아팠던 기억이 저때만은 아니니까. 내 밤하늘이 한순간에 암전 되어버릴 정도이거나, 크게 뒤흔들릴 정도의 사건들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아프고 나면 밤하늘이 더욱 풍성해지고, 깊어진 느낌을 많이 받았다. 동굴을 탐험하면서 확장시켜 가는 기분이랄까.


결국 망각은 더욱 밝은 하늘을 바라보게 해 준다. 깊어진 마음으로 환하게 걸려있는 저 별들을 바라보고, 달을 그릴 수 있으니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아름다움에 담긴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