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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Oct 17. 2019

머핀도 나이를 먹는다

하염없는 실패의 연속, 빵은 그곳에 있었다.


오래 전 스타벅스엔 쵸코 퍼지 케이크란 메뉴가 있었다. 쵸코 머핀에 에스프레소를 부으면 갈색빛 스펀지가 윤택을 발하며 변화하는 시간은 어느새 내게 일과가 되었다. 혼자 나와 살기 시작한지 1년. 일이 끝나도 좀처럼 집으로 향하지 못했던 발걸음은 동네 인근의 카페를 전전했다. 커피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들어가 카푸치노나 라떼를 시키고, 맛도 잘 모르면서 비어버린 시간을 이런저런 뺑으로 채웠다. 데니쉬, 스콘, 패스츄리, 티라미스나 밀푀유. ‘걷고 싶은 거리’라는 이름을 얻기 전의 홍대 인근을 걸었고, 체인 커피숍들의 얼마 되지 않는 디저트를 습관처럼 집어 들었다. 세상의 빵은 수 백 가지가 넘고, 좋아하는 빵을 찾기까지의 길은 그 보다 더 하겠지만, 내가 빵에 집착한 건 분명 맛 때문이 아니다. 돌연 비어버린 시간이 빵을 찾게했고, 커피와 한 조각을 주문하면 찾아오는 늦은 오후의 한 폭이 고작 내가 택한 여기가 아닌 어딘가였다. 블랙이거나 브라운이거나, 단지 농도가 변해갈 뿐인데, 한결 질펀해지는 촉감의 머핀 한 조각은 때로는 30분, 때로는 한 시간, 어쩔 땐 몇 입을 대지도 않고 일어났다. 어찌보면 하염없는 실패의 연속. 빵은 그곳에 있었다.




하루를 끝내고 싶지 않을 즈음, 빵이 있었다. 공덕동에서 604 버스를 타고 홍대 골목의 2층 커피숍에 앉으면 눈 아래로 내가 알던 시간이 굴러갔다. 쇼핑을 하거나, 대화를 나누거나, 집으로 돌아가는 그런 길의 시간이 있었다. 이유를 찾아보면 빵과 나 사이에 아무런 연결 고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빵은 어느새 무의식의 습관처럼 되어버렸다. 영국에서 애프터눈 티를 마시고, 일본에서 오후 3시의 간식을 얘기하는, 그런 게 아닌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는 이상한 습관같은 것. 잘 찾는 메뉴가 아니었던지, 들어가면 쇼케이스 구석의 머핀을 확인하는 긴장이 있었지만, 빵을 곁에 둔 시간은 일상인듯, 일상이지 않은 듯 늦은 저녁처럼 쓸모가 없었다. 이 시간을 나는 무어라 얘기할 수 있을지 모르겟다. 허기를 채우는 것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도 아닌, 머핀 한 조각과 마주하는 고작 테이블 하나의 시간을 나는 무어라 얘기할 수 있을까. 집에 가는 도중 한 시간 남짓의 허송세월에 의미는 있는걸까. 노트를 꺼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었다. 창밖을 내다봤고 지나간 일들을 더듬었다. 나 홀로, 그리고 빵과 함께. 세상엔 어쩌면 빵과의 시간이 흘러간다. 



