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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Dec 05. 2019

퇴사한 아침,
밖은 도넛을 닮아있었다.

도너츠가 떠난 자리, 구멍이 남았다


빵은 종종 세상을 은유한다. 쵸코, 글레이즈, 크런치, 치즈크림...표정은 제각각이어도 손 한 뼘 크기만한 링 모양 도너츠. 세상엔 세월을 머금은 빵이 있고, 도너츠가 떠난 자리엔 구멍이 남는다. 문득 그런 계절이 떠올랐다.

https://youtu.be/IHoCh-pjnuQ

던킨 도너츠의 올드 패션드를 좋아했다. 장식 하나 없이 투박하고 거칠고, 멋 하나 부리지 않은 그 도너츠엔 도너츠의 맛이 났다. 담백하고, 푸근하고, 익숙하고 편한, 달리 무어라 얘기할 수 없는, 도너츠의 맛이 났다. 밀가루, 계란, 우유, 별 다른 재료가 들어가는 것도 아니면서 그건 이상하게 도너츠의 맛이었다. 스콘, 까눌레 정도를 떠올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맛으로 얘기할 수 없는, 어쩌면 시절의 감촉 같은 무언가가 거기엔 있었다. 던킨은 30여 종, 크리스피는 20여 종. 아이싱, 토핑, 코팅, 크림, 치즈, 버터...장식이 많아지며, 딸기의 새콤함이 대신하고, 뒤범벅된 쵸코에 가려지고, 격자 무늬 와플 도넛이 되어버리기도 하지만, 도너츠엔 내가 알던, 몸이 기억하는, 오래되고 상냥한 맛이 있다. 그저 오븐이 아닌 기름에 튀기는 탓에, 어릴 적 집에서 도넛 파우더로 엄마가 구워주던 기억의 잔향일지 모르지만, 도너츠엔 도너츠의 맛이 난다. 달콤함, 부드러움, 촉촉함... 그리고 빵엔 세월로 남아있는 맛이 있다.

글을 쓰기 시작하고 10여 년, 혼자 책을 만들겠다 생각하고 ‘도너츠 홀’이란 제목을 떠올렸다. 두 해 전 일본에선 ‘미스터 도너츠에서 만나요’란 책자를 펴낸 이토 씨를 만났다. 일본 드라마 작가 사카모토 유지의 드라마 ‘콰르텟’엔 ‘도너츠 홀’이 콰르텟 이름이고, 이토 씨는 “도너츠는 구멍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아요”라고 얘기했다. 도쿄에 살던 시절 신쥬쿠 카부키쵸 미스터 도너츠 2층에서 몇 시간 씩 멍하니 있곤 했다. 그 체인이 한국에 들어왔던 2000년대 후반 홍대 뒷골목 테라스 석에서 폰데링을 뜯었다. 대학 시절 TV를 틀면 광고 속 배우 이진욱이 던킨 도너츠를 들고 출근을 했고, 마지막 회사 로비엔 그 가게의 매장이 있기도 했다. 그리고 2017년 여름, 미스터 도너츠에서 만났다. 책 제목 자리에 ‘도너츠 홀’이라 쓰며 나는 아마 빈 자리는 시작이라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도너츠가 지나가고 남아있는 구멍의 이상한 시작을 떠올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회사를 나오고 2년. 멈춰있는 게 두려워 앞만 바라봤던 시절, 도너츠 구멍은 의미가 심장했다. 빈 자리를 품고 시작되는 시간. 모든 게 사라지고 남아있는 시작. 꽈배기 도너츠와 먼치킨을 지나, 나는 도톰한 시나몬 도너츠를 하나 골랐다. 


도너츠의 종류는 아마도 수 백가지다. 링 모양을 만들면 자연스레 가운데 반죽으로 ‘홀’이 생겨나고, 던킨은 이를 먼치킨(Munchiken), 캐나다의 도너츠 체인 팀 홀튼은 ‘팀비츠(Timbits)’라 이름붙여 판다. 유행에 따라 각종 잼과 크림, 토핑과 코팅의 베리에이션, 심지어 포틀랜드 오리지널 브랜드 부두 도넛(Voodoo Doughnut)은 온갖 휘황찬란 컬러와 귀괴하고 익살스런 모양을 하고있다. 왜인지 도너츠만큼 장난치고 싶어지는 빵도 없다. 내겐 오래 전 기억의 도너츠이지만, 시절이 기억하는 날들은 잘 보이지 않고, 그럼에도 도너츠엔 시작의 기억이 있어, 100여 년 전 일부러 구멍을 남겨두었던, 빈 자리를 만들었던 날들의 풍경을 나는 생각하고 싶어진다. 던킨 도너츠 이름의 시작이기도 한 해리 애드워드의 1933년 흑백 영화 ‘도라의 던킨 도너츠(Dora’s Dunkin Doughnut)’는 도너츠가 커피를 만나게 된 순간에 관한 이야기이다. 도라와 앤디의 만나으로 시작하고 결혼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시작으로 끝이나는 마지막. 마지막을 품고 시작되는 처음. 그런 시간과 조우한 계절이었다. 크리스피도, 던킨도, 미스터 도너츠도 아닌 도너츠를 찾으려다 몇 년 전 살던 동네의 골목을 걸었다. 어쩌면 서울에서 유일하게 링 모양 도너츠를 판매하는 곳. 하루 여덟 종류의 도너츠를 직접 구워 만들어 파는 곳. 어썸 도넛, 호파넛, 꼬소넛. 내일이 알 수 없는 이름들의 도너츠 중, 꽤 두툼한 도너츠를 하나 골랐더니 잘게 자른 베이컨 조각의 맛이 났다. 너머의 도너츠를 생각했다.


*도시의 어떤 구멍, 어썸 도너츠

합정동 골목길 벽돌집. 이렇다할 간판 없이 당일의 도너츠 사진 4장이 벽에 붙어있다. 볼륨이 보통 도너츠 두 배는 돼 칼로리도, 배도 부르지만, 그만큼 가격도 1.5배 수준. 일본어, 한국어, 영어가 뒤섞인 메뉴 이름에 다소 정신이 없어도, 간판 메뉴 ‘어썸 도넛’은 단맛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더할 나위 없는 한끼일지 모른다. 도너츠에 베이컨을 얹을 정도로, 어쨌든 ‘어썸’한 곳. 이곳에도 도너츠의 시간은 흘러간다.


https://brunch.co.kr/publish/book/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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