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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Jul 02. 2019

2020도쿄가 다시 도쿄로 태어나는
날들의 기록 II

도쿄, ‘Complex’의 풍경은 아마도 이런 그림이다.


도시는 은연중 한 걸음 다가오는 듯 싶지만, 갑자기 멀리 달아나기도 한다. 일본의 멀티 플렉스 영화관 ‘도호 시네마’가 입장료를 1900엔으로 100엔 올린다는 뉴스를 보았을 때, 지난 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을 보았던 시부야 ‘도호 시네마’가 떠올랐다. 좁은 로비와 많은 사람들, 앉을 자리 하나 없는 곳에 팝콘을 파는 카운터는 화려한 네온을 빛내고, 내가 느낀 건 결국 돈으로 치환되는 영화와 사람 하나하나의 시간이었다. 그곳은 매달 14일 ‘도호 데이’라 이름을 붙여 조금 싸게 영화를 볼 수 있지만, 나는 두 시간 남짓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다. 시부야엔 ‘분카무라’ 뒷쪽으로 ‘유로스페이스’가 있고, 조금 걸어 국도 246길변에 ‘이미지 포럼’이 있다. 두 곳 모두 아트 계열의 영화를 상영하는 미니시어터. 도시에서 기호를 지킨다는 건 어쩌면 자신에게 어울리는 거리를 만나는 일인지 모르겠다. 

최근 키치죠지에 멀티 플렉스와 미니 시어터, 그 중간 즈음인 ‘미니 콤플렉스’ 형태의 극장이 생겨났다. 갤러리와 작은 숍이 있고, 맥주와 크래프트 콜라를 팔고, 상시적으로 전시를 하는 다용도 목적의 영화관 ‘Uplink 키치죠지’는 1995년 오픈한 ‘Uplink 시부야’의 2호점이자, 연장선이다. 아사이 타카시 대표는 ‘시부야 3관, 키치죠지 5관을 하나의 큰 틀 안에서 생각한다’고 말한다. 얼마 되지 않은 상영관에서, 상영 횟수를 줄이고, 작품 수를 늘이는 Uplink의 방식은 다양성을 품어내는 태도, 그 자체의 구현이다. 키치죠지 Uplink는 가장 적은 29석부터 가장 많은 98석 까지 모두 다섯 개의 스크린을 갖고있고, 각각의 스크린에 서로 다른 이름과 콘셉트를 붙였다. 키치죠지 점에서 일하는 최하늘은 ‘우드를 주재료로 사용한 ‘우드 관’은 사운드를 중시해 음향을 즐길 수 있는 스크린’이라고 설명했다. 영화에서 퍼져나가는 다양한 갈래의 영화적 시간들이 그곳에 있다. 5월 초 그곳에선 퀸에 관한 다큐멘터리 ‘퀸 히스토리 1973~80’이 상영되고 있었고, 또 다른 상영작 ‘빌 에반스 타임 리멤버드’ 관련 전시도 진행중이었다. 관내에 흐르는 음악은 데릭 저먼 감독 영화의 음악 감독으로 알려진 사이먼 피셔 터너의 오리지널 뮤직, 로비 천장을 장식하는 미러볼은 시부야 Uplink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클럽 Womb의 기증품이다. ‘콤플렉스’의 풍경은 아마도 이런 그림이다. 

