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인생을 다채롭게 만드는 몇 개의 음절
'우리 만나요'라는 문장의 소리를 좋아한다.
고작 이 가벼운 몇 음절의 조화가 끝없는 감정의 깊음을 담는 바람에
나의 지루한 인생을 때로 다채롭게 만든다.
하루는 거실에 앉아 있다 평소와 다른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 이유를 되짚어보니 파리에서 해가 저무는 시간이 조금씩 짧아지고 있다는 사실 탓이었다. 저녁 식사 후에도 환하게 밝았던 거실이 이제는 조금 어둑해지는 시간으로 바뀐 것이다. 그렇게 눈 부셨던 이곳의 여름도 조금씩 물러가는 중인 듯하였다. 찬란한 계절이 다 가버리기 전 니스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다.
니스를 처음으로 방문한 것을 헤아려 보니 6년 전 봄이었다. 그때는 오일 동안 열개의 도시를 다니던 혈기가 왕성하다 못해 넘쳐흐르던 여행이었으니 그저 스쳐 지나간 정도라 해두자. 다시 돌아오게 된 니스는 나의 기억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화창한 봄날에도 휑했던 해변가는 잠시 차에서 내려 걷기 좋았을 뿐. 그 이상의 감정이 남지 않았던 곳.
나흘 동안 천장이 높고 집안 곳곳 파란색을 잔뜩 묻혀 놓은 에릭의 집에서 머물게 되었다. 해안가가 잘 보이는 곳이면 좋았겠지만 오래된 항구 옆에 머물며 하는 산책하는 일도 퍽 괜찮았다. 항구 방향으로 나 있던 테라스는 집 정원에 열린 오렌지와 닮은 색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이곳은 파리에 비해 날이 훨씬 무덥고 습했지만 물러가던 여름이 무언가를 잊고 다시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 낮이면 도시와 주변 자그마한 마을들을 찾아 다녔고 해가 조금씩 저무는 시간이 되면 가벼운 차림으로 니스의 해안가를 거닐었다. 그러다 몽글한 돌멩이로 가득한 해변에 앉아 지는 노을을 보기도 하였다.
몇몇의 작고 아름다운 마을의 풍경들도 아름다웠지만 그럼에도 가장 좋았던 것은 해가 저무는 니스를 바라보며 걷던 순간이었다. 그곳의 노을은 파리의 것과 또 달랐다. 도시를 둘러싸고 있던 산등선 너머로 해가 나울 나울 하듯 넘어갔고 그러면서 쏟아지는 노을빛은 니스의 바다와 나지막한 건물들을 얼룩지게 만들었다. 한참을 해변가에 앉아 둥근 돌멩이들이 더욱 깎여져 가는 소리를 들으며 조금씩 옅어지는 붉음에 아쉬워하던 중 연락이 왔다.
"잘 지내요?"
순간 두 눈을 의심했다. 수 년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던 사람. 인사치레의 말을 몇 번 주고받은 후 나에게 지금 파리에 머무는 중이라 하였다.
"지금 파리에 있어요. 혹시 파리에 있다면 잠시 볼 수 있을까요?"
"아, 어쩌지.. 죄송해요. 지금 파리에 없는데.. 이틀 후에나 파리에 돌아가요. 그 후로 괜찮아요?"
"그럼 귀국 전에 시간이 조금 있으니 저는 괜찮을 거 같아요. 우리 만날까요?"
아. 우리 만날까요, 라는 말의 무게를 순간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 포항의 어느 바닷가에 오늘과 비슷했던 시간 속에서 얼룩진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며 한 약속이 있었다. 나를 보러 파리에 언젠간 꼭 오겠다는 것. 지금의 하늘빛이 비친 것처럼 옅어진 약속을 지키기 위해 왔다는 것을. 그렇기에 왜 파리에 왔는지, 여행인지 혹은 일 때문인지 따위의 질문을 하지 않았다.
프랑스로 떠나오기 전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책 한 권과 절대 짧지 않은 편지 한 통을 살며시 건네었다. 편지는 당신의 삶 속에서 나의 부재가 없기를 바라는 일종의 바람 같은 나열이었다. 애석하게도 그 이후로 이곳의 삶은 변덕스러웠으니 어느 순간부터 그 편지를 잊고 지냈던 게 사실이었다.
하필 니스의 해변가에 앉아 그때와 닮은 순간 속에서 머물고 있었던 탓인지 수년 전의 감정이 마음 한 편으로부터 거침없이 쏟아져 내려 니스의 파도 속으로 쓸려 갔다. 얼룩진 바다는 니스의 찬란한 노을 때문이 아닌 쓸려간 내 마음의 색깔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 같기도 하였다. 유독 짧았던 그 해 여름. 마무리 짓지 못한 이야기의 끝을 파리에서 다시 적어 내려갈 수 있을까.
"네, 우리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