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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Oct 29. 2017

상실도 흘러간다

상실은 다만, 세월 속에 존재하는 거고 그렇게 흘러가는 거다.

누나가 월급을 탔다. 월급을 타면 주말에, 일요일 점심에 배달 음식을 시켜 먹는데 오늘은 얌샘 김밥 음식으로 한 상을 차렸다. 생등심 돈까스와 날치알 김밥, 소시지 김밥과 쫄면, 오뎅탕과 떡볶이, 그리고 돈까스 김밥. 거하게 배를 불리고 쓰레기를 버리러 밖에 나오니 바람이 언제 가을이었나 싶을 정도로 매우 차다. 코스 니트에 꼼데 갸르송 두터운 재킷을 입고, 아래는 유나이티드 애로우즈에서 산 네이비 색 팬츠를 입고, 신발은 하레의 가벼운 슈즈를 신고 밖으로 나왔다. 역시나 바람은 차고 꼼데 갸르송의 재킷이 꽤나 따뜻함을 느꼈다. 자비 출판 원고의 마무리를 지으러 할리스에 들어와 노트북을 켰다. 인터뷰의 기억을 더듬으며 카와사키 쇼헤이의 '중판 미정'이란 책에 관한 소개글을 써내려 나갔다. 그는 도쿄의 작은 출판사에서 일하며 자신이 겪은 일들을 성기고 친밀한 느낌의 만화로 그려낸 작가기도 하다. 그의 이야기를 더듬으며 자비 출판은 암흑같은 일본 출판 업계의 비상구 같다는 생각을 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대신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자신의 메시지를 발신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 누나가 월급을 탔다.  


이유없는 상실이란 생각이 든다. 찾으려 해도 보이지 않는 상실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많은 것들이 없어졌고 많은 시절들이 지나갔다. 그래서 많이도 앓았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을 파고 들어가보면 그리 대수롭지 않았던 상실이기도 하다. 그렇게 생각이 된다. 그러자고 마음 먹는다. 리코의 점퍼를 버렸던 기억이 있다. 일년 전 쯤 야밤에 나리타 공항에 도착해 지갑에 엔화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고, 엔화를 찾으러 트렁크를 뒤지다 마지막 열차를 놓쳐버렸다. 당시의 나는 (지금 생각해 보면) 제 정신이 아니어서 뒤집어 엎어 놓은 짐들을 다시 트렁크 안에 쑤셔 넣기를 포기했다. 그렇게 리코의 검정색 점퍼가 없어졌고, 아마도 꼼데 갸르송의 검정색 턱시도 재킷 역시 그 때 없어졌다. 하지만 물건에는 나름의 유효 기간 같은 게 있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물건은 어느 순간 나에게 다가와 어느 순간 떠나가기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리코 점퍼는, 꼼데 갸르송 턱시도 재킷은 딱 그 정도 시간만큼 나의 것이었던 거다.


상실은 단순히 무언가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랬었다. 상실은 무언가가 없어진 상태가 계속 지속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랬었다. 하지만 그 지속은, 그 상실은 어차피 시간의 한 부분에 불과하고, 시간이 흐르면 상실도 흘러가고 그렇게 기억은 흐릿해진다는 생각이 든다. 일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만큼의 기억도 흘렀다. 그리고 나 역시 변해갔다. 보이지 않게 나이를 먹었고 보이지 않게 모습이 변했다. 내가 가진 기억, 내가 가진 감정, 내가 가진 추억 역시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럴 거다. 오늘을 참을 수 있는 건 내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쿠루리는 기적(奇跡)이란 곡에서 '지루한 나날도 당연하게 스쳐 지나간다'고 노래했다. '마음이, 생각이 굴러 굴러 세월의 계곡을 넘으면' 상실도 모습을 바꿀 지 모르겠다. 그러니 이유 없는 상실이 아니다. 이유 없는 상실은 없다. 상실은 다만, 세월 속에 존재하는 거고 그렇게 흘러가는 거다. 그래서 안심을 할 수 있는 것 같다. 내일을 맞이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살아갈 수 있는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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