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이 유야 감독의 '도쿄의 밤하늘은 가장 짙은 블루'
냉소로 가득 찬 세상에서 살아가는 여자가 있다. 이름은 미카(이시바시 시즈카), 그녀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사랑은 수많은 사람을 죽여왔다 생각하고 그래서 피의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그녀의 삶을 수식하는 단어는 단 하나, '어차피'다. 어차피 버림받을 거 마음을 줄 이유 없고, 어차피 헤어질 거 사랑할 필요 없으며, 어차피 죽을 거 애쓰며 살아갈 일 없다. 차별과 아이러니, 그리고 공포가 그녀가 생각하는 세상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니 그녀에게 출구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저 내일이 찾아와 오늘을 살 뿐이고, 그저 오늘이 물러가 내일을 살 뿐이다. 낮에는 간호사로, 밤에는 걸스 바(ガールズバー) 점원으로 일하는 그녀에게 삶은 시작과 동시에 끝이 난다. 세상을 절반밖에 보지 못하는 남자가 있다. 이름은, 신지(이케마츠 소스케), 그는 현실을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장애를 감추기 위해 무수히 많은 말들을 늘어놓고, 그렇게 현실을 가장한다. 삶을 느끼지 않기 위해 고된 육체 노동으로 삶을 버티고, 그렇게 늘 현실 언저리에 머문다. 그의 삶을 수식하는 문장이 단 하나 있다면 그건 '나쁜 예감이 들어(嫌な予感がするよ)다. 그의 입으로 두 차례 발화되는 이 문장은 그의 삶을 무형의 어둠 속에 위치시킨다. 그러니 그에게 사랑, 우정 같은 단어는 자리하지 못한다. '어차피'로 수렴되는 삶과 절반밖에 존재하지 않는 세상, 영화는 이 둘의 만남을 그린다. 어둠이 짙어질까 싶지만 찾아오는 건 오늘이고, 내일이다. 칠흑같은 밤이 파란 빛으로 빛난다.
이시이 유야 감독은 사람을 그린다. 쓰나 마나인 문장이다. 사람을 그리지 않는 영화가 어디 있을까 싶다. 하지만 이 하나 마나인 문장은 이시이 유야 영화에서 문장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시이 유야는 '사람을 그린다'라고 쓸 수밖에 없는 드라마를, 감정을, 마음을 그려낸다. 결국 사람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세상이 그의 영화 속에 펼쳐진다. '이별까지 7일'에서 보여줬던 가족을 넘어선 마음 공동체, '행복한 사전'에서 그려냈던 서툰 마음의 소박한 자리. 사람이 위치한 자리를 그처럼 섬세하고 사려깊게 바라보는 감독은 많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은, 사람들은 따뜻하고 온화한 무언가를 바라본다. 모나고 울퉁불퉁했던 마음마저 부드럽게 감싸안는 게 그의 영화다. 모남을, 울퉁불퉁함을 무마하지 않는 데서 그의 영화의 특징이 살아나고,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데서 그의 영화의 힘이 발휘된다. 그런 면에서 '도쿄의 밤하늘은 가장 짙은 블루'는 그가 다시 한번 사람을 얘기한 작품이다. 그리고 동시에 다시 한번 모나고 울퉁불퉁한 사람의 면면을 응시한 작품이기도 하다. 미카와 신지가 살아가는 오늘이 가감없이 그려지고,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앞둔 도시의 분위기가 이들의 삶과 작용한다. 이시이 유야는 영화의 시작을 설명하며 '시집을 읽고 느낀 심정, 감정이 출발점이 됐다'고 얘기했다. 영화는 사이하테 타히의 시집 '밤 하늘은 언제나 항상 최고 밀도의 푸른 빛이다'를 원작으로 했다. 그만큼 감각적인 영화다. 어차피, 반밖에 존재하지 않는 삶이 찾아낸 건, 결국 시고, 다행히 영화다.
시를 영화로 가져온 이시이 유야는 시의 라임과 운율, 비유와 상징을 영화의 편집과 촬영, 시각 효과로 적절하게 옮겨냈다. 담뱃불이 도쿄의 야경으로 퍼져나가는 신이나 익스트림 줌인과 줌아웃, 그리고 속도를 뭉개며 가공해낸 느린 템포의 장면들은 도시의 우울과 폐소감을 미카와 신지의 일상과 무리없이 연결짖는다. 하지만 이러한 비쥬얼적 성과는 사실 그리 큰 게 아닐지 모르겠다. 이는 어쩌면 시를 영화화한 작품이 취할수밖에 없는 어느정도 빤한 클리셰적 장치들에 불과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화에서 중요한 건 시가 갖고있는 도시의 정서, 그 안에서 살고있는 이들의 무게, 그리고 오늘에서 내일을 이어내는 시의 어떤 자세와 태도같은 것들이다. 영화는 충분히, 만족할 만큼, 아름답게 이 모든 것을 완수한다. 어떻게 빛을 얘기할 수 있을까, 어떻게 내일을 맞이할 수 있을까 싶던 신지와 미카의 삶이 어느새 내일을 향하고 있음을 우리는 자연스레 맞이한다. 이시이 유야가 원작을 바탕으로 꾸며낸 세계에서 눈에 띄게 다른 것은 시대적 배경을 2020년 도쿄 올림픽 전으로 명시하고 있다는 것이고, 한 쪽 눈밖에 보이지 않는 남자, 신지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냈다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노상 라이브를 하는 무명 가수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다른 대목에서 영화가 그저 시에 기대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시를 영화화한 작품이 빠질 수 있는 함정, 주석 달기에 그치고 마는 지점을 이시이 유야는 잘도 넘어섰다. 그것도 매우 영화적으로, 그의 영화 자장 안에서 말이다.
