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NORESQUE Jun 29. 2019

2020도쿄가 다시 도쿄로 태어나는
날들의 기록 (Ⅰ)

끝이 아닌 마지막은 분명 내일을 품고있다.


도쿄를 떠나온 날, 도쿄를 생각했다. 짧은 출장이든, 조금 긴 여행이든, 잠깐 들른 길목이든, 도쿄는 언제나 공항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무겁게 하곤 한다. 수많은 사람들, 여전하거나 변해버린 거리들, 복잡하게 얽힌 선로를 일정한 속도로 달리는 전차를 바라보며, 나는 어쩌면 나홀로 나름의 시간을 살았는지 모르겠다. 도쿄를 알고 20여 년, 그곳엔 100년 전통의 노포를 한 오래된 얼굴 곁에 최첨단 구르메가 매일같이 생겨나고, 스크램블 교차로의 스쳐가는 사람들은 도시 특유의 무드로 혼자를 혼자이지 않게 한다. 모든 게 뒤죽박죽 섞여있어 안겨주는 대도시의 편안함, 지나간 날들이 어제로 남아있는 이상한 노스탤지아의 푸근함, 회사를 나오고 혼자가 된 뒤 자꾸만 뒤를 돌아본 건, 어쩌면 도쿄와 나 사이 알게모르게 쌓여있던 날들의 아직 오지 않은 시간들 때문인지 모르겠다. 아직도 연호를 쓰는 그곳에선 하나의 시대가 저문 뒤 또 다른 시대가 떠오르고, 나는 조금 바보같은 희망을 꿈꾼다. 일본은 머나먼 이별이 아니면 '사요나라(안녕)'라 말하지 않고, 끝이 아닌 마지막은 분명 내일을 품고있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그라데이션. 그 시간의 도쿄를, 나는 생각한다.

록뽄기의 ‘아오야마 북 센터’를 기억한다. 도쿄이지만 도쿄가 아닌 듯한 외곽의 미타카(三鷹), 너무나 알려지지 않아 ‘어디에 사느냐’고 물으면 ‘키치죠지 쪽’이라 얼버무렸던 그 곳에 살던 시절, 도쿄국제영화제 취재 차 도쿄에 온 선배를 그곳에서 기다렸다. 일반 대형 서점과 달리 들어서자마자 계단이 보이고, 비교적 조각조각 나뉘어진 책장이 서점이라기 보다 책방의 분위기를 품은 그곳은 아침 5시까지 영업을 하는 꽤나 독특한 서점이었다. 도쿄를 중심으로 일본 곳곳에 10여 개의 지점을 운영하면서도 마이너한 책들을 메인 선반에 진열하고, 늦은 밤 거리에 불빛을 비추며 늦은 귀갓길의 샐러리맨들을 기다리던 ‘아오야마 북 센터 록뽄기’가 지난 여름, 38년의 문을 닫았다. 동네가 가진 특유의 세렴됨에 자주 찾지는 않았지만, ‘아오야마 북 센터’가 남긴 빈자리는 이상하게 오래갔다. 근래에 도쿄에선 자꾸만 이별 소식이 들려온다. 2020년 올림픽을 준비하는 새로움이 동반하는 어쩔 수 없는 헤어짐일 수 있지만, 내게 지금 도쿄가 보여주는 이별은 그저 마지막을 고하는 이별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시모키타자와 상점가에 나붙은 ‘87년간 감사했습니다’란 문구 속엔 분명 아직 떠나가지 않은 날들의 물컹한 울림이 스며있다. 나날이 높아지는 스카이라인, 연일 들려오는 망치질 소리, 생경하게 들려오는 이별과 쓸쓸해진 거리. 하지만 변화의 하루하루를 어제처럼 살아가는 사람들과 거리에서, 나는 도쿄에 남아있는 어제의 흔적을 바라볼 수 밖에 없다.