지금 도쿄를 수식하는 세 개의 키워드는 다양성과 이어짐, 그리고 커뮤니티이다. 얼마 전 부터 시부야는 ‘차이를 힘으로 바꾼다’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있고, 호텔인지 책방인지, 책방인지 카페인지, 영화관인지 갤러리인지 경계가 불분명한 그라데이션과 심리스(Seam-less)의 변화는 다양성의 공존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영화관이 아닌 영화가 있는 자리, 책방이 아닌 책이 놓인 장소, 카페가 아닌 커피와 함께 하는 시간. 무엇이라 규정하지 않는 공간이 새로움의 자리를 남겨둔다. ‘왕도로 책을 바라보는 출판 업계에서 저는 미움 받는 사람이에요. 책이라고 그 안에서만 사고하는 것보다 열어놓고 바라보고 만들어가는 게 의미있게 느껴집니다.’ 소메야 타쿠로가 디렉팅한 ‘분끼츠’에 새로운 책방의 내일은 없지만 잊고있던 책방의 내일이 존재한다. 선서실(選書室), 연구실(研究室), 킷사실(喫茶室), 전시실(展示室), 열람실(閲覧室) 등 다섯 개로 나뉘어진 공간은 독서의 다양한 방식을 제안하고, 소파는 물론 누워서 뒹굴 수 있는 형태의 좌석까지 마련된 건 책과의 시간을 일상의 다양한 프레임 안에서 소화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도쿄의 공간은 어김없이 사람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일상의 리듬으로 변화하고 있다. 유료 서점이지만 입구부터 잡지가 진열된 선반과 전시실은 무료로 공개되고, 보통의 책방처럼 길을 걷다 책만을 구입해 돌아가는 사람도 적지 않다. 어찌할 수 없이 변화하는 시대의 풍경 속에, 도쿄는 변화하지 않는 본래의 모습을 돌아보며 변화의 방향을 만들어낸다. 2018년 여름, 38년의 문을 닫았던 ‘아오야마 북 센터’ 록뽄기에 정해진 내일은 없겠지만, 나는 그곳에서 책과 마주했던 오래 전 기억을 돌아봤다.

‘분끼츠’란 이름을 처음 보고 읽지 못해 한참을 헤맸다. 자판에 입력을 해도 자동으로 맞는 한자가 떠오르지 않았다. 일본어는 종종 아는 한자임에도 읽지를 못해 곤란해질 때가 있는데, 그만큼 알지 못했던 내일을 품고있는 게 일본이다. ‘분끼츠’는 오랜 역사를 가진 일본의 찻집 ‘킷싸뗑’을 의식했다. 하야시라이스, 나폴리탄 등 ‘킷싸실’에서 제공되는 메뉴들만 봐도, 책이란 길고 긴 시간 속 ‘어제와 오늘이 만들어낸 그라데이션의 책방’이 떠오른다. ‘책은 혼자서 읽는다’는 개념을 지우고, ‘분끼츠’는 이미 존재했지만, 잊고있던 책과의 시간을 공간으로 만들어냈다. 소메야 타쿠로는 ‘개인적으로 킷싸뗑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했고, 최근 도쿄에선 킷사뗑을 찾는 젊은 사람들이 늘어나고있다. ‘킷사뗑은 공원과 닮은 부분이 있어요. 무엇을 해도 괜찮다는. 노트북 작업을 하든, 책을 읽든, 회의를 하든. 그런 다양성을 만들고 싶었고, 하나에 제한되어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 안엔 입장료를 1500엔으로 지정하며 ‘책방’을 ‘비일상’의 자리로 데려오려는 시도가 있고, 1970년대부터 시작된 또 하나의 책의 역사, ‘망가킷싸(漫画喫茶)’의 요소를 담아낸 부분 역시 자리한다. 진보쵸의 ‘망가 아트 호텔’을 만든 미코시바 마사요시가 만화를 아트로 바라보기 위해 오로지 숙박 위주의 폐쇄적인 공간을 고집한 것 역시 책을, 독서를, 책과의 시간을, 보다 뚜렷하게, 하나의 고유한 자리로 드러내기 위함이다. 다양성은 모두가 함께 공존하는 풍경이지만, 실은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그렇게 수많은 혼자가 나란히하는, 다소의 소외와 고독을 동반하는 풍경이기도 하다.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를 지나며 스쳐가는 수많은 사람들, 외롭지만 왜인지 그 무드에 취하곤 하는 거리는, 사실 누구도 홀로 두지 않는다.

