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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모어책방 May 23. 2020

너의 여름밤은 짧고 우리의 낮은 금방 서늘해지는구나

이 맘 때 잉글랜드 남부의 낮은 길어, 저녁 9시가 넘어도 저 멀리 키 큰 나무들의 손에 걸린 어둡지 않은 하늘을 볼 수 있다. 두 살이 되지 않은 아이에게 그것은 희망이었다. 아직 자신의 하루가 끝나지 않았고 부모가 자신을 즐겁게 해 줄 수 있으리라는 희망. 목욕을 하고도 털이 덜 마른 강아지 마냥 침실을 한참 달려야 했다. 중간중간 암막 커튼을 열어 이웃들의 하루도 확인해야 하는 아이는 저녁이면 더 분주했다. 엄마는 그 사이 피곤에 지쳐 아이보다 먼저 잠들었다. 그 시간 아빠는 다이슨으로 아이의 열기가 머문 거실을 매만졌다. 헤드셋을 쓰고 좋아하는 Crush의 Fall을 듣다 보면 여름은 가을이 되었다.


낮에는 25도까지 오르는 여름 같아져 버린 이 곳의 5월은 새벽엔 다리에 와 닿는 까슬거리는 이불과 사람들로 북적이는 해변이라는 생소함으로 가득해져 버렸다. 아침 6시 반 경부터 뒤척이던 아이는 아빠의 배에 와서야 안착을 하고 그 생소함 속에 안정을 찾는다. 아이가 없을 때에 엄마와 등을 져야 잠을 자던 아빠에게 그것은 조금 색다른 경험이었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겠지, 아빠도 어느덧 덤덤히 자신의 품에서 느껴지는 아이의 머리카락을 바람처럼 쓸어안는다. 코 끝에 느껴지는 이 향기는 아이가 쓰는 섬유유연제의 향기인지 아이의 몸에서 나는 향기인지. 생각하고 구분하다 아침이 온다.


엄마의 젖을 끊고 우유를 먹으며 아이는 키가 부쩍 큰 것 같다. 아빠와 점심 산책을 나갔다 늘 아빠 품에 안겨 낮잠을 시작하는데, 아빠는 그때마다 아이의 다리가 잭의 콩나무처럼 길어지는 것 같다. 한 편 아빠의 어깨에 닿는 아이의 어깨가 참 작고 여리게 다가온다. 아직 아빠의 주먹만큼도 크지 않은 아이의 어깨가 안쓰럽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해 입을 맞추다 보면 지나는 이들이 웃으며 지나간다. 아이는 이렇게 사랑받고 있음을 알까.


말을 시작한 아이는 때로는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를 지극히 원망하곤 한다. '무'는 '물'인지, '무섭다'인지, 정말 '무'인지. 되묻는 아빠를 답답하다는 듯이 바라본다. 그 시선은 아빠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종종 아이가 혼자 되뇌일 때 들리는 언어는 꽤나 체계적으로 들린다. 혹시 아이가 원래 자신의 언어를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신과 천사와 대화할 수 있던 아이가 나로 인해서 오염된 언어를 갖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아빠는 그렇게 오늘도 초록색과 파란색을 가르친다.


창 밖 부는 밤바람은 초록색인지 파란색인지. 집 뒤편 공원의 공기는 너무 시원한데. 아이에게 이 밤은 너무 길겠지. 그래, 언젠가 그 밤에 같이 별 보러 가자. 우리의 낮이 다시 천천히 서늘해지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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