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책은 사실, 사람을 가장 닮아있다.
근래 몇 년 국내에선 새롭게 업데이트되는 도쿄발 책방 소식이 가장 활발히 들려오지만, 지금 일본은 대만이 커다란 화두다. 한국보다 뒤늦게 불이 붙은 타피오카 신드롬을 비롯 올해 11월 대만의 30년 역사 청핀서점이 도쿄 니혼바시에 입점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며, 지금껏 보이지 않았던 책방의 커다란 레퍼런스가 등장한 분위기다. 청핀서점은 1999년 대만에선 처음으로 24시간 불을 끄지 않는 서점 타이페이 둔난 지점을 오픈했고, 2006년 랴이프 전반을 아우르는 청핀생활을 시작하며 일찌감치 책방을 +⍺ 곁으로 끌어냈다. 타이페이 둔난 지점에선 책은 물론 잡화 아이템의 셀렉트 코너, 체험형 워크숍 프로그램 등을 경험할 수 있다. 더불어 2018년 여름 타이페이와 종산, 그리고 슈안리에 MTR 역을 연결하는 지하 도로에 오픈한 청핑R79는 총 300m에 이르는, 아시아에서 가장 긴, 직선 형태의 서점이다. 이곳은 6만 여 권의 서적과 함께 문구, 잡화 아이템, 그리고 이벤트 콘텐츠를 갖추고 있다. 책이 아닌 ‘책과 OO’의 공간으로서의 책방. 츠타야 다이칸야마 T-SITE가 제시한 청사진인 줄 알았던 내일의 책방은 사실, 대만과 중국, 그리고 여기와 저기에서, 동시에 혹은 보다 먼저 그려지고 있다. 실제로 일본에선 츠타야가 청핑서점을 모방했다는 말이 알게 모르게 흘러나오기도 하지만, 이는 시간 싸움의 문제라기보다 책이 자아내는 독자적 시간, 책방이 가진 고유한 세계 속 사건사고에 가깝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 <길>을 인용하는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세상엔 바로 알 수 있는 것과 바로 알 수 없는 것이 있고, 책방은 어김없이 후자, 아날로그의 세계다. 10년 넘게 도쿄에서 책방 관련 활동을 하고있는 와키 마사유키는 “책의 느림이야말로 가치의 본질”이라고 얘기했다.
온라인 서점의 맹품이 지나가고, 책방은 책방으로 다시 태어난다. 디지털, 온라인 시대, 빠른 스피드로 흘러가는 세월 속 추락하듯 무너졌던 책방 산업은 그저 초라해 멸망 전야를 떠올리게 했지만, 책방은 사실 애초 숫자로 얘기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신간을 확인하고, 베스트셀러를 체크하고, 간편하고 빨리, 원하는 책을 골라 구매하는 일을 온라인이 척척, 손쉽게 해버리는 시대에, 책방은 시대 바깥에서, 혹은 깊숙한 시간에서, 나름의 리듬으로 새로운 책방을 만들어간다. 도쿄에서 12년째 책방을 운영하는 후쿠이 세이타 대표가 얘기하는 “서점은 옛날부터 마을 중심에서 정보의 발신지 역할을 했어요”에서의 서점, 청핀서점의 2대 사장이자 창업자의 딸 우 민 지에가 청핀서점의 도쿄 진출을 앞두고 말한 ‘”문화의 향기가 나고, 가치있는 시간을 만들고 싶다”에서의 문화와 가치. 책이 아닌 마을의 정보, 책의 향기가 아닌 문화의 향기. 청핀서점은 이제 청핀생활의 한 부분이고, 츠타야의 모회사는 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CCC, 컬쳐 소셜 클럽이다. 60여 년의 역사를 갖고있는 서점 준쿠도의 창업자 쿠도 야스타카는 ‘이제는 아마존이 하지 못하는 걸 해야한다’고도 말했다. 사실 주변만 살펴봐도 책은 머리맡에도 있고, 화장실 선반에도 있고, 자주 들고다니는 숄더백 안에도, 책상 구석에도 놓여있다. 그 무한 가능성에 지금의 책방이 있다. 책을 팔고 사는 단일한 관계에서 떼어놓기, 책을 소비에서 일상으로 데려오기, 책에 얽혀있는 시대의 관념을 풀어 해체하기. 책방을 만드는 집단 Yours Book Store의 디렉터 소메야 타쿠로는 책방은 ‘단 두 글자이지만, 그래서 가능한 사용법이 무한해요’라고 말했다. 철저히 비(非)온라인의 자리에서, 고유한 아날로그의 토양에서 책방이 문을 연다. ‘빠름’과 ‘편의’를 향해 치닫는 디지털 시대가 아날로그의 오래된 어제와 만나는 아이러니. 책방은 책방이라 책방이다.