도시에서 어제와 재회한다는 건 좀처럼 마주하기 힘든 일이 되어버렸는지 모른다. 10년 전 살았던 집은 그저 평범한 건물이 돼 알아볼 수 없었고, 좋아했던 햄버거 가게는 금연 광풍에 조금 기괴한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하지만 2nd란 말이 있듯, 어김없이 어제를 살아오는 곳들은 처음 마주하는 내일보다 싱그럽게 다가오곤 한다. 아마도 12년 전 무렵, 기자가 되고 2년차 취재를 위해 ‘이미지포럼’을 출근하듯 다녔을 때, 그곳으로 향하는 길목엔 야채와 고기를 사고 파는, 당시로선 생경한 풍경이 펼쳐지곤 했다. 시간이 흘러 이제야 알았지만 5년 전쯤 재미로 들렀던 아오야마 대로변의 ‘꼬뮨 246’은 12년 전 호기심에 둘러봤던 그 ‘파머스 마켓’의 확장판이었고, 2017년 ‘꼬뮨 2nd’란 이름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이곳을 기획한 ‘미디어 서프’의 쿠라모토 준은 ‘1주일에 한 번씩 열던 마켓을 매일 할 순 없을까 생각해서 꼬뮨을 시작했어요.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 지속적으로 가능한 커뮤니케이션의 장이 필요하다고 느꼈죠’라고 이야기했다. 그곳엔 모두 12개의 점포가 모여있고, 직접 재배한 식재료로 만든 음식이나, 조금 독특한 콘셉트의 가게로 ‘사회적 메시지를 발신한다.’ 단순한 가게가 아닌 삶의 방향, 자세, 태도를 제안하는 ‘장’으로서의 ‘꼬뮨 2nd’, 그곳의 역사는 벌써 20여 년이다. 사용하는 전기는 모두 자체 태양열 발전 시스템으로 만들고, 음식을 팔고 사는 당연한 관계를 사람과 음식, 음식과 사람,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도심의 커뮤니티’로 키워낸다. 명품과 브랜드의 거리 아오야마에, ‘꼬뮨 2nd’는 사람을 이야기하고, 후루기(헌옷) 이벤트’를 기획하고, 인디 레이블의 앨범 런칭 파티를 준비한다. ‘다들 자기 공간을 갖고싶어하는 분위기같은 게 있어요.’ 파티를 준비하는 스태프와 별 영양가 없는 말을 주고받다 도시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간다는 것에 대해 조금 생각했다. 공간을 만드는 건 사람이고, 마켓을 움직이는 건 내 곁의 타인이고, 지금 도쿄는 왜인지 타인을 바라본다.

https://youtu.be/ym6v1iBIKlI

오다큐(小田急) 그룹의 대규모 개발로 절반의 과거를 잃어버린 시모키타자와역 고가 아래엔 나이트 마켓이 열린다. ‘시모키타 케이지(下北沢ケージ)’란 이름으로 3년 한정 운영되는 이 곳은 ‘도심이면서도 개방감이 느껴지는 공간에서 지역의 문화를 잃지않고 만들어가는 장’으로 기획된 곳이다. 모든 가게가 도로에 면하고 있어 광장이 없는 시모키타자와의 유일한 만남의 장이고, 나와 나이가 같은 ‘혼다 극장’, 책방 크리에이터 1세대 우치누마 신타로의 책방 ‘B&B’와 함께 쌓여온 시간의 컬쳐를 체감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운영을 담당하는 ‘도쿄 피스톨’의 사쿠라기 아야카는 ‘음악, 연극, 헌옷 등 젊은 컬쳐의 뿌리가 깊은 마을 답게 그 안에서 뻗어나가는 커뮤니티를 의식했다’고 얘기했다. 하나의 음식점과 다종다양한 이벤트가 열리는 ‘이벤트 파크’로 구성된 이곳은 시모키타자와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컬쳐를 담아내는 커다란 하나의 그릇같은 느낌을 준다. 맞은 편 웬디즈 앞에 모여있는 젊은 남녀들의 모습만으로 그려지는 시모키타자와의 오늘이 이곳의 무한한 하늘과 묘하게 어울린다. ‘시모키타자와 케이지’엔 분명 오다큐 그룹과 규모로 비교할 수 없는 질감의 내일이 있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기업, 젊은 크리에이터들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여전히 시모키타자와일 수 있는 내일을 만들어가는 게 3년 내 목표’라고 말하는 사쿠라기 씨의 말을 들으며 이곳과 저곳, 여기와 거기를 이어주는 ‘가교’ 아래 ‘시모키타 케이지’의 자리가 새삼 뭉클하게 다가왔다. 도시의 삶은 길고, 내가 지나온 거리는 누군가가 걸어온 거리이고, 그렇게 무한히 남아있는 내일 속에, 바래지 않는 오늘을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10일 남짓 도쿄 곳곳을 돌면서, 애초 갖고있던 생각은 조금씩 어긋나기도 했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빌딩 사진에 반해 연락을 한 nobunobu1999는 미국의 ‘뉴요커’를 모델로 30년 넘게 발행되고 있는 잡지 ‘도쿄인’의 전 편집장 스즈키 노부오였고, 그가 수 만 km의 발품을 팔아 완성한 책의 제목 ‘시부이 빌딩(しぶいビル)’은 그저 지난한 어제의 기록이기도 했다. 신주쿠의 오래된 킷사뗑 ‘란푸루’에 앉아 지금의 도쿄를 이야기하는 그는 어느새 일상이 되어버린 ‘지나감’을 당연한 어제처럼 바라보는 듯했다. 5월의 첫 아침, 30년의 시대 ‘헤세이’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시대가 떠오른 거리에 길게 늘어선 ‘하츠우리(初売り-백화점 등이 새해 첫 영업을 시작하는 것) 행렬이 내겐 매우 새로운 내일처럼 비쳤지만, ‘Uplink’의 아사이 대표는 자신의 사무실 테이블에 앉아 ‘장사, 장사, 그저 장사’라며 웃음으로 넘겼다. ‘분끼츠’에서 언더커버, 레이 카와쿠보의 백과사전만한 책을 들고와, 입에서 살살 녹는 하야시 라이스를 먹으며 간직했던 시간도, 그 책방을 디렉팅한 소메야 타쿠로는 포틀랜드에서의 5년 전을 얘기하며 꽤나 먼 어제로 돌려놓기도 했다.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이건 그냥 여기가 아닌 어딘가에서 도착한 뒤늦은 내일일지 모른다. 그저 그런 세계 공통의 신드롬이거나 유행일지 모른다. 하지만 ‘시부야 파르코’가 50여 년의 시간의 문을 닫으며 공사 중인 현장 사진으로 내일을 예고하고, ‘소니’가 지하에 공원을 만들며 일부 구조를 그대로 남겨놓았을 때, 나는 도쿄에서 어제가 남겨놓은 내일을 바라봤다. 사람과 사람이 섞이고, 시간과 시간이 교차하는 도쿄에서, 엔드롤은 좀처럼 ‘사요나라’를 말하지 않는 법이니까.

