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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Nov 08. 2019

가끔은 식빵같은 사람이고 싶었다

식빵은 그저 식빵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빵은 종종 이상한 은유로 남는다. 금새 6조각, 혹은 8조각 슬라이스로 잘려 진열대에 나열되지만, 아주 잠시 자리했던 도톰한 산 등선의 시절을, 나는 기억한다. 


지난 해 여름을 생각한다, 땀줄기가 등을 타고 허리춤까지 흐르던 오후, 신사동 한복판에서 88겹으로 만들어진 식빵을 먹었다. 회사를 나오기 전 마지막까지 살았던 동네에 알지 못했던 빵집의 인기 상품이었다. 이제는 커팅하지 않은 채 판매되는 식빵이 그리 새로울 일도 아니지만, 그 여름날 알던 동네의 모르던 가게에서 맛본 식빵은 유독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식빵이라 얘기할 수 없을 식감, 잼이든, 버터이든, 방해만 될 것 같은 달콤함, 얼그레이, 치즈, 메이플, 쵸코 누뗄라 등 종류도 다양해 작은 사이즈의 얼그레이 식빵 하나를 골랐다. 점원은 세련되게 포장된 박스에 정확하게 정사각형으로 담긴 식빵을 건넸고. 집에 돌아와 잘라보니 내가 알던 식빵이 아니다. 무슨 오기인지 박스에 붙은 설명표를 꼼꼼히 확인하니, 흘러간 세월이 그저 야속하다. 식방은 그저 식빵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한다.


이른 아침 다이칸야마. 데니쉬가 식빵,식빵이 프렌치토스트. 그런 贅沢だった朝。

왜인지 데니쉬가 붐이다. 수 많은 결을 내기 위해 반죽을 밀고 펴고, 발효도 보통의 몇 배는 거쳐야 하는 이 고달픈 빵이 인기다. 50결 식빵, 데니쉬 식빵, 인기 빵집은 물론 체인 베이커리까지 새삼 데니쉬를 구워내고, 기껏해야 단과자 빵 옆에 놓여있던 2000원짜리 데니쉬가 왜인지 식빵이 되어 팔려나간다. 시간이나, 노동이나, 데니쉬의 식감이 월등한 건 당연한 일인데 새삼스레 소란스럽다. 돌아보면 지난 여름 얼그레이 향이 배어있던 88결 식빵 역시 사각으로 성형한 데니쉬에 다름 아니었고, 그러고보면 보통에 배가 훌쩍 넘는 가격도 딱히 놀랄 숫자는 아니다. 보다 좋은 맛, 오늘이 아닌 내일을 찾아 흘러가는 시간 속에, 데시쉬 반죽으로 만들어진 8000원짜리 식빵이 빵집의 곳곳을 채우고 있다. 변형과 변주. 어쩌면 이런 게 세월이 시간을 살아가는 방식일텐데. 좀처럼 완성되지 않던 산 모양의 식빵이 내겐 아직 남아있다. 완성되지 않은 시간에 아마도 마지막은 없고, 그 끝나지 않은 시간이 여전히 생각날 때가 있다.

https://youtu.be/-UtAV_azaBc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당연한 세상의 이치다.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해 살아갈 때 음식이 시대를 거스르는 일은 거의 없고, 누구는 여전히 식빵은 무언가와 함께 완성되는 빵이라 얘기할지 모른다. 하지만 세상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이 있고, 지나갔지만 남아있는 시간이 있다. 몇 해 전 일본의 어느 드라마에서 교열, 교정의 일을 나사에 비유하는 대사를 들었을 때, 그건 내게 두 해 전의 옥수수 식빵이었고, 우유 식빵이었고, 쌀 식빵이었다. 같은 중량의 반죽을 세 개 만들고, 시차를 두어 성형하고, 발효하고, 순서에 맞게 틀에 넣는, 채 1분도 되지 않는 시간에 꽤 애를 먹었다. 이제는 아무런 쓸모가 없어져버린 그 시간에 많이도 애가 탔었다. 어차피 잘라서 먹고, 이제는 아무도 산형으로 식빵을 만들지 않는 시대에 어제가 되어버린 시간들. 하지만 그 보이지 않음으로 식빵의 투박한 결이 만들어지고, 무엇과도 무리없이 어울릴 수 있을 식감의 유연함이 길러진다. 무엇보다 식빵과 데니쉬는 케이크와 빵만큼 다른 질감을 갖는다. 그건 내게 어제와 내일만큼이나 다르다. 아무런 쓸모도 없는 날들의 보이지 않는 기억들이 어느새 흘러가고 있다. 늦은 여름 저녁, 인사동 거리를 걷다 식빵 30여개가 창을 가득 매운 ‘안국 153’에서 잊고있던 빵의 온도를 떠올렸다.


*빵 153번지, 안국 153

빵에 우연이란 게 있다면 아마도 이런 걸지 모른다. 안국역 거리를 걷다 신사동 동네 빵집을 만났다. 갑작스레 이사를 가게되며 달랑 3개월 남짓을 살았던 신사동 2층집은 돌연 끝나버린 마지막 탓에 아직도 물컹하게 남아있다. 대로변 큰 창 하나를 식빵으로 가득 채운 ‘안국 153’은 르 알라스카로 유명한 베이커리의 또 다른 빵집이다. 빵집의 문을 열게되는 건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 풍경에 기웃거리지 않기란 조금 힘들다. 시그니쳐인 우유 식빵을 비롯 효모, 잡곡, 건포도, 밤, 로즈마리, 바질 등 여섯 종의 식빵을 굽고, 지역의 특성을 살려 전통, 한국적인 빵을 수십 종 하루 수차례 만든다. 올해로 8년차인 김율현 제빵사는 이전 떡과 전통 술을 배웠고,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식빵을 다양한 베리에이션과 함께 살아간다. “간단한 식사용이 아닌 요즘은 간식용이 유행하고 있다 느껴요. 젊은 사람들은 무언가 들어있는 블루배리 잼, 먹물 크림 등 다양하게 응용될 걸 선호해요.” 세월이 느껴지는 우드 톤의 공간은 묘하게 2층으로, 계단을 올라 2.5층으로 이어지고, 그렇게 알 수 없는, 어쩌면 흘러가버린 빵과의 세월이 이곳엔 숨어있다. 김율현 제빵사는 건축 일을 하다 떡과 술을 거쳐 발효의 세계에 빠져 빵 굽는 오븐 앞에 섰다. 그의 일상이 얘기하듯 삶에 우연은 어느새 필연이 되곤한다. 2014년 겨울에 시작된 153에서의 시간은 오늘도 또 한 번의 우연을 기다리고 있다.

*Singles 10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빵/365 연재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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