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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Jun 03. 2020

집에서 OOO, 근데 애초 집이란

어느 날, 집이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집에서 라이브, 집에서 클래식, 집에서 스포츠, 심지어 집에서 술자리. 만남이 가로막힌 시절 일상은  랜선을 타고 흐르고, 늘어나는 해시태그 속에 집은 어느새 가장 든든한 하루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애초 #집이란. 오늘도 나는 집에서 24시간을 있었다.



이른 아침 새들이 지저귄다. 아파트 주변이 낮은 산이여서기도 하지만, 맑은 날이면 유독 새소리가 자주 들리고, 심지어 조금은 징그러울 정도로 덩치가 큰 까마귀 울음 소리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동네 우체국이 벨을 누르는 건 점심 시간이 지나고 오후 1시 즈음. 길 건너 학교에선 저녁 5시를 알리는 차임벨을 울려오기도 한다. 집에만 있지 않았더라면 지나쳤을 그림들. 평소의 일상을 빼앗기지 않았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더 오랜 일상들. 본래 외출을 자주 하지도 않는 인간이면서, 요즘의 ‘집’은 새삼 어제의 그 자리가 아닌 것만 같다. 유튜브로 조성진의 쇼팽을 듣는 건 조금 초라할지 몰라도, 조도를 낮추고 대신 테이블 초에 불을 붙이고, 와인이나 방금 내린 커피 한 잔을 곁에 두면, 이 시절에 그럴싸한 저녁 한 자락이 완성되기도 한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5개월 즈음. 봄 대신 찾아온 지금 이 시절의 코로나는 조금 생소한 일상이 되어가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을 집에 머무르게 하고, 해시태그로 이어지기 시작한 ‘집에서의 바깥 생활’은 그 끝이 없어 이 와중에 ‘집의 재발견’, ‘집의 가능성’같은 걸 생각하게도 한다. 잃어버린 일상에서 몰랐던 일상을 찾아내고, 디지털에서 아날로그를 끌어내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가는 지금의 조금 낯선 하루는, 왜인지 계속 ‘집’에만 있다. 늘어만 가는 확진자 수에 놀라면서도 나는 ‘사회적 거리 두기’랄지, ‘잠시 멈춤’이랄지, 평소 이곳에 자리하지 않던 어떤 ‘머무름’, 어떤 ‘느림’의 기운이 봄바람과 같아 그저 좋았고, 퇴근에서 출근 사이, 귀가에서 외출 사이, 떠나고 돌아옴의 자리기만 했던 ‘집’은 지금 우리가 몰랐던, 부재하던 시간의 일상을 발휘하고 있다. 코로나는 상상도 하지 못했겠지만, 이만큼 집을 얘기하던 계절은 없다. 집에만 있다보니 집이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모두가 모두에게 불안일 수 있는 시대에 집이 유일한 피신처라는 건, 왜인지 조금 따뜻하다. 이름에도 ‘신종’이 붙은 그 질병을 우리는 여전히 잘 모르지만,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 나를 양보하는 거리, 평소의 일들을 자숙하는 시간에 위기는 조금 걸음을 늦춘다. 출근하지 않고 맞이하는 늦은 아침의  여유로움은 이제서야 알아채는 별 거 아닌 ‘집’의 오래된 얼굴이기도 하다. 불편이야 하겠지만, 디지털 한 복판의 시대에 방 문 한 번 열지 않고 해결 가능한 일상은 상상 이상으로 많고, 해시태그만 붙이면 집에서도 내가 아닌 누군가와 일상을 공유할 수 있다. 그럼 뭐하러 집을 나설까도 싶지만, 역으로 이제야 #이 붙은 집에서의 시간을 궁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건 모두 ‘집’이 있어 가능한 일들. 몇몇 사각지대의 대체될 수 없는 일상의 애달픔은 어찌할 수 없지만, 이런 시절이기에 그 자리를 다시 한 번 돌아볼 수 있는 것도 지금의 현실이다. 올 봄 가장 큰 화두가 되어버린 #집에서 OOO란 키워드. 이건 사실 #집이 지켜주는 OOO란 말에 다름없고, 전국 전역에 와이파이가 뚤려있는 시대에 우리가 잃은 건 우리 집이 아닌 남의 집 누군가와의 만남이다. #를 아무리 많이 달아보아도, 집에서의 시간은 결국 모두 1인칭, 나의 자리에 머문다. 일본의 SF 소설가 오가와 사토시는 “만남, 모임은 인류 역사상 가장 긴 세월의 ‘즐거움’”이라고까지 말했는데, 그만큼 몸도, 마음도 좀이 쑤실만은 하다. 하지만 그 반대 자리에서, 홈리스들이 판매하는 잡지 <빅 이슈>의 일본판은 수 십 억을 호가하는 집에 사는, 혹은 살던 이들의 집 없던 시절의 이야기를 번역해 소개하기도 했다. 집도 없이 잘만 성공하고, 잘만 돈 벌고, 잘만 명성을 쌓았던 그들을 생각하면, 랜선을 타고 대화를 하고, 암호와도 같은 #를 뱉어내며 만나고, 서로 다른 자리에서 서로 같은 시간을 즐기는 팬데믹 시대의 뉴-일상은, 분명 철제로, 벽돌로 쌓아올린 집의 내면을 드러내고 있다. 영화 <록키> 시리즈의 따뜻한 뒷얘기로 알려진 실버스타 스탤론과 그의 애견 버커스 사이의 일화. 돈이 없어 강아지를 팔아 생계를 이어갔던 스탤론이 이후 직접 쓴  시나리오를 팔고 받은 3천 달러를 들고 강아지를 찾으러 달려갔다는 사연은, ‘Long Way Home, 둘만의 작은 집이 완성되는 이야기처럼도 들려온다. 집으로 가는 때로는 멀고 먼 길. 인류의 가장 오래된 서사일지 모를 이 문장은, 항상 그곳에 있고, 언제나 우리 편이다. 



