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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Dec 21. 2017

끝나지 않는 엔드롤,
람프 Lamp ランプ의 세계

람프는 '어쩌면'의 세계를 구현한다. 



람프라 부르고 싶다. 램프라 말하고 싶지 않다. 일본의 3인조 밴드 Lamp는 우리 말로 읽으면 램프가 되겠지만 이들의 노래가 태어나고 자라난 곳, 일본에서의 발음대로 '람프(ランプ)라 부르고 싶다. 램프라 부르면 이들이 담아내는 세계가 온전히 그려지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이 인다. 람프는 2000년 결성돼 올해로 17년째를 맞는 장수 밴드다. 기타를 담당하는 소메야 타이요(染谷太陽)와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하는 나가이 유스케(永井祐介), 그리고 보컬을 담당하는 사카키바라 카오리(榊原香保里)로 구성되어 있다. 국내에선 2006년 전주 국제영화제에서 첫 라이브를 가졌고 이후 2007년과 2010년에 이어 올해 12월 17일 구로 아트 밸리에서 네 번째 라이브가 열렸다. 이들의 음악은 고유하다. 초기엔 키린지(キリンジ), 피쉬만즈(フィッシュマンズ) 등과 비교되며 소개되곤 했지만 네 번째 앨범 '잔광(残光)' 무렵부터는 어떤 장르나 카테고리로부터도 자유로이 멀어져 람프 고유의 색을 더해갔다. 이들의 음악은 현실 이면에 자리한다. 여기가 아닌 어딘가, 지금이 아닌 언젠가를 느끼게 하고, 다른 시간, 다른 공간, 다른 세계를 암시한다. 이는 시와 같은 가사가 담당하는 부분도 있으며 애절하고 서정적인 멜로디가 담당하는 부분도 있다. 가령 이런 식이다. 일곱 번째 앨범인 '꿈(ゆめ)'의 수록곡 '6호실(6号室)'은 '저무는 푸른 마을을 내려다본 발코니 마치 밤 하늘로 이어져', '유리 창가에 스며드는 보랏빛 그라데이션 영원으로 이어져'라 노래한다. 밤 하늘과 영원, 람프 음악에 자주 등장하는 세계다. 람프 음악에서 가사는 단어 하나, 하나가 의미의 밖을 응시한다. 남아있는 아쉬움, 밀려오는 그리움,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애절함의 시간이 그려진다. 역시 마찬가지로 '꿈' 앨범에 수록된 'A도시의 가을(A都市の秋)'아 노래하는 '짧은 엔드롤', '눈 위를 둘은 걸을 수 없어'라는 대목도 스쳐 지나간 것들의 자리를 추억한다. 소외받는 이들의 자리는 그곳에 있다.



람프의 음악은 세 가지라 말하고 싶다. 첫째는 '람프의 노래엔 비가 내린다', 둘째는 히라가나로 쓴 꿈, 유메, ゆめ, 셋째는 멜랑꼴리다. 람프의 노래엔 비가 자주 등장한다. 가사를 쓰는 사카키바라 카오리는 '좋아하는 것만 자꾸 쓴다'고 말했는데 그들의 세계에서 비는 날씨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나는 람프의 음악에서 비가 내리는 장면을 홍상수 감독의 '그 후'에서 김민희가 택시를 타고 가다 창밖의 눈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과 오버랩해본다. 감정이나 감각의 차이는 분명히 있지만 둘은 모두 이곳이 아닌 어딘가를 바라본다. 다른 곳이 존재할지 모른다는 느낌, 이 가녀리고 아스러질 것 같은 연약한 자리가 람프의 세계를 채운다. 그래서 람프에게 꿈은 한자가 되면 안된다. 그걸 한자로 써버리면 이들이 품어내는 세계가 무너져내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한자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느낌이 람프의 세계를 잠식한다. 실제로 이들은 일곱 번째 앨범의 타이틀인 꿈을 한자 夢가 아닌 히라가나 ゆめ로 썼다. 보다 유연하고 보다 개방적이며 보다 느슨한 히라가나야 말로 람프의 자리를 마련하는 유일한 현실이다. 그리고 멜랑꼴리. 람프에게 멜랑꼴리는 단순히 우울을 지칭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멜랑꼴리는 실패한 현실의 감정이고, 그러한 시간의 감각이다. 소메야 타이요가 작곡한 곡 '사치코(さち子)' 속 '해변을 달리는 화물 열차가 싣고 온 멜랑꼴리'라는 구절을 듣는 순간 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시간은 아직 흐르고 있었고, 빼앗겼다고 느꼈던 자리는 조금 남아있었다. 이들에게 멜랑꼴리는 곧 노스텔지아고, 노스탤지아는 곧 멜랑꼴리다. 람프의 음악엔 다른 감각이 존재한다. 이들의 노래는 소메야 타이요와 나가이 유스케가 작곡을 하는데 서로 다른 사람의 마음과 머리에서 나왔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조화롭게 스며든다. 사카키바라는 '감각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아요. 감각이 서로 너무 달아서'라고 말했다. 그 감각의 세계가 존재한다. 현실에서 소외받지만 영원으로 이어지고, 끝이 났지만 남아있는 그림움의 감정의 세계가. 람프의 노래가 들려온다.