책방이 나름의 시간을 산다고 할 때, 곤두박질 치는 그래프가 지금의 책방을 대변하지 못한다고 할 때, 책방은 숫자의 품을 바라봐야 하는 공간이다. 연이어 서점의 폐점 소식이 들려와도 대부분 100, 200평의 대형 서점 이야기이고, 5평, 10평의 소규모 책방들은 나름의 자리에서 부지런히 문을 여는 요즘이다. 국내와 일본에서 점점 확장하는 독립 서점은 물론 타이페이와 상하이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책방은 이미 시장 밖에서의 지형을 탄탄히 하고있다. 2016년 타이페이 역사 관광 지역 종산거리에 오픈한 PON DING은 포토, 일러스트, 디자인에 집중해 500 여권의 장서만을 갖춘 곳이다. 좁고 기다란 화이트 공간에 대부분의 책들이 표지가 보이도록 진열되어 있고, 커피를 포함 간단한 디저트와 음료도 판매한다. 소박한 테라스와 전체적으로 모노톤인 탓에 좀처럼 눈에 띄는 곳은 아니지만, 이곳을 만든 건 인도네시아와 대만, 그리고 일본의 서로 다른 직업을 가진 세 사람이다. 이곳에선 2층의 좁고 좁은 공간을 활용해 지속적인 전시와 워크숍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PON DING이란 생소한 이름의 의미는 ‘물이 샘솟는 공간,’ 책방을 운영하는 3인 중 한 명인 이치우는 “타이페이란 도시에 작은 오아시스처럼 아이디어가 오고가고 다양한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가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인디펜던트한 타이틀이 대부분이고 일본에서 기인한 가장 작은 매체 Zine도 다수 취급한다. “저희는 7년 전 한 디자인 페어에서 만났어요. 독립 출판, 상품 디자인, 전시 큐레이팅 백그라운도 모두 달라요”라는 이치우의 말처럼, PON DING은 다름, 차이에서 새로움을 그려가는 공간이다. 그는 책방을 찾는 “손님의 40% 이상이 불특정 다국적의 사람들”이라고도 얘기했다. 가장 작다는 건 아마 가장 큰 가능성의 공간이란 의미이기도 하다.
신간, 베스트셀러 중심의 시간을 걷어내고, 책방이 책장을 채우는 건 책이 놓인 자리의 어울림, 연결,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 스며드는 그라데이션 지형이다. 책을 펼치다 커피가 생각나 블랙 커피를 한 잔 마시고, 허기가 느껴져 간단한 파스타로 요기를 채우고, 술 생각애 칵테일 잔을 기울이는, 책에서 시작되는 일종의 연쇄 고리같은 시간을 그대로 형상화한 책방, 후즈크에가 도쿄 하츠다이에 2014년 문을 열었고,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에 책방과 카페를 함께 리뉴얼하며 츠타야가 완성한 건 에스컬레이터가 아닌, 계단이 연결해주는 이어짐의 공간이다. Shelf67란 이름을 가진 그곳엔 스파이크 존스의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에 등장하는 7과 1/2과 같은, 이곳을 벗어난 기묘한 이질감의 내일이 느껴진다. 중국 상하이에 위치한 쓰난서점은 책방을 인체에 비유하듯 디자인됐고, 총 다섯 층의 공간 중 1층은 심장을 은유하는 의미로 카페와 라운지 공간이, 지하 1층은 잠재 의식의 영역으로 역사, 철학 코너가, 3층은 사람의 눈과 귀를 상징하는 맥락에서 음악과 아트 관련 타이틀이 채우고 있다. 600평이 넘는 규모의 대형 서점임에도 쓰난서점은 하나의 유기체 안에서 조금도 획일적인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홍콩의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Home Journal>은 “신체의 부위와 연결된 가장 유기적인 서점”이라 평가했다. 어쩌면 책은 사실, 사람을 가장 닮아있다.
(つづく)
*singles 9월호에 게재된 기사 중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