다양성과 커뮤니티, 그리고 ‘이어짐.’ 지금 도쿄를 물들이는 풍경 속에 나는 자꾸만 ‘이어짐’이란 말을 떠올린다. 신주쿠와 시부야, 하라주쿠를 잇는 야마노테센(山手線)의 ‘이어짐’, 쇼핑몰의 에스컬레이터가 위아래로 스쳐가며 만들어내는 찰나의 ‘이어짐’, ‘도쿄진’의 전 편집장이었던 스즈키 노부오가 저술한 책의 제목은 ‘야마노테센을 걷다, 어른의 마을 산책’이고, 도쿄에서 사람들은 전차의 노선을 따라, 공간의 흐름을 따라 이어지고 헤어진다. 도큐(東急), 세이부(西武), 토부(東武) 등 철도 회사들이 놓은 선로에서 발생하는 마을, 그리고 문화는 도쿄의 일상을 그려내는 하나의 지도이기도 하다. 2월에 시작해 장기 전시 중인 ‘모리 미술관’의 ‘록뽄기 Crossing 2019-이어짐’을 보기 위해 10m가 넘는 줄을 섰다. 계단을 따라 앞에는 30대 커플, 뒤에는 아이를 안은 젊은 아빠. 개인주의의 도시, 도쿄는 지금 교차로 위에 서있는지 모른다. 서로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며 공간이 변화하고, 이야기가 생겨나고, 커뮤니티가 만들어진다. 취재를 위해 수 십 통의 메일을 보내고, 오지 않은 답변을 멍하니 바라보고, 88년에 태어난 작가 마에타니 카이(前谷開)의 작품을 보다, 어쩌면 도쿄의 시작, 가장 작은 도쿄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에타니의 작품 제목은 Capsule이 아닌 그 단어의 일본식 발음 ‘Kapsel.’ 캡슐 호텔에서 나체로 카메라를 멍하니 응시하는 그의 작품은 어딘가에 남아있는 타인과의 동침이다. 올 2월 닌교초(人形町)엔 차실을 모티브로 한 캡슐 호텔, 젠(Zen)이 등장하기도 했다. 잠이 유독 오지 않았던 날, WWW의 나토리 타츠토시를 만났고, 그는 종종 나의 말을 메모하곤 했다. 외로움과 외로움이 교차하는 시간, 변화하는 공간 속에 남아있는 시간을 바라보며, 나는 어제의 도쿄를 상상했다 .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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