11개월과 18개월. 람프가 세 번째 앨범 '나뭇잎 사이로 새어든 햇빛 거리에서(木漏陽通りにて)와 네 번째 앨범 '잔광(残光)' 레코딩에 들인 시간이다. 람프의 음악에서 레코딩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들은 리허설도 없이 레코딩을 하며 곡을 만들어간다. 1주일을 단위로 조금씩 소리를 겹쳐가고 다음 주까지 무언가를 생각해 가지고 와 소리를 다시 또 겹쳐간다. 이의 무한 반복이 람프의 방식이다. 그러니 어떤 곡이 완성될지의 그림이 처음에는 없다. '최종적인 형태는 보이지 않아요. 단, 곡의 멜로디나 코드는 있죠. 거기서부터 악기를 겹쳐가요. 꽤 오래하기 때문에 엔지니어는 우리 음악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인내심을 갖지 않으면 안돼요.' 소메야 타이요의 말이다. 겹쳐가는 것(重ねること). 람프는 더하기의 밴드다. 그들에게 뺄셈은 없다. 그리고 나는 이 더해가는 것의 작업이 감각의 실천이라 생각한다. 이들은 오랜 시간을 들여 어레인징을 하고 그렇게 완전함에 가까운 세계를 만들어낸다. 라이브보다 레코딩을 우선하고, 그 완전함의 감각을 구현한다. 다른 뮤지션들은 라이브가 즉흥에 가까운데 이들에겐 레코딩이 즉흥에 가깝다. 그리고 그 곳에서 희미하지만 분명히 존재는 하는 세계가 펼쳐진다. 나가이 유스케는 곡 작업을 하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며 '부풀린다(膨らませる)'란 표현을 사용했다. 아이디어의 단편에서 시작하는 세계, 이 확장을 돕는 것이 감각이다. 소리를 더해나가는 시간은, 음을 겹쳐나가는 자리는 아마도 감각의 세계일 것이다. 문득 그 곳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의 곡 중 ’A 도시의 가을(A都市の秋)’에는 '이대로 있고 싶지만 사랑은 끝이 나네'라는 구절이 있다. 좋아하는 계절은 짧고, 엔드롤은 금방 끝이 난다. 희미하고 아스라질 것 같은 세계는 이렇게 존재한다. 하지만 그 시간이 분명 우리에게 흐른다는 사실만은 선명하다. 람프의 노래를 들으면 감각안에 숨을 쉬는 느낌이 든다.



어떤 감각의 반응이었을 것이다. 람프의 음악을 어떻게 알게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마음 속에 남아있는 건 '씨네21'에 다니던 무렵 첫 출장으로 전주 영화제에서 데일리를 만들며 만났던 일본에서 온 세 명의 남자와 여자다. 소메야 타이요는 '사치코'에 대한 이야기를 묻는 질문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멋 부린 표현일지 모르지만 그냥 우연히 완성된 느낌이에요'라고 말했는데, 내게 람프가 그러하다. 아직은 일어를 잘 못했을 때,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를 노래하는지 모르고 들었던 때 람프는 내게 작은 방이었다. 그냥, 그저 그랬다. 처음으로 간 파리에서, 게스트 하우스의 컴퓨터를 두드리며 속으로 울었던 건 람프의 노래를 들으면서였고, 도쿄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일하며 미타카다이 역에서 집까지 걸으며 하루를 정리했던 것 역시 람프의 노래를 들으면서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람프는 어느새 17년차가 되었고, 일곱 장의 앨범을 낸 뒤 여덟 번째 앨범 '그녀의 시계(彼女の時計)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일어 수준이 꽤 늘어 통역 없이 람프와 인터뷰를 했다. 비슷한 감정으로, 같은 감각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다는 걸 람프가 알려주었고,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도 존재한다는 것 또한 람프의 노래를 통해 느꼈다. 그저 생각으로만 갖고 있던 것들을 감정으로, 감각으로 생생하게 느끼게 해준 것 역시 람프다. 나가이 유스케가 만든 '심포니(インフォにー)'엔 이런 가사가 나온다. '꿈의 다음을 찾기 위해 조심스레 눈꺼풀을 닫았다.' 도망치는 느낌으로 눈을 감았었다. 닫은 눈꺼풀 앞으로 펼쳐지는 어둠이 편안했다. 그렇게 그 안에 숨었고 시간을 속였다. 하지만 람프의 음악은 이것이 도망이 아니라고, 숨은 게 나쁜 게 아니라고 노래하는 듯하다 .눈꺼풀 안쪽의 세상에도 시간은 흐른다고 노래하는 듯하다. 세상은 논리와 이성으로 굴러간다. 그렇게 구성되고 그렇게 짜여졌다. 하지만 어쩌면 감각으로 이뤄진 세상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람프는 그 '어쩌면'의 세계를 구현한다. 평행 우주로서의 시간, 그곳에 음악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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