사랑을 하면 사람은 바보가 된다는 말에 모른다고 답한다. 어차피 버림받을 걸 알면서 사랑을 하는 건 어리석다는 말에 상관없다고 말한다. 어차피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누군가 죽고있다는 말에 모르겠다고 응한다. 체념으로 채워진 미카의 현실이 무화된다. 부정된다. 시작과 동시에 끝나버리곤 했던 현실이 '그래도', '그런데', '그러나'의 세상과 만난다. 신지는 자꾸만 냉소적이고 회의적인 말을 하는 미카에게 말한다. '바보가 되는 것을 포함해 좋아해.' 이렇게 내일이 빚어진다. 그리고 더하길, '(미카의) 싫은 일을 절반으로 해주겠다'고 말한다. '이 눈으로 태어난 걸 처음으로 잘됐다고 생각해'라고 더하며. 미카는 말을 잃는다. 시의 한 구절 한 구절 같은 이장면은 아픈 현실이 다른 아픈 현실을 구원하게 한다. 영화는 눈 가리고 살아가는 현대 도시 속에서 도시의 민낯과 마주하는 두 남녀의 이야기다. 여기서 현실은 세계의 다른 말이 되고, 세계는 현실의 다른 말이 되고, 시는 현실이 되고, 현실은 시가 된다. 영화는 현실을 자신의 세계 만으로 버티는 건 힘에 겨운 일이라고 얘기한다. 도시의 삶을 직시하고, 여기서 눈을 돌리지 않으려는 남녀의 삶을 바라보며, 거기서 현실을 살아가는 새로운 내일을 비춰낸다. 도시에 숨어있던 마음이 밤의 그라데이션처럼 흘러나온다. 미카와 신지는 방 한켠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한다. 만약 세상이 멸망한다면 어떻게 할까에 대해. '아침이 되면 '오하이요(おはいよ, 좋은 아침)'라고 말하자. 밥을 먹기 전에는 '이타다키마스(頂きます, 잘 먹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이런 거지?' 그렇다. 그렇게 내일은 찾아온다. 그렇게 우리는 살 수 있다. 그러니까 밤 하늘은 푸른 빛이 되곤 한다.
영화에만 있고 시에는 없는 것 중 하나가 노상에서 라이브를 하는 무명의 여자 가수다. 그녀는 '도쿄 스카이'란 곡을 네 차례나 부른다. 육교 위에서, 길바닥에서, 나중엔 음반을 프로모션하는 대형 차의 스피커를 통해서. 가사는 단순하고 명료하다. '겨드랑이 땀을 흘리고 신경 쓰며 나는 살고있어. 눈을 돌리고 언제나 거짓 웃음, 하지만 모두 똑같잖아. 여기는 도쿄, 하. 하지만 힘내~힘내~.' 이시이 유야 감독이 직접 가사를 쓴 이 노래는 솔직히 조금 이 영화와 어울리지 않는다. 시적 운율을 가져가는 영화가 돌연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응원의 노래를 부르기 때문이다. 그것도 수 차례나. 하지만 다시 한 번 솔직히 나는 이 노래가 나올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특히나 여자가 응대하는 주점에 갔다오며 흥에 취해 계단을 내려오는 신지와 그의 공사판 동료들 모습이 어우러질 때는 울먹였을 정도다. 신지와 미카는 혼자가 아니다. 그들에게 서로가 있었던 것과 동시에 그들이 모르는 수많은 타인이 그들 곁에 있다. 노상에서 노래를 했던 무명 가수 역시 그 중 하나다. 지금 내가 여기에 있는 것으로 인해 세상은 어떻게 될까, 나는 또 어떻게 될까를 영화는 보여준다. 그것만이 칠흑같은 도시의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이고 빛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그것이 도시의 현실이고 삶이라고 얘기한다. 그저 아무렇지 않게 작고 소소한 일로 내일을 맞이하는 자세, 하지만 동시에 그만큼 우리에겐 필요한 건 내가 아닌 너, 우리가 아닌 그들의 세계다. 도시의 밤 하늘이 짙은 블루의 어둠으로 흘러간다.
Tokyo Sky https://youtu.be/2ngyK_g99P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