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NORESQUE Nov 01. 2017

일본인에게 맥주는 맥주 이상이다

시대를 품은 술은 단순한 알코올을 넘어선다.

아오이 유와 이치로가 마주 앉았다. 장소는 야키니쿠 집. 테이블 위에는 고기가 익고 있고, 그 옆에 맥주 두 잔이 놓였다. 보기만 해도 먹음직 스럽다. "먹는 것이 먼저인가, 마시는 것이 먼저인가." 이치로는 고민한다. 맥주가 미지근해 지기 전에 들이키는 것이 옳을지,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은 뒤 입가심으로 삼는 것이 좋을지. 기린 맥주의 2012년 새 CM은 식탁 위의 사소한 고민으로 신제품을 광고한다. 일본 사람들이 식당에 들어가 제일 먼저 외치는 소리 'とりあえずビール(우선 맥주)'에 대한 작은 재고다. 이번에는 에이타와 안이 나란히 앉았다. 잔디 위에 정좌를 튼 둘은 요가 자세로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둘은 맥주 한 캔 씩을 손에 쥐고 있다. "아직 안 마시나요"라고 에이타가 묻고, "조금 더"라고 안이 대답한다. 둘은 언제 캔을 따면 좋을지 타이밍을 재고있다.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안주가 될 때까지." 기린 맥주의 또 다른 CM이다. 맥주는 만찬에 완벽한 반주임에 틀림없지만, 야외 활동 후에 그 자체로도 훌륭한 메인이 된다. 


일본 사람들은 맥주를 참 좋아한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한 캔을 따고, 밥을 먹으며 또 한 캔을 따며, 목욕 후 잠들기 전에 마지막 한 캔을 딴다. 여기서 맥주는 반주를 넘어 일상 음료가 된다. 기린, 삿포로, 아사히 등 각종 음료 회사에서 판매하는 맥주는 종류만 30가지가 넘으며, 흑맥주, 논 알코올 등 시대에 따라 다양한 유행을 타기도 한다. 여름은 물론 일 년 내내 TV에 흐르는 맥주 CM은 평균 10여 편을 넘는다. 6월 2일과 3일 양일에는 도쿄 에비스에서 대규모 맥주 축제도 열린다. 올해로 15회째를 맞는 ‘재팬 비어 페스티벌 2012’는 일본 크래프트 맥주 협회(Japan Craft Beer Association)가 주최하는 맥주 애호가를 위한 잔치다. 라거, 에일, 흑맥주 등 기본적인 맥주의 종류는 물론 일본 각지의 독특한 풍미를 내세운 지역 맥주까지 총 240 종류의 맥주를 입장료 4900엔에 마음껏 마실 수 있다. 그저 맥주를 마시기 위한 자리로 꾸려진 이 페스티벌은 7월 오사카, 8월 나고야, 그리고 9월 요코하마로 향연을 이어간다. 5월 22일 오픈하는 도쿄의 새 상징 스카이트리에는 세계 150 종류의 맥주를 맛볼 수 있는 ‘세계 맥주 박물관’이 들어선다.


일본은 탱자 만들기에 전문가다. 그 어느 나라의 문물도 일본에 오면 나름의 일식으로 변주되어 수용된다. 일본의 저널리스트 타카노 하지메는 그의 저서 <세계 지도를 읽는 방법>에서 일본을 슬롯머신의 출구로 비유했다. 그에 의하면 일본은 지리상의 위치를 토대로 서양의 음악, 미술, 영화, 음식 등 다양한 문화들을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받아들여 왔다. 쇼트케이크와 나폴리탄은 일본이 서구 요리를 변형해 만든 오리지널 케이크와 파스타며, 스누피와 트위티, 그리고 체브라시카는 아마도 자국보다 일본에서 더 사랑받는 캐릭터일 것이다. 맥주 역시 마찬가지다. 1700년대 네덜란드인에 의해 처음 맥주를 접한 일본 사람들은 이후 끊임없이 맥주를 만들고 마셔왔다. 1900년대에 들어서는 대기업부터 중소기업까지 맥주 제조에 발 벗고 나섰고, 1980년대에는 경제 버블과 함께 다소 고급품이었던 맥주가 대중화, 서민화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맥주를 열심히 공부했다. 본격적인 양조장을 만들었고, 무기 100%를 고집하는 곳도 생겼다. 도쿄 에비스의 ‘맥주 기념관’으로도 유명한 삿포로 맥주는 양조 역사 130년을 자랑한다.


기무라 타쿠야는 말한다. “일본의 성장은 맥주와 함께였다.” 2011년 TV를 탄 삿포로 맥주 CM의 한 대사다. 무슨 고작 술 하나에 나라의 역사를 들먹이나 싶지만 결코 과장은 아니다. 일본에서 맥주는 1980년대 경제 발전과 함께 축포의 음료였다. 그들은 서구에 아시아의 힘을 자랑하며 맥주를 마셨다. 신나게 샴페인을 터뜨리던 시절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일본의 거품은 아픈 현실을 드러냈다. 그리고 맥주는 하루의 피로를 푸는 회복제가 되었다. 퇴근 후 샐러리맨들은 맥주 한 잔으로 일과의 찌꺼기를 씻어낸다. 공장 노동자도, 오피스 레이디도, 취업 준비생도 하루에 구두점을 찍으며 맥주 캔을 딴다. 본래 주인이 누구였든 상관없다. 맥주에는 일본 나름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기억과 추억이 담겼다. 그렇게 맥주는 일본의 색을 입었다. 맥주의 계절 여름. 일본이 다시 맥주를 마신다. 슬픔, 기쁨, 아픔, 성공 모두와 함께 하는 술이다. 시대를 품은 술은 단순한 알코올을 넘어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