도쿄는 변화한다. 도쿄는 변하지 않는다. 도쿄는 이상하게 이 모순의 두 문장으로 설명되는 도시다. 전통과 노포의 거리 한켠에 최첨단 유행과 트렌드가 매일같이 갱신된다. 100년이 넘는 역사의 긴자 상점가는 H&M이 일본 진출을 염두하고 첫번째로 고른 거리이고, 메이지(明治)부터 헤세이(平成)까지 네 번의 연호를 관통한 허름한 역사(駅舎) 하라쥬쿠는 구르메 테이스팅 마켓으로 가장 먼저 손꼽히는 곳이다. 도쿄엔 변화를 변화가 아닌 어제, 혹은 오늘, 아니면 내일로 바라보는 시간이 흘러간다. ‘소니’가 50년의 역사를 매듭지으며 ‘소니 빌딩’ 자리에 지은 ‘긴자 소니 파크’는 지하 4층의 공원 구조를 하고있고, 이 공원은 2022년 ‘소니 빌딩’이 완공되기까지 기간 한정으로 운영된다. 그야말로 어제와 내일을 잇는 가교로서의 공간. 도쿄엔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교차하고, 서로 다른 시간이 도쿄란 이름으로 공존한다. 도쿄에 도착한 헤세(平成)의 마지막 날, NHK는 영화 ‘백 투더 퓨처’를 방영했다. 지난 6월 폐점한 록뽄기 ‘아오야마 북 센터’ 자리엔 ‘분끼츠(文喫)’란 이름의 책방이 오픈했고, 영화관 ‘시네마 라이즈’가 폐관을 고한 2010년 이후 시부야 스페인자카 길목은 라이브 하우스 ‘WWW’가 이어가고 있다. ‘파친코나 게임센터가 들어서면 뭔가 슬플 것 같았어요.(’분끼츠’ 부점장 이즈미 하야시) 지하에 남아있는 어제의 시간들, 영화관의 단사(段差)를 간직한 독특한 공연장. 어제를 기억하며 오늘을 만들 때, 변화는 왜인지 내일을 닮아있다.

단순히 이야기하면, 도쿄는 지금 격심한 변화 속에 있다. 시부야 주변은 365일 공사중이고, 하라쥬쿠 역사(駅舎)는 몇 년 째 완성된 된 길을 걸어본 적이 없고, 드라마 ‘이케부쿠로 웨스트 게이트 파크’로 유명해진 IWGP는 어느새 공사판에, 동서가 확연히 구분됐던 신주쿠는 카부키쵸(歌舞伎町)를 비롯 동쪽의 대대적 개발로 전혀 다른 내일을 예고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해 오픈한 시부야 역 인근 고층 빌딩 이름이 ‘시부야 스트림’이란 사실을 알았을 때, 맞은 편 스크램블 교차로의 ‘스크램블’이 떠올라 도시 속 사람과 사람, 너와 나의 자리가 느껴졌다. 서로 다른 세 개의 빌딩을 하나로 재개발해 완성된 마루노우치(丸の内)의 ‘니쥬바시 스퀘어(二重橋スクエア)’는 모든 점포가 노면을 바라보게 디자인돼 건물 하나하나에 담긴 거리의 풍경을 이어가고, 시부야에서 다이칸야마 방향으로 세워진 ‘시부야 브릿지’는 이름 그대로 본래 도보로 이동할 수 있었던 시부야 인근 지역을 이어주는 가교 빌딩 역할을 한다. 새로움과 변화로 물드는 지금의 도쿄이지만, 그곳엔 어제를 외면하지 않는 오늘이 있다. 지역이 쌓아온 오래된 내일이 있다. 컬쳐 패션 브랜드 Beams가 도쿄의 목욕탕 550곳과 진행한 콜라보레이션엔 어김없이 어마어마한 갭이 존재하지만, 그만큼의 위화감을 아우르는 품을 도쿄는 갖고있다. 집으로 돌아오기 전 날 밤, 나는 우리 집 강아지를 위해 10년 넘게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신주쿠의 애견숍 ‘Pet Paradise’에서 노란색 탱크탑을 하나 샀다.


