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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Jan 24. 2018

화이트 셔츠를 보면 일본이 보인다

화이트 셔츠는 일본을 닮아있다.


셔츠를 잘 입지 않는다. 꼼 데 갸르송과 H&M의 셔츠가 여러 벌 있지만 입는 일이 한 손에 꼽을 정도다. 아우터와 함께 입으면 목선이 어딘가 어색하고 아우터 없이 셔츠만 입을 수 있는 날은 1년 365일 중 1/10 정도다. 어느새 여름은 더 여름이 되었고 겨울은 더 겨울이 되었다. 더구나 화이트 셔츠에 타이를 매는 날은 거의 '기념일' 수준이다. 내 체형 상 국내에서 몸에 맞는 기성복을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하고, 이제는 면접 볼 나이도 지나버렸다. 하지만 화이트 셔츠에 대한 동경이 있다. 화이트 셔츠는 셔츠 이상이라는 생각을 한다. 다림질을 해 팟팟하게 선 옷깃, 청결함 그 자체를 얘기하는 실루엣, 그리고 조금도 모나지 않고 하양으로 수렴되는 정갈함. 실제로 일본에선 화이트 셔츠를 갖고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하얀 셔츠를 돌아보는 여행(白いシャッツをめぐる旅)이란 이름으로 진행된 이 캠페인은 화이트 셔츠에 관한 다양한 서사를 풀어낸다. 일상 속에 화이트 셔츠를 바라보고 그 안에서 화이트 셔츠의 시간을 이야기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쿠마모토의 셔츠를 생산하는 회사 HITOYOSHI의 타케나가 씨는 '일요일 저녁 TV를 보면서 일주일 분의 셔츠를 다린다. 옷걸이에 일주일 분의 옷을 골라 걸어놓고 매일의 일정을 이미지화하면서 다리미 질을 한다'고 말했다. 번거롭다. 귀찮다. 성가시다. 하지만 타케나가 씨는 이런 말도 한다. '냉장고 문을 열면 닫겠죠. 그것과 같은 거에요.' 다림질을 하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화이트 셔츠는 일본을 닮아있다.



'하얀 셔츠를 돌아보는 여행'은 '다림질을 하는 방법'에 관해 얘기한다. 내가 수도 없이 실패하고 좌절하다 못해 엄마에게 매달렸던 대목이다. 한 쪽을 다려 놓으면 다른 쪽에 주름이 생기고, 그 주름을 펴놓으면 다시 반대 쪽이 구겨지는 게 나의 다림질이었다. 하지만 타케나가 씨는 다림질을 단순히 구겨진 옷을 펴는 일로 생각하지 않는다. 다림질을 다림질의 영역을 너머 옷의 자리에서 사고하고, 섬세하고 꼼꼼하며 정확한 시간 속에 데려다 놓는다. 그 과정을 보다 나는 일본인의 어떤 기질과 마주했다. 타케나가 씨의 말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분무기로 물을 듬뿍 뿌린다. '기껏 말려놨는데 다시 적셔?'라고 할 정도로. 그 다음엔 옷깃을 다리미 대에 펼쳐 놓는다. 단, 옷깃의 바깥 쪽을 다릴 것이므로 네임택이 하늘을 보게 한다. 옷깃의 바깥 쪽부터 날개 부분을 조금 잡아당기는 정도의 감각으로 앞부분에서 1/3 지점까지 천천히 움직인다. 힘을 줘서 한번에 다리면 주름이 생기기 마련이니 둥둥 뜨는 감각으로 끝에서부터 정중앙까지 서서히 다가간다. 옷깃의 몸체 부분은 입었을 때 보이는 부분만, 그러니까 좌우의 끝만 다리고 이 지점에서 옷을 입었을 때와 같은 모양이 되게 옷깃을 접는다. 옷깃의 몸체에서 대체로 5mm 정도 되는 지점에서 날개가 꺾인다. 흡사 어린 아이를 다루는 것 같다.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도미노를 쌓아가는 태도같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은 옷이 어떻게 설계되었는가에서 도출된 결론이다. 일본은 항상 정공법의, 정석의 시간을 산다.



10년 전, 내겐 작은 충격이었다. 도쿄에 건너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씨네21'에서 함께 일하다 먼저 일본에 건너간 동료와 신주쿠 어느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가게는 어두운 분위기의 꽤나 운치 있는 곳이었는데 테이블 아래 나무로 만들어진 바구니가 있었다. 점원은 내게 가방을 그곳에 넣으라고 말했다. 물론 이런 바구니 혹은 짐을 넣을 수 있는 공간이 지금 한국에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당시는 무려 10년 전이었고, 내가 갔던 곳은 그리 고급스런 레스토랑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짐을 위한 공간은 화장실에도 있었다. 일을 보기 위해 혹은 일을 본 후 손을 씻기 위해 짐을 어디에 두어야 하나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일을 본 뒤 손을 씻으러 가며 누가 가방을 가져가진 않을까 노심초사 해야하는 한국과는 달랐다. 내가 여기서 본 건 일상의 틈과 틈을 사유하며 만들어낸 배려였고, 시간을 그저 살아가는 것이 아닌 만들어가는 것으로서 바라보는 자세였다. 한국에는 없는 그런 시간의 자락이 흘렀다.



무인양품의 'Re-Size' 캠페인을 기억한다. 기존의 사이즈는 우리의 몸을 대변하지 못한다며 사이즈를 재고하자는 취지였다. 어느 날 페이스북에서 무인양품의 발판 사진을 올려놓은 글을 보았다. 그 발판은 에스컬레이터의 방향에 따라 로고의 방향을 반대로 배치한 것이었다. 올라갈 때도, 내려갈 때도 '무인양품'이란 로고가 반대로 뒤집혀 보이지 않게. 일본은 생각한다. 시간을 그저 흘려보내지 않는다. 그들의 강점이라 불리는 섬세함과 디테일의 힘은 여기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똑같은 나무 젓가락도 일본의 것은 가시가 돋히지 않게 나뉘고, 한국의 것은 먹으며 가시가 목에 걸리진 않을까 걱정하게 한다. 일본은 걱정을 했기 때문이다. 과자나 빵을 포함 무언가의 포장을 뜯을 때도 수월하게 흘러가는 건 일본의 것들이다. 특히나 한국의 세트로 묶여있는 칫솔과 면도기의 포장은 거의 사람을 해부자로 만든다. 편의점 도시락을 위한 밑이 평평한 비닐봉지를 먼저 사용한 것 역시 일본이고, 따뜻한 버거와 차가운 음료를 테이크아웃할 때 둘을 서로 다른 봉투에 나누어 담아주는 것 또한 일본이다. 무엇이 다를까 생각한다. 무엇이 그들을 섬세하게 만들었을까 생각한다. 무엇이 우리를 불편 속에 두었을까 생각한다. 시간을 정성껏 공들여 사는 것, 생각과 사유를 더해 시간의 품을 넓히는 것, 동시에 깊이를 만드는 것. 일본의 힘은 시간의 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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