쵸코 퍼지 케이크는 지금 없다. 유행이 유행을 밀어내는 시대에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만, 나는 지금까지 그 시절의 나른한 시간을 왜인지 기억한다. 매일같이 쌓여가던 우유부단, 달래지 못한 허무함을 안은 채 돌아가던 길, 가게 간판의 네온이 켜지던 무렵의 밤하늘을 기억한다. 이제와 돌아보면 빵과 함꼐했던 시간. 내게 흘러갔던 빵의 시간과 내가 아닌 나, 나를 닮은 나를 찾아 헤매던 시간. 에스프레소에 젖은 머핀 맛은 아련해졌지만, 그 시절의 맛은 왜인지 남아있다. “방금 다 나가버렸어요.’ 점원의 이 외마디가 이렇게 선명한 건, 나와 나의 빈 자리의 시간이어서가 아니었을까. 10년이나 넘게 지나 머핀의 빈 자리가 생생하다. 요즘은 체인 빵집에서 머핀을 세개 들이 한 봉지로 판매하고, 크랜베리거나, 치즈거나, 견과류를 넣은 머핀들이 무수한 빵에 묻혀 팔려가지만, 머핀에 담긴 딱 그 만큼의 시간은 지금 여기 어디에도 없다. 잠깐의 샛길, 꾀병을 위장한 휴식, 수 십일을 채워냈던 텅 빈 시간의 공간. 떠나버린 머핀에서 남아있는 머핀을 바라본다. 몇 년이 지나 머핀 틀 앞에서 짤주머니를 쥐고 있던 나의 그림은, 아마도 이미 예고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빵과의 만남은 묘한 시간에서 찾아온다. 별 다른 관심 없이 지나쳤던 빵이 뒤늦은 추억이 되고, 좀처럼 입에 맞지 않아 쳐다보지 않던 메론빵을 찾아 헤매는 날이 설마 오기도 한다. 어릴 적엔 딱딱하다 뱉어냈던 바게트가 그저 싸구려라 그런 줄 알았지만, 그건 아마 내가 아직 덜 자랐기 때문일지 모른다. 쵸콜릿을 좋아한다 생각했다. 똑같이 달아도 캬라멜은 지저분하고 쵸콜렛이 단아하고 단정하다 느꼈다. 하지만 나는 고작 몇 년 전 가장 맛있는 캬라멜 마키아토를 일본 시골 작은 카페에서 만났고, 프랑스 빵이 다 딱딱한 건 아니다. 그저 내가 준비가 덜 됐거나, 그 쪽이 준비가 덜 됐거나. 만남이 타이밍이란 건 왜 항상 뒤늦게 알게될까. 10 여 년 전 내가 먹은 머핀은 진한 커피 향이 났고, 어쩌면 내게 빵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어긋남이 빵과의 시간을 쌓아간다. 홀랑 까먹고 봉지를 버려버리는 빵이 아닌, 무심코 지나쳤지만 어딘가 남아있는 빵. 2년 전 하얀 조리복을 입고 오븐 앞에 섰던 나를, 나는 오래 전 빵을 전전하던 날들만큼 설명할 수가 없다. 아마도 어느 새벽 벌어진 일. 허무한 두 세시간을 채워줬던 머핀은 고작 50g 정도였다. 계란을 풀고, 설탕을 넣고, 버터를 녹이고. 휘젖고 휘젖고. 세월이 흘러 그렇게 잘 되지 않았던 짤주머니의 애씀이 이제는 머핀의 텍스쳐임을 안다. 틀 안에 일정하게 반죽을 채워넣기 위해 떨리던 손의 창피함이 머핀의 식감임을 안다. 4X6의 틀을 고이 채워 오븐에 넣고 한참을 기다리면, 틀 안에 보이지 않던 속살이 부풀어 오르고, 아슬아슬한 그 순간이 어김없는 탄생의 시간임을 안다. 세상엔 왜인지 타이밍이 알려주는 비밀이 있다. 

https://youtu.be/Iufuqw5HS2o

시간이 흘러 홍대를 걷는다. 나이와 함께 동선은 달라졌지만, 발끝이 향하는 방향은 왜인지 닮아있다. 지난 달 우연히 들렀던 합정동의 컵케이크 집이 어느새 문을 닫았다. 애매해진 시간을 채우러 들어간 그 곳에서의 20여 분은 이제 어디에도 없는 시간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 곳에서 컵케이크의 시간을 보았다. 아담한 접시 위에 작은 포크가 함께 놓은 컵케이크에 작고 조용하게 흘러가는 시간. 점심 시간의 수선함이 사그러든 햇살 아래 작은 포크와 컵케이크가 놓인 자리. 유산지를 살짝 벗겨가며 포크를 손에 쥐는 동작은 결코 머핀의 리듬이 아니다.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캐리가 집앞 계단에서 머핀을 베어 물 때, 지극히 일상인 그 움직임이 내가 만난 머핀의 첫 감촉이라면, 작은 포크로 살짝 덜어내는 느림의 컵케이크는 그곳에만 존재하는 딱 한 번의 순간이다. 컵케이크는 가장 작은 방식으로 빵의 시간을 알려준다. 머핀과 비슷해 보여도 끝도 없이 변화하고, 고작 5mm 크기의 당근 장식 하나 얹고 새로운 컵케이크가 되는 컵케이크. 내가 갈구했던 오래 전의 잃어버린 시간은 어쩌면 스펀지 위에 얹어지는 버터 크림과 조금 반짝이는 스파클링이 아니었을까. 상수동의 컵케이크 치카리셔스에서 오래 전 바라봤던 내일과 마주했다. 뉴욕의 15년 전통 컵케이크를 한국에 데려온 건 그곳에서 방황하던 시절의 빠띠쉐 홍우향 씨다.




* 싱글즈 10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빵과 OO'란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그 첫 번째 이야기, 나와 머핀, 머핀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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