지난 겨울 왜인지 찾아가 본 오래 전 동네엔 내가 살던 집이 사라졌다. 미타카다이(三鷹台) 허름한 역사를 나와 한참을 걸어 도착하는 2층짜리 건물 101호. 바람이 불면 창틀이 시끄럽고, 저녁 다섯 시면 인근의 초등학교에서 차임벨이 들려오던 10여 년 전 나의 집. 지금 도쿄 곳곳에 벌어지는 변화는 어김없이 사라짐의 풍경을 동반한다.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는 복잡하고 걷기 힘들기로 유명하지만, 그곳 츠타야의 6층은 내게 하나의 도쿄였다.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면 보이는 잡지를 보고있는 사람들. 이름은 커녕 누구인지도 모를 그들이 주는 도심의 정경은 이상하리만치 나를 누군가의 곁에 자리하게 했다. 그저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있을 뿐인데, 그 의미 없는 순간들이 도쿄를 채워간다. 하지만 그 곳의 풍경은 이미 4년 전에 사라졌다. 츠타야 6층은 잡지 코너와 ‘카페 컴퍼니’가 운영하는 ‘와이어드 카페(Wired Cafe)’가 나란히 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앤티크한 내장과 샹제리에, 그리고 다수의 외서로 장식된 카페 ‘Wired 1999’와 잡지를 중심으로 한 츠타야 서점이 달랑 계단 하나만으로 이어져있다. 이 곳은 ‘Shelf67’이란 이름으로 새단장을 했다. 소위 심리스(Seam-less)로의 변화이지만, 나는 왜인지 지독한 소외를 느낀다. 시부야는 지금 가장 격변하는 거리이고, 오래 전부터 좋아했던 책방 ‘시부야 퍼블리싱 북 스토어’가 있는 거리는 ‘깊숙한 시부야’란 의미의 ‘오쿠 시부(奥渋谷)’라 불리기 시작했다. 예견된 변화, 알 수 없는 변화. 도시에서 기대와 실망은 그저 스쳐 지나간다. 

책방이 카페와 만나고, 호텔이 책방을 품고, 영화관이 갤러리가 되고, 차실(茶室)이 캡슐 호텔로 변하고. 피상적으로 보면 지금 도쿄는 대대적인 콜라보레이션의 현장이다. 무엇과 무엇의 융합인지가 애매모호할 정도로 가늠할 수 없는 변화가 지금 도쿄를 다시 쓰고있다. 하지만 명확한 건 신주쿠 ‘Book and Bed’에서 4월의 마지막 밤을 보내며 나는 호텔에 투숙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감각을 느꼈다. 다양한 장르의 결합이 보여주는 새로운 내일인 것 같지만, 지금 도쿄를 물들이는 건 여전히 책방이고 싶고, 여전히 영화관이고 싶고, 여전히 카페이고 싶은 공간의 조금 다른 오늘이다. 근래 유행처럼 떠오른 이야기같아도, 맥주를 마실 수 있는 책방 시모키타자와(下北沢)의 ‘B&B’가 오픈한 건 2012년 겨울이고, 이곳이 전해주는 건 무엇보다 책과의 농밀한 시간이다. 지난 12월 문을 연 영화관 ‘Uplink 키치죠지’는 갤러리는 물론, 셀렉숍, 술을 제공하는 바가지 갖추고 있지만 100여 편 이상의 영화 전단지가 10m에 달하는 벽을 가득 채우고있다. 2018년 봄 오이마치(大井町)에 문을 연 네슬레의 수면 카페 ‘네스카페 수면카페’ 역시 카페와 호텔의 융합이라기보다 커피와 수면의 불편한 동거를 풀어내기 위한 공간이다. 진보쵸(神保町)의 ‘망가 아트 호텔’은 만화의 히키코모리적인 부정적 이미지를 오히려 전면에 드러낸 만화 스페이스다. 서로 다른 두 공간의 덧셈이 아닌, 시대의 변화에 맞춰 확장하고 번져나가는 그라데이션. 스치고 만나면서 퍼져나가는 범짐의 도쿄. 그 풍경 속에 지금의 변화가 태어난다.