실버스타 스탤론, 다니엘 크레이그, 할 베리, 노벨 문학상 수장자인 귄터 그라스, 그리고 누구나 아는 부자 애플의 스티브 잡스와 KFC의 커넬 해런드 샌더스 등. 바닥에서 고층 빌딩만큼의 반전을 일궈냈던 이들의 사연을 모아 완성한 <빅 이슈>의 이 기사는, “홈리스는 그 사람의 정의가 아닌 단지 ‘집이 없는 상태’를 일컫는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홈’보다는, 보다 물리적인, 물질적인 의미에 가까운 ‘하우스’가 더 적절할텐데, 2011년 사망 당시 무려 102억 달러라는 거대 재산을 남기고 떠난 스티브 잡스는 길거리의 빈 통조림 캔을 주우며 생활하면서도 친구 집 마루바닥 덕에 간신히 공원 벤치에서의 밤 만은 면할 수 있었다. 배우의 꿈을 갖고 뉴욕에 도착한 뒤 실버스타 스탤론이 애견 버커스와 함께 매일 거리를 배회하다 돌아온 건 상경 당시 처음 도착했던 정류장 부근의 작은 벤치이고, ‘집’은 그렇게 2층이거나 3층이거나 50평, 100평, 숫자로 얘기되는 건물이 아닌, 어떤 시간이 머물렀던 자리, 잊지 못한 기억이 남아있는 공간의 이름이기도 하다. 길거리 벤치에서의 생활을 전전하며 “돈이 없었기 때문에 뭐든 닥치고 했다”는 제임스 본드 다니엘 크레이그와, 1952년 믿기 힘든 나이 62세에 KFC를 설립하기 까지 반평생을 차에서 새우잠을 잤던, 치킨 레시피를 팔기위해 발품을 팔고 끝내 세계 가장 유명한 닭 브랜드를 만들어낸 켄터키 할아버지의 2만 곳이 넘는 점포이자 어쩌면 ‘홈’과, 여성 뮤지션 패티 스미스가 수 천 밤을 지샜던 지하철 찬 타일 바닥, 그리고 1999년 노벨 문학상을 가능하게 했던 귄터 그라스가 가난한 유학 시절의 밤을 지샜던 ‘성 프란시스코 가난한 형제의 집’은, 그들의 ‘하우스’는 아닐지 몰라도, 분명 각자의 ‘홈’이곤 했다. 그리고 사실, 집을 이야기한다고 할 때, 우리는 집에서의 시간을 이야기하고 있고, 사소하지만 봄을 맞아 창에 새 커튼을 단다는 건 단지 창가에 못보던 천 자락이 걸리는 게 아니라, 그렇게 내비치는 햇살, 아침, 오후, 저녁 농담을 달리할 방 구석의 시간을 궁리하는 일이기도 하다. 도시에서 집은 투자를 위해서도, 아이 교육을 위해서 옮겨갈 수 있고, 부동산 계약에 맞춰 다른 동네의 주민이 되버리고 말기도 하지만, 그건 아마 어떤 결과들, 우리가 볼 수 있는 집의 가장 현실적인, 하우스로서의, 물리적 흔적의 형태일 뿐이다. 2018년 개봉한 라야 감독의 다큐멘터리 <집의 시간들>은 애지감치 처음부터 ‘집’을 공간과 시간이 어울러 완성되는 곳이라 정의하기도 한다. 그 영화는 2019년 철거된 둔촌동 주공 아파트를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끌고가고, 아파트 전경에 오버랩되는 전 주민들의 사소하지만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느린 화면과 함께 집의 말처럼 들려오는 효과를 만든다. “낡은 집을 보면 마음이 편해지는 건 낡아서 생긴 틈새에 누군가의 시간이 스며들었다는 게 아닐까요.” 집에만 있는 시절, 집의 나머지 절반, 시간의 품들이 우리를 움직이고, 그건 아마 나와 나의 오랜 집, 그런 단둘이 만들어가는 오늘의 낯설고, 익숙한 일상이다. 

