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결국 살아가는 이야기
‘처음에는 아니 였는데… 당신이 그렇게 차갑게 느껴지지도, 지겹게 다가오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이 오니 제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식어버려 있더군요. 아니, 원래 그랬던 것인데. 왜 이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까요. 가을이 지난 탓 인가 봐요. 고작 한 계절이 지났을 뿐인데 왜 마음이 이 만큼이나 멀어져 버린 걸까요…’
이별을 앞둔, 어느 연인의 이야기 같겠지만 위의 글은 첫 파리 여행 중 길 위에서 차가운 샌드위치를 먹고 받은 충격으로 그 날의 일기에 적은 글이다. 지금도 즐겨먹는 바게트 참치 마요네즈 샌드위치(le sandwich au thon, mayonnaise)에 대한 이야기.
그 해 가을. 처음 프랑스에 온 뒤 프랑스어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음식에 적응하려 부단히 노력하였다. 흔히 말하는 ‘양식’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기에 음식에 대한 걱정이 없을 줄 알았지만 가끔 가다 먹는 별식과 매일 먹는 주식의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었다.
그래도 주머니가 가벼운 유학생이기에 점심은 되도록 샌드위치나 학교 식당 음식 같은 간단한 것들로 식사를 하였다. 처음 만나는 10월의 프랑스는 눈부셨다. 대구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높이의 나무들이 눈으로는 헤아리기 벅찬 숫자와 함께 도시 중간 자리에서 공원을 이루고 있었다. 그 공원에서 낙엽을 보고, 밟으며 산책하는 일은 지금까지도 돌아가고 싶은 순간 중 하나.
낮 12시. 오전 수업이 끝나고 나면 일주일에 한 번은 홀로 학교 앞 빵 집에서 참치 마요네즈 샌드위치 하나를 포장해 공원으로 향했다. 하루 정도는 90분 정도의 점심시간을 오롯이 나만의 시간으로 채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볕이 좋은 날, 하늘에 닿을 거 같은 나무 아래서 먹는 샌드위치와 조용히 읽어나가는 책은 프랑스에 내가 공부하러 왔다는 사실을 잠시 잊게 하였다.
샌드위치의 종류는 여러 가지다. 참치, 닭고기, 햄, 치즈가 대표적이고 소스가 조금씩 다르지만 그 외의 기본적인 구성은 비슷하다. 한국에서는 식빵을 이용해서 만드는 샌드위치가 많다면 프랑스에서는 바게트를 이용해 만드는 커다란 샌드위치가 대부분이다. 그래도 제일 맛있는 건 참치 마요네즈 샌드위치. 몇 번의 시도 후 나의 샌드위치 취향을 알게 되었다.
딱딱한 바게트의 거친 표면 때문에 처음에는 입천장이 쉽게 벗겨지기도 했다. 안의 내용물이 넘쳐 옷 위에 흘리기도 일수였다. 그래도 나는 공원에 갈 때면 샌드위치를 하나 포장해 갔다. 그리고 적당한 벤치 위에 앉아 먹으며 책을 읽었다. 겉으로 보기엔 특별한 것이 없는, 그래도 나의 마음이 풍요롭던 순간 중 하나이었다.
하나의 계절이 지나니 어김없이 겨울이 찾아왔다. 겨울이 되어서야 나는 처음으로 파리를 구경할 수 있었다(파리 샤를 드골 공항을 통해 입국했지만 비시(프랑스 중부에 위치한 소도시)로 가기 위해 공항에서 바로 기차역으로 향했다). 눈 앞의 에펠탑 높이에 놀랐고, 루브르 박물관을 들어가기 위해 추위에도 기다리는 관광객들의 숫자를 보고 또 놀랐다. 그러던 중, 샹젤리제 거리를 가게 되었고 허기를 달래기 위해 음식점을 찾던 중 빵집이 눈에 띄었다. 식사 시간이 지난 지 한참이라 오히려 식사보다는 빵이 나을 거라는 친구의 말에 어김없이 참치마요네즈 샌드위치를 선택했고 배고픔에 샌드위치를 받자마자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추웠던 파리의 겨울인 탓일까. 아니면 보기에도 부실해 보였던 세계적인 관광지의 샌드위치 인 탓이었을까. 그 맛은 가히 충격이었다. 내가 가을 내 먹던 그 샌드위치와는 너무나 다른 것이었다. 결국 몇 번을 더 베어 먹어 간신히 허기만 달랜 후 버려야만 했다. 그리고 그 날 저녁의 일기에 글을 적었다. 가을 내 사랑하게 되었던 샌드위치와의 이별 이야기를.
우습게도 그 이후 봄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나는 다시 참치마요네즈 샌드위치를 찾기 시작했다. 지금도 여전히 날이 더워 입맛이 없을 때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 여행지에서 간단히 무언가 먹어야 할 때 찾는 음식 중 하나이다. 어쩌면, 그 날의 샌드위치는 앞으로 프랑스에서 나의 삶이 단순하지만은 않으리라는 자그마한 예고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