도시가 개인에게 다가오는 건 사실 사소하고 소소한,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순간들의 쌓임 덕분이기도 하다. 약자로 SPBS라 불리는 ‘시부야 퍼블리싱 북 스토어’를 알게된 건 도쿄에 건나가 외지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한 10년 전 겨울이었고, 시부야 인근의 정보를 담아 소식지를 발행하는 그곳을 언젠가 내 삶에 품고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시부야 역 인근과는 180도 이상으로 한적한 그곳엔 밤 늦은 시간까지 불을 밝히는 서점이 있다. 오래된 벽돌 담장과 너른 창, 서점은 물론 그 안의 편집부까지 훤히 드러다 보이는 구조를 가진 SPBS는 지금 생각하면 꽤나 앞서나간 책방이다. 비지니스 계간지 ‘프레지던트’의 편집자를 비롯 다수의 잡지, 그리고 서적의 편집 일을 해온 후쿠이 세이타 대표가 2008년 시부야 골목길 카미야마(神山)에 출판과 서점을 연계한 책방을 오픈한 것이 시작이다. 지난 해 10주년을 맞았고, 슈슈(Chou Chou)란 이름의 자사 셀렉트 숍 브랜드로 책 이외의 아이템도 취급하고 있다. 다이칸야마 츠타야 T-Site보다 10년 정도 앞선 시도. 하지만 여기에 시장을 내다보는 선구안 같은 건 없고, ‘매일을 특별하게 한다’는 모토와 책과 마을, 그리고 사람들을 잇는 아날로그적 시간이 차곡히 쌓여있다. ‘’프레지던트’가 30만 부씩 팔린다고 해도 실감이 없었어요 그런데 내가 만든 책을 누군가 서점에서 손에 들고 계산하는 모습을 본 순간, 이게 몇 배는 더 리얼이란 생각이 들었죠.’ 어느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마음과 마음의 커뮤니케이션. 도시는 가끔 데자뷔를 느끼게 하고, 나는 거기서 펼쳐지는 내일을 생각한다. SPBS는 지난 해 겨울 오픈한 ‘Book and Bed’ 신주쿠의 책 셀렉션도 담당하고 있다.

최근 도쿄에는 ‘오쿠(奥)’란 말이 자주 들려온다. 그냥 시부야가 아닌 ‘오쿠 시부야’, 그냥 다이칸야마가 아닌 ‘오쿠 다이칸야마.’ 유치한 여행객의 시선으론 단순히 ‘나만 아는 도쿄’를 알아가기 위한 여정처럼 들리지만, 말 그대로 도쿄의 깊숙한 곳, ‘오쿠’를 이야기하는 지금의 도쿄는, 체인점이 몰리기 쉬운 역 주변, 그 너머의 도쿄를 생각하게 한다. 1500엔이나 주고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로 화제가 된 책방 ‘분끼츠’는 그만큼의 가치를 제공하는 책과의 시간으로 디자인되었고, ‘망가 아트 호텔’은 만화방과 호텔의 결합이 아닌 만화 세계를 끝까지 탐닉하기 위해 만들어진 ‘히키코모리 100%’ 공간이다. ‘망가 아트 호텔’은 보통 ‘욕조에 몸을 담그다’라 말할 때 쓰는 ‘츠카루(浸かる)’로 호텔을 설명하고 있다. 연일 새로움을 향해 달려나가는 듯 싶지만 도쿄의 공간은 때때로 원점을 바라본다. ‘분끼츠’ 간판에 쓰여진 건 한자로 책(本), 달랑 한 글자 뿐이고, 시모키타자와의 책방 B&B가 맥주를 파는 건 책방의 운영을 위한 비지니스적 대안이다. 2012년 B&B를 오픈한 우치누마 신타로 대표는 책방은 ‘곱하기’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자신의 저서 ‘책의 역습(本の逆襲)’에 쓰기도 했다. 책 곱하기 맥주 곱하기 잡화 곱하기 이벤트. 이곳에 진열된 잡화와 가구는 모두 구매가 가능하다. 결코 적지 않은 양의 잡화를 진열하면서도 SPBS가 조금의 여지도 없이 책방으로 보이는 건 공간을 아우르는 책의 다양한 갈래 덕택이고, ‘분끼츠’에서의 1500엔이 아깝지 않은 건 나도 몰랐던 책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공간 구석구석 숨어있기 때문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보이는 수 백권의 잡지들, 잡지가 놓은 선반을 열었을 때 보이는 관련 서적들. 도쿄의 내일은 이렇게 시작하기도 한다. 


ーつづく


*singles 6월호에 전편이 실렸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have a book night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