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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Apr 06. 2017

나에게 집이란...

나에게 집은 내 몸이였으며 벗이였다

지나간 일들을 자꾸 되돌아보게 된다. 수박을 사들고 걸었던 합정동 거리를, 시골밥상을 거쳐 르 알라스카에서 빵을 사갔던 신사동 시절을, 새벽같이 일어나 지하철 로케 촬영을 하고, 개미 사진을 코팅지에 프린트 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촬영을 진행했던 날들을. 2년전 여름 성북동 한옥에선 틸다 스윈튼을 인터뷰 했고, 한 해 전 이른 여름엔 포틀랜드에서 20여명의 포틀랜드 사람들과 교류를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오래 전 기억 속 깊숙이 남아있는 건 3년을 넘게 산 경리단 집이다.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 2동 63번지. 4층 높이의 지하 1층이었던 이 원룸은 내 원룸 역사상 최악의 집이었다. 우선 습기가 많이 차 곰팡이가 여기저기 펴있었고, 벽은 곳곳이 구불구불했다. 철장에 가로막힌 창 밖에는 수풀이 우거저있었으며 주방 환기구로는 먼지가 쉬도때도 없이 쳐들어와 조리를 하기가 무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은 곱등이들의 천지였다. 처음 그 정체 불명의 시커먼 벌레가 나왔을 때 난 그게 귀뚜라미인줄 알았다. 잡을 생각도 하지않고 그저 빨리 뛰어 도망가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그 이후 나는 곱등이와의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현관을 열고 닫을 때마다 곱등이를 때려 잡았고, 집 안으로 쳐들어온 놈들은 발로 짓이겨 죽였다. 그야말로 벌레와의 불편한 동거 생활이 시작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경리단 집에서 3년을 넘게 살았다. 우선 창 밖으로 남산이 내려다 보였다. 경리단 초입부터 걸어가는 오르막길은 허리가 꼬부라질 지경이었지만 그렇게 올라 도착한 내 집은 서울 전체를 구경하기에 으뜸인 장소였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밖을 .바라보며 마감을 했다. 이종석과 인터뷰하기 위한 질문지를 작성했고, '맛없는 맛집'을 찾기 위해 인터넷 서칭을 했으며, 저널의 한 페이지를 쓰기 위해 머리를 쏴매기도 했다. 그리고 이 허름한 집은 의외로 냉난방이 잘 됐다. 여름엔 에어콘, 선풍기 없이도 살았고, 겨울엔 화장실까지 난방이 됐다. 곱등이와 곰팡이가 득시글거렸지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데는 별 불편한 게 없었다. 글을 쓰는 데 공간은 중요하기도 하지만 중요하지 않기도 하다. 나는 노트북과 테이블 하나만 있으면 그 어디에서도 글을 쓴다. 상수동의 까페 비하인드, 엄마 집의 식탁, 그리고 내 방의 침대 위가 그곳이다. 물론 필요한 조건은 있다. 일단 앉은 자리가 편해야 하고 적절한 소음이 있어야 한다. 음악도, 말하는 사람들의 소리도 좋다. 너무한 정적은 오히려 조용해 방해가 된다. 그러니까 사람 사는 곳에서 글을 쓴다.


2007년 혼자 나와 살기 시작해 총 일곱 곳의 원룸을 돌며 생활했다. 처음엔 둥지를 튼 노고산 동은 부엌과 욕실이 공용인 고시원 풍의 개미 쪽방이었고 두번째 산 신수동은 전보단 조금 좋은 원룸이었다. 그리고 조금씩 나의 주거환경은 좋아졌다. 도쿄 미타카의 16평짜리 원룸, 삼선동의 6평짜리 원룸, 합정동의 12평짜리 복층 오피스텔, 그리고 신사동의 12평짜리 원룸. 넓기만 넓어지 그 외엔 최악이었던 경리단 집을 제외하면 살만한 곳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삶의 조건이 나아졌다고, 집이 더 좋아졌다고 내 삶의 질이 동반해 나아지거나 좋아진 건 아니었다. 나는 어디에서도 하던 대로 했고, 살던 대로 살았다. 물론 달라진 건 있다. 집과 나 사이의 관계가 매번 새로운 색으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특히나 글을 쓸 때 더욱 더 그랬다. 도쿄의 미타카 집에서 살 때 나는 바닥에 앉아 미야자키 하야오의 원고를 썼다. 김영사의 제안으로 '살아있는 위인전' 중 한 편을 담당해서다. 수많은 책을 뒤지고, 잡지를 훑으며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과 말을 적어 내려갔다. 이 작업은 앉아서 해야만 하는 글이었다. 그리고 지브리 스튜디오가 있는 미타가 집에서 써야만 하는 것이었다. 나는 무인양품의 갈색 러그 위에 타원형의 테이블을 놓았고 그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한 자, 한 자가 나의 미타가 집에서 영감을 받아 써내려져갔다.


독립을 하고나서부터 집은 곧 내 몸이 되어버렸다. 집이 아프면 나도 아팠고 내가 아프면 집도 아픈 것 같았다. 그래서 형광등 하나가 나가 있으면 마음 한 구석이 찜찜했다. 현관에 곱등이가 날뛰고 있으면 얼굴 위로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집을 예쁘게 꾸몄고 더러워지지 않게 청소했다. 글을 쓰다가 잘 풀리지 않으면 책상을 정리하기도 했다. 동시에 집은 곧 나의 친구이기도 하다. 홀로 집안에 있다보면 얘기할 상대가 집밖에 없다. 이사를 해 서로를 알아가고 서로에게 적응해가며 친분을 쌓는다. 내가 집에 익숙해 갈 때쯤 집도 나에게 익숙해져 온다. 집에서 나는 회사 사무실 다음으로 많은 글을 썼다. 어느 날은 창 밖의 빛이 영감이 되기도 했고, 또 어느 날은 방바닥의 따뜻한 온기가 글 쓰기의 자양분이 되기도 했다. 노고산동에서는 노고산동 나름의 글을, 신수동에서는 신수동 나름의 글을 썼다. 삼선동, 합정동, 신사동 역시 마찬가지다. 나에게 집은 내 몸이였으며 벗이였다. 그래서 나는 나와, 그리고 내 벗과 함께 글을 써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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