https://youtu.be/e-JW1GHbp9o

이 영화를 다시 보고 글을 적었습니다. 인사이드 르윈. 


오늘도 집 근처 고작 2천 걸음 즈음을 걸은 나는, 방 안에 돌아와 컴퓨터 이곳저곳을 얼씬거리다, <베네티 페어> 4월호 편집장 글 속 “지금이 오래 전 전시 때와 유사하다”는 문장과 마주쳤다. 코로나 이후 이탈리아의 르포 기사를 실은 이번 호에서 <베니티 페어>는 알렉스 마졸리에게 그 기획 사진을 전임했는데, 그는 코소보 내전이랄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전쟁, 인류의 다툼들, 불합리와 분노가 응어리져 터졌던 험난한 현장을 주로 찍어온 포토그래퍼다. 그리고 편집장 존 라디카가 덧붙인 건, ‘판데믹은 전쟁인가?’라는 물음. 위험을 피해 방문을 걸어잠그고, 집에 숨어 일상의 온갖 불편함을 감수하고, 집에서의 자급자족에 의지하는, 그렇게 단절된 듯한 삶의 그림은 비슷할 수도 있겠지만, 코로나가 도통 끝날 줄을 모르는 지금, 우리는 집에서 안식을 찾고, 내일을 그리고, 해시태그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무엇보다 서로를 미워하지 않는다. 프랑스 소설가 조르주 페렉은 자신의 책 <공간의 종류들>에서 공간과 시간 중, 시간은 시계를 수도없이 확인할 정도로 위험하지만, 어느 누구도 나침판을 휴대하지 않을 정도로 공간은 그보다 덜 위험하다’고도 적었는데, ‘집’은, 일상을 가장 일상이게, 나를 가장 나이게 하는 장소임에 틀림없다. 워딩은 다르지만 #집에서로 시작하는 이런저런 말들은 사실 ‘집에서의 이런저런 실천’들, 집은 나를 실천하게 한다. 레이디 가가의 제안으로 시작된 ‘One World: Together at Home’ 캠페인은 자신의 집에서 공연을 하는, 규모는 훨씬 작아졌지만 지금까지의 커리어, 일상을 이어가는 또 한 번의 하루이고, 엘튼 존, 빌리 아이리쉬, 테일러 스위프트, 방에서 방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사이버 세계의 이웃, 하나의 ’연대’를 낳는다. 라디카 편집장 역시 글을 적어내려가며 2020년 봄에서 ‘새로운 유형의 조용한 연대(a new kind of quiet Solidirity)’를 보았다고 언급했다. “(코로나는) 모임이라는 인류 최대의 즐거움을 앗아갔을 뿐 아니라 ‘자숙’이라는 공격도 가하고 있다”고 성을 내기까지 했던 소설가 오가와 조차도 ‘Pen’에 기고한 긴 글 말미에 “이런 시절에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이라면...”이라며, 읽어보면 좋을 책 세 권을 추천했다. 그런 나에게서의 실천들. 무라카미 하루키도 자신의 라디오 방송 ‘무라카미 라디오’에서 “노래 하나, 책 한 권이 조금이라도 마음의 치유가 될 수 있다면”이란 말로 자택에서의 방송을 시작했고, 지난 4월 지미 카멜 쇼에 비디오 출연한 새뮤엘 잭슨은 “나는 의사는 아니지만 내가 읽는 시를 잘 들어!”라며, ‘집에서 잡이나 자(Go the fuck to sleep)’를 낭송했다. 이런 집에서의 실천들. 너무나 가까이 있어 보이지 않던 집, 일상 어디에도 있지만 항상 배경이곤 했던 방. 일상의 한 축이었던 그곳이 이제와 찾아와 느리게 ‘머물고’, 이 따분한 하루도 언젠가 내가 아는 집으로 분명 돌아온다. 그런 LONG WAY HOME의 봄. 지금은 그저 조금 낯선 계절의 문턱을 지나는 중일 뿐이다.



사진 크레딧©️Yang Design / Fangfang Tian, Jamy Yang

*싱글즈 6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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